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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May 11. 2022

너를 보내고

"미약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잠시 내 몸에 머물다 간 아이. 나는 그 아이를 산이라고 불렀다. 혼자서 은밀히 산과 이별했다. 아주 잠깐, 3일간의 짧은 시간, 산이 내게로 와서 나와 함께 머물다 갔다. 산을 반길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선물을 감사히 받을 수가 없었다. 새 생명 주심을 기뻐할 수 없었다. 산이 내게서 떠나간 것이 아니라 내가 산을 버렸다는 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주님께 고해하고 용서를 청하고 싶었다. 주님이 보내신 그 아이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 아이를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삼 년 전에는 "어쩔 수 없잖아!!" 울부짖으면서도 아이를 낳았지만 마흔이 되어서 또다시 그 길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잖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음을 삼키며 한 생명을 버렸다.


12월 성탄 전 겨울이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심을 기다리는 대림 주간에 그와 나는 우리에게로 온 한 생명을 포기했다. 수술하기 위해 아이들은 서울 고모 집으로 보냈다. 엄마랑 헤어지는 걸 알아챈 것일까. 떠나기 전날 밤, 아이는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면서 밤새도록 울고 보챘다. 버림받지 않으려 엄마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것처럼.

'지금 이 두 아이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인데, 또 다른 생명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 아이를 내가 키울 수 있을까.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과연 내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까. 여기까지 오는 것도 안간힘을 쓰고 겨우 버티었는데, 다시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NO였다. 예수님은 세 번째 넘어짐에서도 다시 일어서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세 번째 넘어짐, 십자가에 매달림, 옷 벗김 당하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을 묵상하며 주어진 이것을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아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삼 년 전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음이었으나, 이번에는 떠나보내야만 하는 어쩔 수 없음이었다.  

백지 위에 까만 점 하나가 놓였다가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버린 그날의 기억. 무성영화의 한 장면, 흑백 사진 한 장을 보는 듯하다. 수술을 마치고 침상에 누워있는 한 여인과 여인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서 있는 한 남자의 초라한 어깨 뒷모습,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의 등과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의 어둠...


다음 해 겨울, 침묵 피정에서 산을 만났다. 여인숙에 잠시 머물다 간 손님처럼 산은 내게로 와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3일 만에 쫓겨난 아이. 아주 작고 귀여운 하얀 눈사람으로 내게 왔다. 머리와 몸통 두 부분으로만 형태가 나누어져 있고 다른 형상이 없는 것이 마치 배속의 태아를 보는 듯했다. 눈사람 아이를 나는 산이라고 불렀다. 침묵 피정 3박 4일 동안 눈아이가 겨울 햇살에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보았고, 돌 위에 촉촉한 물기로 흔적을 남긴 채 사라져 간 것을 보았다. 눈아이를 앞에 두고 쪼그려 앉아서 마음속에 묻어둔 못다 한 말을 하고 또 했다. 이제는 너를 보낼 수 있다고, 잘 가라고 작별했다. 겨울 햇살에 녹아내린 눈사람 아이, 산이는 내게서 떠나 하늘로, 저 너머로 건너갔다.   

산을 보내고 고해성사로 용서받고 싶었다. 눈아이가 사라지듯 무의식의 깊은 죄책감도 녹아내리길 원했다. 내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나만의 비밀, 밝은 빛으로 꺼내어 들여다보기가 두려웠다.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고해성사를 하고 보속을 받고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아무리 힘들더라도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있는지, 힘들다고 해서 내게로 온 생명을 포기할 수 있는지. 엄마인데,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내게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 언니에게만 말할 수 있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내게는 친정엄마 같은 언니만은 내 편이 되어서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줄 것 같았다. 언니는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당신 아들 낳으려고 마흔 넘어 노산임에도 아이를 낳았지만 지금은 아들을 꼭 낳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딸 둘로 충분하다고 했다. 인연이 아니라고, 운명이라고,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그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왜 삶은 우리에게 이토록 힘든 선택을 하도록 하는 걸까. 언니에게도 차마 내가 수술하겠다고 한 것은 말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자연유산인 것처럼 말했다. 밤새도록 작은 딸이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울고 보채고 발길질하고 아침에 하혈이 있긴 했지만, 자연 유산은 아니었다. 그와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의사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거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정말 수술을 원하십니까?' 단 한마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수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했다. 작고 묵직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미안하다고. 마음속으로 '당신이 미안해할 것은 아니지' 생각하면서도 입 밖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미안하다고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내가 너무 미안한데,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엄마인 내가 너무 비참하고 초라한데, 그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정말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걸까.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임신을 원치 않았고 피임을 한다고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이 된 것은 내 잘못이 아니겠지만 그 아이를 버린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어떻게 포기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이를 버리다니, 내게로 온 생명을 버리다니. 겉으로는 유산되었다고 말했지만 유산된 것이 아니라 유산시킨 것이었다. 능동적인 나의 선택이었다.  

고해실에서 죄를 고백하면서도 차마 내 입으로 아이를 버렸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이를 잃었습니다. 내게로 온 한 생명이 유산되었습니다. 제가 아이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 모두 사하여 주십시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 나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유산되었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자연유산이 아니라 인공유산이었다. 신부님은 죄를 판별하는 판사가 아니니 그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보속으로 주님의 기도 세 번과 묵주기도 5단을 받았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간절히 주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고 싶었다. 주님께서는 용서해주었다. 주님께 용서받았음에도,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생명을 버린 나의 선택은 깊은 죄책감으로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되었다.   





 "여인아,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산을 떠나보내고, 주님에게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고, 다시는 죄짓지 않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성찰하면서 용서를 배웠다. 내가 용서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격분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의 한심한 말과 행동들에 대해 분노하고 원망하던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럴 수도 있다고, 그럴만하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이상 타인을 원망하거나 비난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럴 수도 있겠구나 받아들이게 되었다.


산을 보내고 내면의 지혜를 만났다.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품이 넓어졌다. 잊어버렸던 산을 다시 기억한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이별을 선택할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거나 나의 선택임을 숨기고 유산된 것처럼 거짓으로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이별을 하겠다. 그리고 고백할 것이다.  

"당신은 주셨지만 저는 받지 못했습니다. 미약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산을 보내고 그때는 잊으려 했다. 언니도 잊으라고, 더 이상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라고 했다.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리라. 나도 그러고 싶었다. 외면하고 잊어버리고 싶었다. 고해하고 잊어버리려 했다. 그것이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애도였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에서 산부인과를 찾아간 정현과 영주의 모습에서, 잊혀진 기억을 마주한다. 이제는 다른 방식의 애도를 한다. 애도는 끝이 없다. 그래서 애도에 완성이나 종결은 없다고 했나 보다. 아직도 못다 한 애도, 다시 산에게 하고 싶은 말, 하늘로 보내는 편지를 쓴다.  


"산아, 잊으려 해서 미안해. 잊지 않을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짧은 찰나, 순간이었지만 네가 나에게로 와서 잠시 머물다 간 것을 잊지 않을게. 산아, 너는 떠났지만 나는 너를 보내지 않을 게. 내 마음속에, 나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잊지 않고 간직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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