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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May 11. 2022

또 하나의 선물

결혼 3주년을 맞으며 그와 나는 결단했다. 둘째는 가지지 않기로. 주변에서는 나이도 있으니 둘째를 빨리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은근한 압박이 있었다. 그와 나는 침묵으로 버티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에서 임신을 한다면 더 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이었다.

낯선 지방으로 이사하고 그와 나는 일자리를 찾아서 일을 시작했지만 우리가 돌보아야 하는 사람은 내 아이 만이 아니었다. 사업 실패 후에 시동생 집으로 옮긴 시아버지는 방안에만 갇혀 지내며 신경 우울증을 앓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막내딸 시집보내고 남동생 장가보내고 그다음 해에는 당신이 편안히 눈감을 수 있겠다며 당신 떠나실 날을 헤아리고 계시던 엄마는 파킨슨이 진행되면서 치매와 우울증이 깊어졌다. 엄마는 아들 장가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엄마 아들, 내 남동생은 어느 날 갑자기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엄마에게는 차마 이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결혼하면서 내가 서울을 떠나고 동생은 나와 살던 그 집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치료를 위해 그 집도 정리하고 국립암센터 근처의 원룸으로 거처를 옮겼다. 방사선 치료로 종양을 줄이고 줄여서 종양 제거 수술은 겨우 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항암치료와 인공항문 복원 수술까지 넘어야 할 산은 높고 험난했다. 고향에 있는 친정 가족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오롯이 내가 다 해내야 했다.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일산으로 병원을 오가며 지난한 간병생활이었다. 원룸에서 홀로 외로운 시간을 견디며 항암치료를 받던 중에 동생은 항암치료 후 회복기에 가 있을 수 있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는 암환자를 위한 요양원이 그리 많지 않던 때이다. 그와 나는 사전 답사로 전국의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찾아다녔다.        


2004년 봄 어느 토요일 오후. 그와 나는 강원도 평창으로 갔다. 강원도 산골 깊숙한 곳에 암환자를 위한 요양원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식이요법을 하면서 암환자들이 지내는 곳이라는 정보는 있는데, 유선전화도 없고, 주소만 있었다. 주소만을 가지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장거리 주행에 대한 걱정 부담도 있었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그의 운전은 신뢰할만했으며, 지도만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처음 가보는 곳에서 길 찾기도 거뜬하게 잘하는 그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다. 그가 길을 잘 찾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그 요양원에 대한 정보가 잘못된 건지 확인할 수 없지만, 여하튼 주소대로 어렵게 찾아간 그곳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임도는 끊겨 있고, 보이는 것은 키 작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임야뿐이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으니 누구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허탈함만을 가슴에 안고 돌아 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지? 가슴이 뻥 뚫린 공허감은 이대로 집으로 되돌아갈 순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장거리 운전을 해서 먼길을 달려온 것이 아까웠다. 여기까지 왔으니 좀 더 달려서 속초나 강릉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동해안은 그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청춘의 꿈이 서린 곳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동해 바닷가로 달려갔다.

동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진 후였다. 늦은 저녁을 하고 숙소를 찾아다니는데, 인근에 숙박 시설들은 모두가 No vacancy.

그와 나는 포장마차에서 멍게와 해삼을 안주로 시켜놓고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여차하면 이대로 밤을 지새울 작정이었다. 그때 포장마차 옆 가게에 불이 켜졌다. 용꿈 민박. 그가 다가가서 방이 있는지를 물었다. 다행히 우리를 위한 방이 하나 남아있었다. 창문으로 바다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밤새도록 철썩 차르르 쏴아아 아아아 파도의 노래가 끊임없이 들려오던 해변의 집. 그와 나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한탄하는 나의 비관에다가, 그래도 이 정도니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그의 낙관이 뒤섞여 따뜻한 섞어 부침개를 만들어내고, 나는 서러운 우울의 술에 취했고, 그는 빈 술잔을 채우며 쓰린 침묵만을 마셨다. 함께 울어주는 철썩 처얼썩 파도소리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동해에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아 이상한 몸의 기운을 느꼈다. 생리 전 증후군이 심했던 나는 생리 전이면 사나흘을 아프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생리증후군과는 다른 증상으로 몸도 마음도 혼란스러웠다. 구역질을 느끼며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기력도 없었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의아해하다가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임신.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날 동해에서 단 하룻밤의 정사로 이렇게 임신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임신이라니, 지금 이 상황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아아, 어쩌라고 나에게 이런 일이 있는 걸까.

몸이 좋지 않아서 건강을 위해 기천문 수련을 하던 중에 만난 친구는 사주 역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내 고민을 듣더니 "예쁜 딸 하나 더 낳아. 난 딸 둘인 엄마가 제일 부럽더라. 내가 좋은 날 잡아줄게."라고 했다. 나도 딸 둘인 엄마가 부럽다. 하지만 지금 내 처지에 딸 둘을 키울 형편이 되겠는가. 아이 하나만이라도 잘 키우자고 다짐하고 둘째는 포기하자 했건만, 이것이 하늘의 뜻인 건가. 어쩌자고 나에게 이 생명을 보내시는 걸까.

먹기만 하면 체하고 토하고 내 몸은 음식을 거부했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한의사 선배를 찾아갔다. 이제와 생각하면 선배는 나이가 있는 데다가 몸상태가 많이 허약해져 있는 나를 걱정하며 한 말이었으리라.   "딴생각은 않고?" 이 말에 참았던 눈물이 왈칵 나오면서 울부짖듯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시선은 허공을 떠돌고 모든 것을 체념한 눈물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내뱉은 이 말이 혐오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고 싶지는 않은데, 생기니까 어쩔 수 없이 낳았다고 하는 그런 무책임한 부모이고 싶지는 않은데, 나에게 온 아기가 한없이 가엾고 불쌍했다. 아기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어야만 하는 것들이 왜 이리 한꺼번에 나에게 밀려오는 건지 하느님이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하늘이 내린 선물, 또 하나의 딸이 나에게로 왔다. 그때는 선물이라기보다는 벌이고 고통이었다. 고뇌의 십자가였다. 벌주기 위해, 혼내기 위해,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지 느껴봐라 하고 신이 일부러 험난한 시련을 주시는 것으로 느껴졌다. 간절히 아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나 보내시지, 왜 하필이면 우리에게 이 생명을 보내시는 걸까. 당시 작은 언니는 간절히 둘째를 원했지만 난소암으로 난소 제거 수술을 하면서 둘째를 포기해야만 했다. 신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신을 원망했다.


외딴섬이었던 그와 나는 신이 주신 선물로 두 딸을 가슴에 품고 푸른섬 가족이 되었다. 결혼하더라고 아이는 갖지 말자던 둘의 허황된 약속, 둘이서만의 꿈은 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다.   

친구의 부러움을 받으며 나는 두 딸을 가진 엄마가 되었다. 둘이 서로에게 선물이 되기를, 서로 비춰주며 홀로 외롭지 않게 이 한 세상을 함께 살아가기를, 아름다운 맘남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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