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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May 11. 2022

엄마를 하늘로 보내고, 고향을 잃었다

엄마가 가버렸다. 영영 가버렸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병들어 누워계신 모습조차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고향 제주 어디에도 엄마가 없다. 엄마의 모습은 영정사진 속에만 남아있다. 영정사진 앞에서 침묵의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석가탄신일에 언니는 엄마가 있는 요양원에 다녀왔다 했다. 의식이 온전치 않은 엄마의 손을 잡고 있다고 곱게 잠든 모습을 보고 돌아왔다고. 얼마 가지 못할 거란 예감을 하면서도 이렇게 빨리 가버리실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다음 날 새벽에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가 보았을 때 곤히 잠든 엄마는 숨이 멎어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영혼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홀로 쓸쓸히 저 하늘로 떠났다. 2006년 햇살 고운 봄날 아침, 언니에게서 엄마의 부고를 들었다.   


언니의 전화를 받고 나서 성급히 짐부터 챙겼다. 한시라도 빨리 비행기를 예약하고 제주로 가야 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었다.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허둥대며 서두르고 있을 때, 다섯 살 바다가 "엄마 어디 가?"라고 물었다. 두 살 하늘이는 할머니 등에 업혀 잠들어 있었다.

"엄마 제주도 갔다 올 거야."

"그럼, 나도 갈래."

"안돼, 넌 못가. 엄마랑 아빠랑 갔다 올게. 너는 할머니랑 집에 있어."

"싫어, 싫어. 나도 갈래. 나도 엄마랑 갈래. 나도 제주도 가고 싶어."

순간 당황한 나머지 울화가 치밀었다. 어린아이들을 맡겨두고 제주에 다녀올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디서부터 무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난감한데, 사업장 운영으로 1년 365일 쉬는 날도 없이 일하는 그가 시간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엄마 장례식은 어떻게 치르게 될지, 제주에 가면 얼마나 있다가 오게 될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어서 뭘 어찌해야 하나 생각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딸이 따라가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신경이 곤두서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넌 여기 있으라고. 엄마 잠깐 갔다 올 거야."

"으앙앙!!! 나도 가고 싶은데. 엄마랑 같이 나도 가고 싶은데..."

"넌 여기 엄마 있잖아. 넌 엄마 살아 있잖아. 엄마는 갔다고 올 거라고. 곧 온단 말이야. 하지만 내 엄마는 죽었어. 다시 못 올 곳으로 영영 가버렸다고. 내 엄마는 이제 여기 없어, 볼 수 없다고."

계속 보채는 아이를 붙들고 좌우로 흔들어대며 통곡했다. 다섯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를 붙들고서 나는 엉엉 통곡하며 울었다.  


그와 함께 제주로 갔다. 그는 내 옆을 지키고 있으면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 주었다. 나는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간여하거나 관심 두지 않고 엄마 영정사진 앞에 앉아만 있었다. 15년 전 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관혼상제 의식과 절차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기억으로 장례 절차나 기타 문제들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언니들이랑 오빠, 남동생이 알아서 할 것이니 나 한 사람쯤은 빠져도 아무 상관없었다. 아들도 아닌 데다가 딸 중에서도 막내인 내 의견이나 생각 따윈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좋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으니 그만큼 신경 쓸 일도 적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되었다. 나를 찾아온 조문객도 거의 없었다. 나는 주변에 엄마의 부고를 알리지도 않았다. 조용히 엄마를 보내고 싶었다.  

제주에서는 장례절차와 의식이 복잡하다. 입관 시간부터 하관 시간이며 기타 등등 가족 모두의 사주를 놓고서 역학적으로 좋지 않은 날을 피해서 장례를 치른다. 자식 손주들이 많으니 좋은 시간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장례는 3일장이 아닌 5일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7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나는 그런 모든 절차와 의식들이 불편하고 갑갑했다. 아버지 장례 때는 그 모든 것들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번 겪어봐서 예민함이 덜해진 건지, 나이가 들어서 철이 들어 조금은 성숙해진 건지, 내가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은 그냥 되는 대로 내맡기고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장례일정이 늦춰지고 제주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이라도 더 엄마를 붙들고 싶은 마음과, 엄마가 가고 없는 고향에 한시도 더 머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내 아이들은 할머니랑 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도 그냥 잊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고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는 멍한 상태에서 영정사진 속의 엄마만 바라봤다. 

엄마의 영혼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를 보고 있을까? 죽음 너머 그다음 세상은 어떤 걸까? 엄마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정말 하늘나라가 있기는 한 걸까? 육체가 사라지고 나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영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싶었다. 엄마가 그곳에서는 아픔이 없기를, 그곳에서는 평안하기를, 그곳에서는 걱정 근심 없이 평화롭기를. 


엄마는 평생을 걱정 근심을 지니고 사셨다. 1930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서 제주 4.3까지 어떤 세월을 사셨는지 미루어 짐작만 할 뿐 아무것도 모른다. 엄마는 옛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으셨다. 제주 4.3 때 부모와 큰 오빠를 잃고서 소녀가장으로 그 시절을 살아내셨다. 그리고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아들 손자를 기다리는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있었으리라. 큰 아버지가 6 25 전쟁에서 행방불명으로 돌아오지 않고 큰 어머니는 딸만 둘인 상황이었으니 대를 이을 자손이 끊긴 상황에서 어서 빨리 대를 이을 아들을 낳으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으리라. 딸 둘을 낳고 귀하게 얻은 당신 아들은 낳자마자 큰 집으로 양자를 보내야 했다. 당신 손으로 키우면서도 족보에는 큰집 아들로 되어 있었다. 그 설움이 어떠했을지 나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당신찍시 아들 하나 낳으려고 임신을 거듭하였으나 첫 번째 유산, 두 번째 딸, 세 번째 또 딸. 마흔 넘어 네 번째 임신으로 아들을 낳았다. 젖이 나오지 않아서 아랫동서에게 젖동냥을 하면서 막둥이 아들을 키웠다. 남편이란 사람은 오로지 땅만 파며 농사를 고집하는 고지식한 사람이었으니 어려운 살림에 자식 여섯을 키우는 일이 녹록지 않았으리라. 손가락으로 셈을 하면서 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였고, 글을 모르니 상인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무시 멸시당하면서도 겨울철에는 감귤 중간 거래 상인으로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자식들 모두 장성하여 대학공부까지 마쳤으니 이제 좀 살만하다 할 즈음에는 파킨슨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을 얻었으니 그 설움이 오죽했으랴. 오른손 마비로부터 시작되어 온몸으로 서서히 근육 마비가 오면서 혼자서 거동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러 치매와 우울증을 겪으면서는 당신 집을 떠나서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영정사진 앞에서 상상만으로 혼자서 엄마의 일생을 돌아보고 있는데, 엄마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을 들려주는 아이들을 만났다.   


어디선가 본 듯, 알듯 말듯한 얼굴의 아이들. 장례식장에서 5일 내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와서 일을 도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의 엄마를 고모할머니라 부르는 아이들. 어릴 적에 가끔 만난 적이 있지만 고향을 떠나 지낸 20여 년 동안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아이들은 나를 기억하는데, 나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사촌오빠였던 그 아이들의 아빠는 어릴 적 4 3 항쟁에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가하여 멀리 떠나버리는 바람에 작은 아버지 집에서 설운 밥을 먹으며 자랐다. 어딘가 모자란 듯하여 동네 사람들에게서 멸시당하고 따돌림당하면서도 결혼도 하고 아이도 많이(넷인가? 다섯인가?) 낳았다. 줄줄이 사탕처럼 아이들을 떼거리로 데리고서 새해 명절이면 엄마에게 세배하러 왔던 기억이 있다. 올망졸망한 어린아이들이 자그마한 체구의 엄마 아빠랑 같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일곱 난쟁이들 같았다.   

그 아이들의 엄마 아빠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성인으로 자랐다. 그 아이들이 기억하는 고모할머니, 나의 엄마에 대한 회상을 들으며 나는 그만 울컥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아이들에게 엄마는 따뜻하고 포근한 할머니였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외롭고 쓸쓸했던 어린 시절, 고모할머니 댁에만 가면 환영받고 환대받는 느낌이었단다. 할머니는 늘 친절하게 자기들을 품어주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고 그 아이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기억한다. 명절 때마다 그 아이들에게 줄 떡국이며 세뱃돈을 정성껏 준비해두었던 엄마의 모습을. "야이네는 꼭 세뱃돈 줘사댄다(이 아이들에게는 꼭 세뱃돈을 주어야 한다). 여기 말고 어디 딴 데강 세뱃돈 받지도 못할 거고, " 엄마는 그랬다. 아이들 수를 헤아려 은행에서 바꿔온 빳빳한 새 돈으로 세뱃돈을 준비해 두었고, 코흘리개 아이들에게 따뜻한 떡국과 맛있는 음식을 내어주고는 아이들이 음식 먹는 것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셨다. 엄마 아빠 없이 크면서 주눅 들어 기 펴지 못하고 움츠러들어 있었던 조카를 안쓰러워하며 그 조카의 아이들을 당신 친손주처럼 아끼고 돌보셨다. 아이들에게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할머니, 따뜻하고 다정한 고모할머니였다.   


엄마를 보내고 나서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오빠는 부의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헤아리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친척들 다 보란 듯이 멋들어지게 49제를 지내겠다고 했다. 큰 돈 들여서 최고급으로 49제 상을 차릴 거라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마당에 지금 49제를 고급지게 멋지게 할 거라고 그런 말을 자랑이라고 하고 있다니, 오빠가 한심하다 못해 돈만 아는 속물처럼 보였다. 내가 울컥하면서 오빠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에 옆에 앉았던 언니가 나를 가로막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오빠의 성격을 아는 언니는 큰일을 치르고 나서 더 이상 가족 간의 불화를 만들지 않으려 무던 참고 애를 썼다. 나는 말없이 속으로만 울었다. 남들 보란 듯이 폼나게 할 거라고 떵떵거리고 큰소리치며 웃는 오빠의 방식,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 지긋지긋하고 신물 나게 역겨웠다. 

아버지 무덤 옆에 엄마를 묻고 돌아와서 조용히 제주를 떠났다. 그리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49제에는 가지 않았다. 오빠가 돈으로 자랑질하는 제사에 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더 이상 오빠 방식의 제사와 허례허식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49제에 아무것도 않고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성당을 찾게 되었다. 수녀님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도 그분의 연미사를 드릴 수 있다고 연미사에 대해 안내해주었다. 그와 나는 어머니 49제 연미사를 드리기 위해 오랜 냉담을 풀게 되었다. 엄마가 하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하며 다시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어느 해 겨울, 나는 오빠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성인이니 부모님 기일을 지내는 방식도 각자의 방식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나의 방식대로 가톨릭 의식으로 연미사를 드리겠다고 했다. 오빠가 제사를 지내는  방식은 존중하지만 거기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자고 했다. 오빠는 쌍놈의 새끼, 에미 에비도 모르는 후레자식이라고 쌍욕을 해대고 난리를 치며 고함을 쳤다. 나는 그에 응대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그 이후 오빠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다. 오빠와의 인연을 끝내며 나는 고향 제주를 잃어버렸다. 내가 고향을 버린 것인지, 내가 고향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인지, 아님 둘 다인지,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내게 이제 더 이상 고향은 없다. 나에게 생명을 준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고향을 잃었다. 잃어버린 구슬처럼 내 손안에 없으니 마음은 허전하다. 떠나가버린 것들이 그립다. 





홀로 엄마 기일을 보낸다. 혼자서 드리는 연미사는 쓸쓸하다. 나는 고아다. 엄마가 떠나고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 듯, 고아가 된 어른 아이가 홀로 엄마를 그린다. '이제 영원한 생명의 주인인 하느님의 자녀일 뿐, 그리고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내가 머무르는 곳 모두가 고향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위로하고 도닥이면서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오월, 맑은 하늘 화려한 봄햇살에 빛나는 녹음을 보면서 엄마가 없는 세상은 한없이 쓸쓸하고 외롭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옥동과 춘희의 얼굴을 볼 때면, <뜨거운 싱어즈>에서 나문희, 김영옥의 노래를 들으며 엄마가 한없이 그립다. 보고 싶다. 마지막 세상을 떠나던 날 홀로 외롭고 쓸쓸했을 엄마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떠나시기 전, 다가가서 엄마를 품에 꼬옥 안아드렸더라면. 서럽고 한 많은 인생을 다 살아내시느라 수고하셨다고, 이제 편안히 잘 가시라고 야윈 손 한번 잡아드리고 따뜻하게 한번 안아드릴 걸.   

못다 한 애도, 엄마를 그리며 하늘로 보내는 편지를 쓴다. 


"어머니, 당신 그 크신 사랑으로 제가 이렇게 자랐습니다. 나도 어른이 되어 엄마처럼 엄마의 길을 가고 있어요. 힘들고 고된 삶의 길을 잘 살아내고 있어요.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당신 사랑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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