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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지기 전에

by 정혜영


살아오면서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한 대상이 있었나. 보고 싶을 때는 있었을지언정 '그립다'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는 '싶다' 앞에 오는 동사를 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 '보고 싶다'는 그저 한 번 봤으면 족한 마음이지만, 만나고 싶거나 보고 싶은 마음이 애틋하고 간절한 그리움의 상태까진 아니다. 보고 싶은 대상은 무수히 많지만, 그리운 대상을 꼽아보라면 한참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아직 간절하게 애틋한 그리움을 모르는가.

아마도 영영 헤어진 경험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몸이 가닿지 않았을 뿐,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박차고 일어나 대상에게 데려다 줄 탈 것에만 오른다면, 그것은 바로 해소 가능해질 감정이라 여기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보고 싶어도 대상이 쉬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거나 영영 만나질 수 없는 곳에 속하게 되었을 때, '보고 싶다'는 '그립다'가 된다.


며칠 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핸드폰 액정에 내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이 떠올랐다. 특정 앱의 자동화 프로그램이 작동했던 모양이다. 사진을 탑재한 날짜를 확인하니 큰 아이가 7살, 작은 아이가 5살, 아직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일 때다. 사진 속에서 아이들은 색깔만 다른 상의와 모자, 장화를 차려입고 무대 위 연예인들처럼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신나 하고 있었다.


13년 전 천진했던 남매, 지금은 거의 남남 수준인 현실 남매^^;; (사진 by 정혜영)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13년 전의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에 잠시 넋을 잃고 한참 바라보았다. 사진 속 아이들은 이제 훌쩍 자라 격변한(?) 모습으로 가까이에 있지만 당시 아이들은 이제 만날 수 없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온몸을 비비 꼬던 아이들, 반듯하게 곧추 선 사진이 오히려 귀한 연체동물 같던 내 아이들은 이제 없다. 그 아이들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며 아마도 방정맞게 깔깔거렸을 조금 더 젊었던 나도. 당시의 모습이 보고 싶어 사진을 꺼내 보며 추억할 수는 있겠지만, 다시 실제로 감각하여 만날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문득 '그립다'는 마음이 드는 건.


아직은 떠나보낸 것이 많지 않은데도 이런데, 나중에 나이가 깊어지면 얼마나 그리워할 게 많아질까. 그러니 지금 보고 싶은 것은 미루지 말고 보자. 만나고 싶으면 만나자. 먹고 싶으면 먹자. 하고 싶으면 하자. '~싶다'는 마음이 생기면 지체하지 말자. 나중에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에서 흐르는 소금물을 덜려면.


나태주님의 시, <그리움> (캘리그라피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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