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글라라 Mar 16. 2022

새봄, 다시 시작!

이별의 환승역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립니다.

원장님께

이제 다시 봄이네요. 이 봄을 기쁘게 맞이하기까지 참으로 매서운 바람과 혹독한 겨울 추위가 있었습니다.

딸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어요. 수요일 병원 진료에서 절반 정도는 뼈가 붙었다고, 나머지 절반만 잘 붙으면 상처 남기지 않고 잘 회복될 거 같다고 합니다. 얼마나 다행인지요. 3개월 정도 조심하며 지켜보자 하셨는데, 한 고비 또 이렇게 넘어갑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는 온몸에 피부발진과 가려움증으로 애먹고 있네요. 병원에서 급성 두드러기 진단을 받았어요. 백신 부작용 아니냐고도 하는데, 원인을 알 수 없으니 그저 몸도 마음도 편안히 이완하면서 가라앉기를 기다릴 밖에요. 병원에서 그동안 스트레스가 많았냐고 묻길래, 돌아보니 이러저러한 마음 상함들이 스트레스가 되었겠네요.


원장님은 몸과 마음 건강이 어떠신지요?

지난 3월 2일 재의 수요일 미사를 드리다가 순간 울컥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원했던 것은 원장님에게 신뢰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것을요. 마치 엄마 칭찬받고 싶은 어린아이처럼요. 누군가 알아주지 않았을 때, 북받쳐오는 슬픔과 억울함에 서러워하는 아직 어린아이, 덜 자란 아이가 내 안에 있더라고요.


지난 4년 센터에서 머무름이 저에게는 큰 축복이고 행운이었습니다. 작년 1년 동안 그만두고 싶은 유혹의 순간들이 많았음에도 견디고 버티게 한 것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 때문이었습니다. 저란 사람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편하고, 받은 만큼 다하지 못했을 때 오히려 빚진 기분으로 부채감이 있더라고요. 남들은 자기가 한 것보다 더 많이 받으면 기분이 좋다지만, 저는 내가 한 것보다 더 많이 받으면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요. 원장님께 배려받았으니 그 이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 안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나 봅니다. 제 사정 봐주시면서 길게 보고 가자고 하셨던 말씀에 대해 신의를 저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저를 붙들고 있었음을 알아차립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이라 평가받을까 봐 그것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마음의 짐을 좀 내려놔도 될까요?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것들을 성심성의껏 해내려 했다는 것으로 책임과 도리를 다했다고 자기 위로해도 괜찮을까요? 원장님 기대에는 못 미쳤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최선이었습니다. 은혜 갚은 호랑이 이야기처럼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을 넘어서 몸 돌볼 여유 없이 몸이 상하면서도 주어진 것들을 다 해내려 애썼습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저의 한계임을 인정하고 이제 더 이상 한계를 뛰어넘으려 발버둥 치지 않겠습니다.


이사 전 놀이치료실을 정리하면서 홀로 작별 의식이었어요. 그 공간이 내게 선사해준 것들을 마음에 품고, 놀이실에서의 추억들을 간직하고 떠나면서 마음 울컥하더라고요. 그 공간은 제게 참으로 따뜻한 엄마 품 같았거든요. 많은 만남들이 있었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공간이었습니다. 그 공간을 뒤로하면서 그때부터 이미 마음속에서 작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은 욕망에 아이들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하고 고심하던 중에 원장님과 관계 갈등을 겪으며 아물어 가던 상처가 덧나고 다시 곪아 터지고. 이제 다시 상처가 아물어 가지만, 이 봄을 맞이하기까지 안팎으로 고단한 여정이었습니다.


날마다 108배 기도하고 아침 산책하면서 내면의 지혜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생각합니다.  마음에 걸림을 덜 남기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습니다. 생애 전환기에서 지금 이 파도를 어떻게 타고 넘을 것인지 심사숙고하고 있어요. 긴 여정의 끝에 이별의 환승역이 다가오는 듯하네요.

그동안 깊이 감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맡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심에도 감사합니다.


원장님께서는 지금까지 만난 많은 기관장들 중에서 존경할만한 분이셨습니다. 첫인상에서부터 인격적으로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었고, 체계적인 일 처리 방식 또한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느꼈습니다. 그러했기에 기대에 어긋난 원장님의 태도에 실망감도 컸고 마음의 상처도 깊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저에게 이별은 참으로 넘기 어려운 힘겨운 고비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늘 상실과 애도의 연속 이건만, 나이가 들어서도 이별은 여전히 힘들기만 합니다. 10여 년 전부터 숱한 만남과 이별의 순간마다 늘 하는 기도가 있어요.


"흐름에 몸을 맡기고

마음 닿는 곳에 잠시 머무름을 허락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향기를 사랑하게 하소서."


이미 지나온 길, 그 길로 되돌아가기보다는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려합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도 있지만 그와 함께 가슴 벅찬 설렘도 있어요. 올해는 몸 건강 돌보면서 자기 돌봄에 좀 더 주력하고 싶네요. 시간을 일로 채우기보다는 나를 위한 시간을 남겨 두려구요. 빽빽하게 시간표가 짜이면 몸도 마음도 힘들더라고요. 일이 많아지면 시간 없어 헉헉 대고, 일이 줄어들면 돈이 없어 허덕이는 것이 프리랜서의 비애인데, 올 한 해 저에게 돈보다는 시간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새봄, 다시 시작을 외치며 이별의 환승역에서 다음 열차를 기다립니다.


2022. 3. 11.  

아침 산책에서 돌아와 어제 못다 한 말을 글로 남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