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외과의사X Nov 07. 2020

선생님 이쪽 팔에서 해봐요

내 배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불편한 진실


3월에는 큰 병원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 새로운 인턴들이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새하얀 가운을 입고, 의사면서 의사를 연기하는 어색한 이들. 환자들 앞에서 자신 있고 태연한 척 하지만, '잎새 이는 바람' 같은 돌발상황에도 동공 지진이 나고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풋내기. 가만히 있는 환자에게 "자꾸 움직이시면 채혈 못해요"라고 이야기하면서 주사기 잡은 손을 달달달 떨고 있는 애처로운 존재. 뭘 모르는지도 모르고 그나마 아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 바보. 혼자 엄청 바빠 보이지만 정작 바쁜 만큼 해내는 일은 없는 비효율적인, 그 이름은 인턴.


초보이지 않은 운전자가 없듯이 처음부터 능숙한 인턴은 없다. 단지 빨리 배우고 적응하는 인턴과 그렇지 않은 인턴이 있을 뿐. 그리고 3월은 너무 초반이라 대부분의 인턴이 막 운전면허를 딴 사람처럼 미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시기에 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본의 아니게 인턴들의 희생양(?)이 된다. 병원의 곳곳에서 초보운전자들의 아찔한 주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턴을 하면서 자주 하게 되는 술기는 ABGA(동맥 채혈), EKG(심전도), L-tube(코줄), DRE(손가락으로 항문 검사), enema(관장), foley insertion(소변줄), Paracentesis(복수 빼기), dressing(상처 소독) 같은 것들이다. 이 중에서 환자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술기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ABGA이다. 내가 있는 병원은 인턴이 130여 명인데, ABGA를 10번 정도 해봐야 익숙해진다고 보면 (물론 그것보다 더 필요하지만) 1300명의 환자가 인턴들의 미숙한 술기에 노출된다고 볼 수 있다. ABGA 하나만 해도 그 정도니 전체 술기들을 생각하면 훨씬 더 많을 거고 이는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이런 위험성 때문에 국시 실기도 보고 시뮬레이션 센터에서 교육도 받지만 사람에게 직접 해보는 실전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피할  없으면 잘해라


ABGA는 3월 인턴의 심리적 업무 로딩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술기이다. 이걸 잘하면 훌륭한 인턴이 된 것만 같고, 못하면 전에는 느끼지 못한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는) 죄책감과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남들은 다 하는데 나만 못하는 것 같고. 아무리 감이 좋은 인턴이라도 안 되는 날은 진짜 안 되기 때문에 이런 실패감은 아마 대부분 느껴봤을 것이다. 가끔은 펄떡펄떡 뛰는 동맥이 느껴지는데 거기에 바늘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맺힐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정말 컵을 거꾸로 들어도 물이 쏟아지지 않는 것처럼 오싹한 느낌이 든다.  

유독 아브가를 어려워했던 인턴 A가 문득 떠오른다. A는 최근 시도하는 아브가마다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그런 A에게 오늘도 주어진 아브가 한 무더기. 두려운 마음으로 첫 병실에 들어가니 까칠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뭔 놈의 채혈을 맨날 하나? 실패하지 말고 한 번에 해요"라고 말하며 쏘아본다. A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한참 동안 맥을 짚고 환자는 그런 인턴이 못내 불안한 눈치다.

이번에는 제발! 하는 마음으로 바늘을 찔렀지만 역시 이번에도 피는 한 번에 맺히지 않는다. 그래서 찌른 상태에서 바늘을 여러 번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환자와 보호자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그러다 소발에 쥐잡기로 혈관을 찔러 피가 맺히기 시작한다. A는 흥분된 마음에 실린지를 당기는데 아! 이런 바늘이 동맥에서 빠져버린다. 팔목이 시퍼렇게 부어오르기 시작하자 얼른 알코올 솜으로 그 부위를 압박하면서 '이 정도 피면 검사가 나갈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을 하다 결국 반대 팔로 넘어간다. 그러자 환자는 성난 목소리로 한마디 던진다. "선생님 전에도 보니까 실패하던데 그냥 잘하는 선생님 불러주세요. 선생님한테 못 받겠어요" 그리고 잠시 뒤 인턴 카톡방에 이런 메시지가 올라온다. "62병동 21호실 아브가 고수 모십니다..”


선생님 이쪽 팔에서 해봐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내게도 술기와 관련하여 마음이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다. 3월 중순쯤 아브가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어서 그다음 단계인 동맥라인(arterial line)을 잡아보고 싶었을 때였다. 신경과 중환자실 당직날, 뇌경색으로 입원한 환자 아브가를 몇 시간 간격으로 해야 해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 날 보며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 라인을 잡으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그러면 선생님도 환자도 편할 것 같다고. 이때다 싶어 라인을 잡아보겠다고 했다. 수술방에서 여러 번 봤는데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고 성공한 후 동기들에게 자랑하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빨리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라인 잡는 걸 시도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분명 피가 맺혔는데 카테터를 밀어 넣으니 카테터가 살 아래에서 돌돌 말려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라서 카테터를 뺀 후 지혈을 하고 잠시 후 다시 시도를 했다. 이번에는 카테터가 들어가는 듯하더니 손목에 시퍼런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손목이 아프신지 미간을 찌푸리셨고 내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왜 안 되는 거지? 안 될 이유가 없는데..'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힘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땀을 뻘뻘 흘리네.. 거기 말고 이쪽으로 한번 해봐.."

그러면서 왼쪽 팔을 내미시는데 얼마나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지. 실력 없는 의사가 환자 한 명 잡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시도하지 못하고 아브가만 한 뒤 "아주머니 자주 채혈하면 힘드실까봐 라인을 잡으려고 했는데 아프게만 해드린 거 같아 죄송해요.. 새벽에 채혈하러 다시 올게요"라고 말씀드리고 후다닥 사라졌다. 그리고 깜깜한 당직실 한쪽 구석에서 한참 동안 마음을 달래야 했다. 이 술기는 처음이었고 누군가는 내 첫 환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술기 하나 더 익히겠다는 마음으로 준비 없이 섣불리 달려든 것 같아 너무 죄송했다.

그 후로 마취과 선생님이 라인을 잡을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고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했었다. 그래 이때는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아 그때 이렇게 해서 안된 거였구나, 하면서. 그리고 4월에 지방 파견을 가서 라인을 잡을 기회가 다시 주어졌고 기분 좋게 성공을 했다. 그때 아주머니 생각이 얼마나 났는지. 그 후로 술기를 하는데 크게 어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새로운 술기를 시도하거나 잘하던 술기가 잘 안 될 때 그때의 기억이 종종 떠오른다.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환자분들은 내게 다시 한번의 기회를 주셨고 그러면서 난 하나씩 배워가고 익숙해질 수 있었다.

초보 인턴의 미숙함을 이해해 주고, 이마에 맺힌 땀 좀 닦으라며 휴지를 뽑아주고, 거기가 안 되면 여기서 해보라며 왼팔을 내밀었던 환자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감사한 마음이 든다. 빚진 마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내 배움은 내 것만이 아닌 것 같다.


20161105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아이 팔꿈치 맞추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