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오배송이 남긴 혜안(慧眼)

택배는 결국 돌아오는 거야

by 정혜영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문한 물건이 언제 도착하는지 확인하려는 거였다. 주문한 지 이틀밖에 안됐는데 성미도 급하지.


기말고사를 보기 전에 성과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공부할 맛이 난다며 딸이 먼저 제안을 해 왔다. 제안인즉슨, 시험을 잘 보면 '기타'를 사달라는 것이었다.

시험 끝나면 제대로 놀아보겠다는 심산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칠 줄도 모르는 기타를 사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사춘기 딸의 생각은 열 길 물 속보다 헤아리기 어렵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네가 좋을 일이지, 왜 내게 보상을 요구하냐, 는 생각이 앞섰지만, 엄마가 딸의 사기를 꺾으면 안 되므로, 응해 주기로 했다.


아직도 현실의 쓴맛을 덜 맛봤는지, 무슨 자신감으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최고점을 내 걸기에, 큰 걸 걸어도 되겠다 싶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아직 명확히 구분 짓지 못하는 중2 사춘기인 딸은, 그렇게 목표를 잡을 때 아직 현실감이 없다. 그러면 어떠랴. 이때라도 '이상'을 꿈꿔보지 않는다면 언제 꿔 보겠나.


전혀 기대감을 가질 수 없거나, 좋지 않은 결과가 뻔할 것이라는 상황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난관을 딛고 자신의 목표를 기대 이상으로 성취해 낸다.

그런데, 그건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현실 속 결과는,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래도 재미없고 괴로운 시험에 대해 나름의 즐길 수 있는 동기부여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은 칭찬해 주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보상의 수준을 낮춰 조정하고 주문한 물건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중이었다.


낮에 내 핸드폰에 택배 도착 예약 메시지가 왔길래, 딸에게 곧 도착할 거라고 알려 주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딸에게서가 아니라 친정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킨 게 없는데 택배가 왔다고. 굉장히 큰 택배가 왔는데 혹시 뭘 보낸 거냐고. 지난번에 엄마 댁에 뭔가를 배송한 뒤로 배송지 주소를 우리 집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보다.


이런 낭패가 있나.

딸은 곧 도착하리라는 택배 받을 생각에 기분이 최고로 업 되어 있을 텐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필 배송된 날짜가 토요일이다 보니, 다음 택배 예약을 건다 해도 며칠은 걸릴 것이다. 난감하여 딱히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정직'이 최선이다.

"딸, 택배가 도착했긴 했는데, "

"그래?"

현관문 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린다.

"아니, 우리 집 말고. 외할머니 집에."

수화기 너머로 일순 정적이 흐르는 걸 보니 딸도 이게 뭔 소린가 싶었나 보다.


내가 택배 주소를 바꾸지 않아서 기타가 외할머니 집으로 오배송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딸이 그럼 어떡할 거냐고 입에 거품을 문다. 엄마가 가서 가져오란다. 자동차로 편도 5시간이 넘는 거리라 이제는 명절 때도 안 따라 가려하면서. 보상을 요구하는 협상을 해 올 때 응하는 게 아니었다.


그날부터 딸은 나를 볼 때마다 안달복달을 했다. 엄마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니 어서 빨리 문제를 해결해 내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러면 뭘 하나. 그렇다고 택배기사를 수소문해 물건을 찾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다시 온라인 택배 예약을 걸어 물건을 받은 건 그로부터 나흘 뒤였다. 다시 택배 예약을 걸 때는 5일 뒤에 도착하는 걸로 알고 있던 터였다. 예상보다 하루 일찍 물건을 받아 든 딸은 비로소 함박웃음을 보였다.

나흘 동안 나를 못살게 굴어서 꼴 보기 싫던 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니, 마음에도 덩달아 다시 봄이 찾아들었다.




살다 보면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로 원래 가야 했던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가 있을 데가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누구 탓인지 따지느라,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돌아 나올 길을 잃을 수 있다.

착각해서 반대 방향의 버스를 타고 엉뚱한 목적지에 닿았다면, 그 버스를 다시 타고 되돌아 나오면 될 일이다.

그냥, 조금 더, 시간이 걸린 것뿐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면 원래 가야 했던 길이 더 잘 보일 수도 있고, 되돌아 나오던 길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아는가. 5일 만에 올 줄 알았는데 하루 더 빨리 도착한 우리의 택배물처럼, 혜안(慧眼)을 장착해 찾은 지름길 덕분에 더 빨리 '그곳'에 도착하게 될지.




오늘부터 딸이 교본을 보고 띵띵 거리며 연습하는 소리 참아주려면, 성능 좋은 귀마개를 택배로 주문해야겠다. 이번엔 배송지 주소를 꼭 확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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