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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그리움

by 정혜영


오색 그리움


시. 정혜영


검정 드레스를 두른 듯

검정 우산 위에

점점이 박힌

오색 보석들


빗줄기 스미어

빛 되어

알알이 번져간다


망울망울

흐르고 흘러

한데 깃드는

애틋함


"어여 들어가소"

"좀만 더 갈란다"


검정 우산 따라

먼 길 따라오는

모정은

물빛에 번져가는

오색 그리움




친정 엄마를 보고 왔어요. 보고 싶은 마음이 까만 재가 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시간이 주어진다는 건 최대의 행운일 거예요.

평소보다 시간이 좀 더 있다면 하고 싶은 일 목록엔 리스트가 길지만, 그중 그리운 이들 만나기는 늘 우선순위죠. 그 사람들 중 1번은 친정 엄마일 테고요. 물론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 네가? 하실 지도 몰라요. 늘 진중하길 바라며 그렇게 장녀를 키우신 분이 이제 와서 살가운 표현이 적다고 섭섭해하시는 눈치거든요. 엄마들은 자식들이 밖에서는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당당하되 부모에겐 한없이 보드랍길 바라지만, 사람이 어디 그렇게 엿가락 휘어지듯 하던가요.


아이들이 어릴 땐 챙길 짐도, 신경 쓸 일도 많더니 이제 며칠은 혼자 훌쩍 다녀올 수 있어 얼마나 홀가분한지요. 2박 3일 정도는 가방에 들어갈 짐도 몇 개 안 되죠. 홀랑홀랑한 가방이 서운해 괜히 노트북을 넣었다가 나중에 후회했어요. 가볍게, 간소하게 사는 삶은 늘 쉽지 않아요.


친정 엄마도 이제 많이 늙으셨나 봐요. 예전엔 딸이 남편 없이 혼자 가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냐"며 걱정하시더니, 이젠 함께 올까 봐 걱정해요. 작년에 여동생과 둘만 내려가 친정 엄마와 시간을 보내고 왔더니 내내 "니들이랑만 함께 하니 너무 좋더라" 해요. 유부남께서는 아내 친정 부모님이 연로하시면 아내 손에 전달드릴 용돈만 두둑이 챙겨 혼자 보내는 게 효도일지 몰라요.


산전수전 겪은 딸들과 공중전까지 겪어내신 노모가 오랜만에 만나면 좋은 점이 뭔줄 아시나요? 서로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 안달이란 거예요. 일과 육아, 가사까지 안 해 본 게 없는 여자들은 척하면 척이에요. 말하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일을 찾아 하거든요. 감독관이 없는데 잘 돌아가는 작업장 있지요? 그게 우리 세 모녀의 모습이에요. 식사가 끝나면 집에선 하기 싫은 설거지를 서로 하겠다고 밀쳐내다 결국 돌아가며 하자는 합의하에 물러나죠. 각자의 가정에서 애쓰는 걸 알기에 잠시라도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이 서로를 자꾸 움직이게 해요. 각자의 가정에선 자신이 아니면 돌아가지 않는 일들이 친정집에서는 절로 돼요. 그런 마법의 시간은 왜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요.


마지막 날, 좀 더 이른 열차를 예매한 동생이 먼저 떠나자 슬픈 이별이 한 번 더 남았다며 저를 보는 친정 엄마 목소리가 흐려져요. 하룻밤만 자고 가면 너무 서운하다고, 오려면 이틀 밤은 자고 가랄 때는 언제고, 세 밤은 자고 가야 안 서운하겠대요. 이렇게 사람 욕심이 끝이 없어요. 이럴 때 살가운 딸이라면, 나도 엄마랑 하룻밤 더 자고 가고 싶네, 하면 될 걸, 나도 자식 있어,라고 해서 엄마의 슬픔을 절반으로 줄여드려요.


가족이 다 올 땐 떠날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더니, 내 한 몸 준비는 금방이에요. 시간적 여유가 있어 열차 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하고 친정 집을 나서는데 친정 엄마가 들어 가시래도 자꾸 따라와요. 오전부터 주룩주룩 비가 내려 혼자 사는 엄마가 가진 몇 개 없는 우산 중 하나가 이미 동생 손에 들려 나갔는데, 엄마는 2개 남은 우산 중 더 예쁜 우산을 제게 건네줘요. 검정 색에 오색 물방울무늬가 점점이 박힌 우산이 시크한 블랙 드레스를 입은 여인 같았어요.


어깨에 맨 작은 가방 하나가 뭐가 무겁다고 한사코 제 캐리어를 끌고 앞장서 가시는 엄마. 캐리어가 비에 맞아 안에 든 딸의 물건이 젖을세라 당신 우산이 자꾸 캐리어 쪽으로 기울어요. 그런 거 보기 싫어 나오지 말라고 했던 건데. 이렇게 고집 센 엄마의 딸이라 저도 한 고집 하나 봐요.


나이가 들면 좋은 것 중 하나가 예전엔 껄끄러워 잘 못했던 것도 조금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살가운 표현 적은 장녀도 고집 센 엄마도 예전보다 포옹이 늘었거든요. 엄마와 저의 이별의 인사말이 "건강 챙기라"로 통일된 건 언제부터였을까요.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에 우산 접으랴, 버스에 짐 올리랴, 하다 잠깐 엄마 모습을 놓쳤는데 야속한 버스가 그런 속을 알리가 있나요.


집까지 오는 동안 엄마의 오색 물방울무늬 검정 우산을 몇 번 접었다 폈을까요. 비에 젖지 않길 바라는 엄마의 우산은 딸이 궂은일을 덜 겪길 바라는 엄마 마음 같아요.

조만간 엄마께 예쁜 우산 하나 보내드려야겠어요. 딸 둘이 하나씩 가져왔으니 엄마에겐 여분의 우산이 이젠 없을 테니까요. 그게 살가운 표현 적은 딸이 엄마께 하는 그리움의 언어거든요.


시, 캘리그라피 by 정혜영(자작시를 써도 오타는 나와요ㅠ '점점히' 아니고 '점점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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