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종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는 도토리 3개, 저녁에는 도토리 4개. 간사한 꾀로 남을 속이다.
하루에 주는 도토리의 총합은 똑같은데 아침에 4개를 준다고 하니 원숭이들이 만족했다고 하는 우화에서 나온 사자성어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이 단어를 접했을 때는 원숭이가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다. 사자성어의 풀이처럼 현상은 전혀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경제학을 배우고서는 원숭이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에 도토리를 많이 받아서 돈으로 환전해서 이자를 받을 수도 있고 미리 받아두는 것이 저녁에 받지 못하는 불확실성을 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피엔스를 읽고 난 지금 원숭이는 나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즉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를 인지하면서 상대방과 계약을 할 수 있는 호모 속(屬, Genus)의 종은 사피엔스 뿐이기 때문이다. 즉, 우화에서 원숭이는 나만큼 멍청하고 나만큼 똑똑하다.
사피엔스를 사피엔스답게 하는 특징 중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정보를 믿는 것이다. 사피엔스가 아닌 종과 계약을 할 수 있을까? 원숭이에게 바나나를 바치면 천국에 가서 영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정보를 전달하는 능력은 사피엔스만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었다. 허구를 말하고 허구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허구를 바탕으로 신뢰의 도구를 만들었다.
우리는 화폐가 가치 있다고 믿는다. 이는 나의 옆 사람들이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우리는 그 대상이 변화하는 걸까? 과거 우리는 조개껍데기가 가치 있다고 믿었고, 지금은 달러라는 초록색 종이가 가치 있다고 믿으며, 지금은 컴퓨터에 저장된 코드가 가치 있다는 믿음이 펴져나가는 중이다.
금은 왜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희소해서? 노란색이라서? 가공하기 쉬워서? 전도율이 높아서? 우연한 계기로 한 문화에서 금이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특정 한 곳에서만 금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역을 통해 두 문화권이 연결되고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면 재화의 가격이 평준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기에 화폐의 가치는 문화적이다.
1776년 미국의 독립 선언을 이후로 평등과 인권은 우리에게 너무도 당연한 개념으로 느껴진다.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를 창조주에게 부여받았다고 독립 선언문에서 말한다. 그렇다면 인권과 평등은 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존재하지 않았다. 인권과 평등은 개발된 개념이다.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원래 존재하던 것을 그 당시까지 발견하지 못하던 것이 아니다.
기원전 1776년경, 고대 바빌론 인은 누군가가 여성을 때려죽였다면 그 남자의 딸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당시에 가족 내에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었다. 세 개의 계급도 있었다. 즉 인간은 평등하지 않았다. 이 함무라비 법전은 바빌론의 사회적 질서는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신이 읊어준 것이라고 단언한다. 미국 독립선언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불확실성을 피하기 위한 한 수단이다. 상상 속의 질서를 만들고 이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성장은 이윤을 생산에 재투자하면 가까운 미래에 더 많은 생산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이다. 근대 이전의 사피엔스는 개체의 수명인 80년 동안 성장을 목격하지 못했다. 아주 미묘한 성장은 있었으나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삶과 아버지의 삶과 내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은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의 사회 구성원의 기저에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생산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결과 중세 귀족은 성장 대신 과시적 소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이전 사회는 성장이라는 가치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연회, 건축, 전쟁, 예술이라는 문화를 가치롭게 생각했다. 화려한 의복, 풍성한 가발, 반짝이는 액세서리가 중세 귀족의 모습을 표현한다. 반면 근대의 CEO 같은 자본주의자 엘리트의 모습은 검정 슈트를 입은 까마귀 같은 모습이다.
근대에 이르러 한 개체가 사회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을 관찰할 수 있는 주기가 짧아졌다. 제국주의를 만난 성장에 대한 믿음은 신대륙 개척에 투자로 이어졌다. 성공하면 금과 은, 담배와 사탕수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쟁보다 배당 수익이 더 높았다. 하지만 투자라는 개념은 여전히 생소했다. 모험을 하되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어 했다. 이는 주식회사라는 허구의 존재를 만들었다.
이러한 허구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도구들이 사피엔스의 사회를 움직인다. 최근 주류 도구들이 변화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 더 다양한 도구들이 만들어지고 기존의 도구를 재평가하는 시도가 늘었다. 더욱이 기존에 존재하지 았았던 생물학적 족쇄를 해방하는 새로운 차원의 도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다양한 도구들 사이에서 원하는 도구를 선택할 수 있는 세계가 도래한다.
우연한 역사적 사건이 결론적으로 큰 차이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되돌릴 수 없는 길이 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선택으로 앞으로의 방향성이 결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피엔스> 책의 마지막 문단의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를 음미하게 된다. 되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목전에 두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