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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기쁨을 잊은 지 오래된 당신께 추천하고 싶은 것

by 정혜영


50이 넘자 남편은 점차 가까워오는 퇴직이 실감 나는지 부쩍 생각이 많아 보인다. 늘 생각은 많고 행동은 적은 유형이긴 하지만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걱정은 멀지 않은 현실이라 좀 더 체감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어느 날 일찍 퇴근한 남편과 모처럼 단 둘이 저녁 식사하던 날, 우리의 퇴직 이후는 이런 모습(단 둘의 조촐한 식사)이 일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하루 어땠어?"

남편은 잠깐 생각하더니, "재미 없었"다고 답했다. 언젠 재미로 일하러 다녔다는 반문 대신, 짓궂은 질문을 추가했다.

"그럼 자기는 뭐 할 때 재밌는데?"

내 질문이 짓궂다고 언급한 것은 남편이 재밌어하는 게 없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은 요즘 어떤 것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사는 사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재밌는 게 없다"는 스스로의 답변이 무안한 지 남편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하랴, 자식 키우랴, 정신없이 살다 보면 별 준비 없이 중년을 맞이하게 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자식들은 이제 부모의 손길이 아쉽지 않을 만큼 성장했고, 직장에서는 명퇴를 해야 하나, 가늘고 길게 붙들고 가야 하나... 고민이 되는 50대에 가뜩이나 갱년기라는 불청객까지 찾아와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어디 한 곳 마음 붙일 데 없는 이 시기에 마음을 붙드는 취미 하나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간의 뇌는 몰입의 순간에 도파민을 뿜어낸다고 한다. 그 무엇에도 심드렁해진 중년에 몰입의 기쁨을 안겨줄 만한 게 있긴 하냐고 묻는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은 게 있다. 그것은 '캘리그래피'다.

그런데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박 겉핧기만 하다가 그만두는 게 안타까워 내 경험을 들려주고자 한다. 캘리그래피가 지속가능한 취미 활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년 여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집 근처 캘리그래피 공방을 찾아 등록해 배우기 시작했으니, 내가 캘리를 배운 지 딱 1년이 되었다. 처음엔 아름다운 문장을 멋진 글씨체로 써낸다는 것만으로도 캘리를 쓰는 게 좋았다. 그래도 공방 선생님의 유려하고 멋들어진 글씨체를 볼 때마다 언제나 선생님처럼 쓸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긴 할까... 까마득하기만 했다. 새로 배운 것이 까마득하게만 여겨진다면 중도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통 처음 캘리그래피 취미반을 등록하면 주 1회 13회 정도 3개월 과정을 배우게 된다. 3개월 동안 캘리그래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책갈피, 부채, 컵, 수채펜 그림 작품 등)를 경험하며 초보자가 쓰기 쉬운 붓펜 위주로 글씨를 쓴다. 이 과정도 즐겁긴 하나, 3개월이 끝나면 이걸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는 시기가 온다. 그때 그만두면 더 깊이 있는 캘리그래피의 세계는 접하지도 못하고 끝나게 된다.


3개월 후 원한다면 취미반을 더 계속할 수도 있겠지만, 자격증반을 바로 이어서 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격증반을 해야 비로소 진정한 캘리그래피의 맛과 멋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캘리그래피의 정수는 '붓글씨'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붓펜이나 제노펜 등 펜으로 쓰는 글씨와 먹에 찍어 붓으로 쓰는 글씨의 멋스러움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지속적인 연습의 시간이 필요한데 취미로 하기엔 자칫 막막해지기 쉽다. 막막하면 재미 없어지고 그러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또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래서 자격증반을 권하는 것이다. 불투명과 막연함을 제거하는 데 뚜렷한 단기 목표만큼 효과적인 건 없으니까.


아니, 배운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자격증반을 할 수 있냐고? 캘리그래피 2급 자격증 시험은 합격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다. 물론 먹에 찍어 쓰는 붓글씨를 온라인 강좌든, 캘리그래피 공방에서든 10회 이상 꾸준히 연습했을 때 얘기다.


자격증 시험은 무조건 먹에 찍어 쓰는 붓글씨로 써야 한다. 그러니 2급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먹과 붓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게 되고 그 결과로 자격증 하나가 생긴다. 그리고 나면 욕심이 생겨서 내처 1급 자격증까지 따봐? 하는 마음을 품는다. 2급 자격증을 따고 나면 그만두는 분들이 있는데, 이때는 진정한 붓캘리의 즐거움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단계다. 붓캘리의 진정한 즐거움은 긴 문장을 유려하게 써낼 때 오는데, 2급 자격증 시험은 길어야 3~6자 정도의 낱말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캘리그래피의 진정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자, 꼭 1급 자격증에 도전하라. 1급 시험은 낱말 단위가 아니라 문장 단위의 글을 테스트하기 때문에 연습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문장들을 써내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2급 과정보다는 녹록지 않기 때문에 이때 다시 막막함이 올 수 있다. 그것을 없애는 방법은, 함께 할 수 있는 이들을 찾는 것이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고 했다. 1급 과정까지 도전한다면 당신은 이미 6개월 이상 캘리그래피를 쓰고 있다. 빨리 가는 단계는 지났으니 함께 가야 더 멀리 갈 수 있다. 난 온라인 필사 모임을 하고 있는데, 이분들 중 캘리그래피를 쓰고 싶은 회원들과 온라인 캘리방을 만들어 글씨를 연습해 올렸다. 다른 회원들의 글씨를 보며 자극도 받고 서로 독려하는 과정에서 글씨를 계속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캘리그래피 1급 자격증까지 딴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당신은 마음에 드는 문장에서 그치지 않고 좋아하는 시인의 시 한 편을 그럴듯하게 써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다음은 어떤 세계를 만나게 될까? 캘리그래피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 난 내가 공모전에 참가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공방 선생님께서 공모전에 작품을 내보자고 하셨을 때, 내가 얼마나 손사래를 쳤는지 모른다. 공모전이라니, 그런 건 누구나 인정하는 작품을 써내어야 가능한 일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를 마음속에 품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50이 넘어 생애 처음 하는 일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생님께서 이 정도면 내어 보아도 된다고,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또 실력이 느는 거라고 북돋우시지 않았다면 아마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지난달 생애 처음, <제10회 행주대첩 전국휘호대회> 캘리그래피 분야 작품을 제출했다.


제10회 행주대첩 전국휘호대회 요강 (출처: 고양문화원)


작품을 보내고 '입선'(제일 낮은 상)이라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데, 며칠 뒤 공방 선생님이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내가 1차 심사에 통과해 2차 현장 휘호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며 축하한다는 말씀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현장 휘호는 '특선(입선 윗단계 상)' 이상인 응모자만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꿈만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특선 이상의 기적은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긴장하며 치른 현장 대회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상작들을 보며 공모전을 통해 실력이 더 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캘리그래피로 참여할 수 있는 휘호 대회와 공모전이 그렇게 많다는 걸, 1년 전엔 관심이나 있었던가. 실력이 쌓이고 운이 더한다면 쏠쏠한 대회 상금도 노려볼 만하다. 공모전 입상 점수 12점 취득 시, 초대작가로 선정된다(입선 1점, 특선 2점... 대상은 무려 8점!). 무엇보다도 첫 공모전에 참가하기까지 걸린 1년 여의 시간 동안 캘리그래피를 쓸 때마다 느꼈던 몰입의 기쁨은 큰 자산이다.


그러니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은 당신이 몰입의 기쁨을 느껴보고 싶다면, 캘리그래피를 배워보길 권한다. 다시 말하지만, 취미반 3개월을 마쳤다면 자격증반에 도전하라. 1급 자격 준비까지 자칫 느슨하고 무료해질 수 있으므로 연습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라(온라인 모임 추천). 1급 자격증까지 땄다면 다음은 공모전에 도전하라. 수상을 하면 더 좋고 안 되어도 준비 과정에서 전보다 실력이 느는 걸 체험하게 될 것이다.


1년 여만에 세상 재밌는 게 하나도 없던 당신에게 삶의 기쁨을 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다면 어떨까. 도전해 볼만한 일 아닌가?



1차 심사 때 보낸 응모작 연습본을 감성 공장 앱 배경 그림에 얹어봤어요(실제 보낸 건 사진을 못 찍었...ㅠ).
이건 현장 휘호대회에서 제시된 명제 써 낸 것. 감성공장 앱 배경에 얹었어요(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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