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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과의사X Dec 08. 2016

노부부에게 받은 동의서


인턴을 시작한 3월을 떠올리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동의서 받기다. 지금이야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아니까 자신있게 넘어갈 부분은 넘어가고 중요한 것들만 강조해서 설명하고 싸인을 받는데, 그때는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저런 자세한 설명을 더듬더듬 거리며 했었다. 그러다 보면 환자나 환자 보호자는 무슨 설명을 그렇게 길게 하냐는 표정으로 "네.. 네.. 네.." 이렇게 기계적인 대답을 하였고, 나는 주눅이 들어 조금씩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곤 했다.


잘 모르는 내용에 대해 동의서를 받을 때, 가족들이 한무더기로 심각한 표정으로 환자를 애워싸고 있을 때, 그리고 18층에 입원해 있는 VIP 환자에게 동의서를 받을 때는 동의서를 들고 병실 앞을 괜히 서성이기도 했다. 가끔씩은 병실에 들어갔다 다시 나온 적도 있고. 마치 고백하는 편지를 들고 어쩔 줄 몰라 왔다갔다 하는 어른이의 모습으로.


동의서와 관련해 마음에 남은 사건이 하나 있다. 그날은 VIP 병동 환자의 동의서였다. 간이식 전 혈장교환술을 하는 것에 대한 동의서였는데, 여러번 읽어도 잘 모르겠는 내용을 VIP 한테 설명하려니 긴장이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기업 CEO 느낌의 중년 아저씨가, 안경을 코 아래로 내려 쓰고 컴퓨터를 하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날 올려 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셨습니까?" 그 말 한마디에 자신감이 풍겨져 나왔다.


동의서 내용을 찬찬히 설명하는데 질문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좀 전에 컴퓨터로 자신의 시술에 대한 정보를 서치 하셨던 것일까. 진땀을 흘려가며, 모르는건 최대한 잘 애둘러서, 그렇게 10분이 넘게 설명을 했다. 내가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성실하게 동의서를 받았던 적이 있었을까. 동의서에 사인을 마친 아저씨는 안경을 올려 쓰면서 내 고향을 묻더니 "공부를 참 잘했나봐요. 구미에서 이렇게 아산에서 일하는 의사가 되는게 쉽지 않았을텐데. 부모님이 참 기뻐하시겠네요. 그쵸?"라고 말했다. "네 많이 좋아하세요. 제 실력보다 좋은 병원에 와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답하면서 '구미가 그 정도까지 시골은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이었다. 아산이라면 자신의 병을 깨끗하게 낫게 해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시골에서 올라온 노부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위암 말기여서 완화치료만 하고 계시던 분이셨다. 커져가는 위암이 상부위장관 어딘가를 막았고, 그곳을 넓히기 위한 스텐트 시술에 대한 동의서였다. 설명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이 노부부가 이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대충대충 설명하고 싸인을 받으려는데 아니다 다를까, 두분이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말씀하셨다.


"뭐 우리 같은 시골사람들이 뭐 알겠시유? 선생님들이 앵간히 잘 알아서 해주시겄죠. 잘부탁드립니다.." "선생님 우리 영감 그 스땐뜨인가 그거 하면 나을 수 있는가요?"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첫째는 그 노부부가 겪을 어려운 시간들이 눈에 보여서였고, 둘째는 어제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몇 분 걸리지도 않을 동의서를 가지고 10분 넘게 꼼꼼하게 설명하며, 중간중간 이해되고 있는지 되묻고, 미소까지 지어 보이던 내 모습을 말이다. 노부부는 내 설명을 이해 못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 노부부가 18층에 있었다면 내가 그렇게 설명을 했을까. 아니었을거다. 아마 천천히, 알아듣기 쉽게, 그림까지 그려가며 최대한 이해시켜 드리려고 했을거 같다. 그게 인턴인 내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다시 동의서 앞장으로 넘어가 되물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설명 드린게 좀 어렵죠? 제가 말씀드린거 이해하셨어요? 제가 쉽게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릴까요?" 그러자 노부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설명을 드렸다. 노부부의 표정을 보면서, 천천히, 알아듣기 쉽게, 그림을 그려가며. 그리고 시술 잘 될거라고, 시술이 끝나면 지금처럼 배아프고 토하는 증상들이 많이 좋아질거라고, 너무 걱정말라고 토탁여 드린 후 병실을 나오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보면 20대의 많은 시간을 이 노부부처럼 (그분들이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프고 가난하고 외롭고 배우지 못하고 말 안통하는 사람들과 보냈다. 그러면서 다짐했었다. 나만큼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소통하려 노력하겠다고. 이 사회가 그러는 것처럼, 교회가 그러는 것처럼 사람을 은연 중에 차별하며 같은 사람임에도 전혀 다른 태도로 대하는 그런 비인간적인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그런데 인턴이 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사람에 따라 정성을 달리하여 대하는 날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일지는 모르나, 그러지 않겠다는 결심 자체가 오만일지 모르나, 그래도 그 마음을 지키고 싶다. 노력이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내가 이 약육강식 사회의 거센 물결을 따라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오늘 이곳 응급실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VIP처럼 맞이해 보련다.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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