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음악을 낳고
그야말로 배달의 시대이다. 배달로 가능한 것들도 너무나 많고 다양해졌다. 나는 배달하시는 분들을 진심 존경한다. 우리나라 사람 누구에게든 이 순간 배달을 얘기한다면, 둘 중 한 가지를 떠올릴 것 같다. 오토바이로 하는 배달, 그리고 택배. 어느 쪽이든 힘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중한 업무량, 사고의 위험성 등 열악한 근무조건에 대한 조각난 정보의 조합으로, 배달이 대략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는 우리 각자가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다 저렇다 쉽게 판단하는 건 금물이다. 어떤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상상만으론 절대 알 수 없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배달을 해본 경험이 있다. 군에서 막 전역한 후 복학할 무렵, 절친이랑 둘이서 의기투합, 용돈벌이 신문배달을 하기로 했다. 각자 자신의 동네 근처에서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새벽 신문배달은 지금까지 내가 해본 대표적으로 힘든 일 중 하나다. 그것은 정말 도전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보급소에 가야 했다. 일간지부터, 경제지 2가지, 스포츠지, 영자신문을 부수별로 챙겨서 자전거에 싣고 배달을 했다.
내가 신문배달이 힘들다 느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매일, 그것도 이른 새벽에 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온갖 악천후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일찍 자는 것이 중요했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10시 이전에 취침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전날 조금이라도 늦게 자면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는 일은 그만큼 힘겨워졌다. 겨울 새벽에는 혹한과 어둠, 여름에는 그것이 없어서 조금 낫지만 대신 장마와 태풍이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5층, 특히 어두운 골목의 안쪽 에 위치한 집, 그 집 대문 틈으로 신문을 넣는 순간 짖기 시작하는 개도 배달을 힘들게 했다. 태풍이 오던 날, 내가 어떤 집에 잠시 신문을 넣는 순간 세워둔 자전거가 강한 바람에 넘어졌다. 비닐로 개별 포장된 100 여부의 신문이 빗물 가득한 길바닥 위에 쫘악 펼쳐졌던 악몽 같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배달하는 물건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배달일은 분명히 힘든 일일 것 같다.
늦잠을 잘 때가 있었다. 휴대전화가 없던 때라 보급소에서는 내가 약간 늦는다 싶으면 새벽시간임에도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내방엔 전화가 없었는데, 그렇게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께서 나를 깨우러 오셨다. 두 번인가 그렇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잠결에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아! 내가 또 늦잠을 잤구나!’ 당황한 나는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어둠을 헤치고 열심히 페달을 밟아 보급소 앞에 도착, 어! 보급소 문이 닫혀있었다. 그제야 나는 시계를 보았다. 2시였다. 그날 진짜로 전화벨이 울렸었는지, 내가 헛것을 들은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와 2시간을 더 자고 다시 나갔다.
이른 새벽에 나가다 보면 새벽에 일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故노회찬 의원의 유명한 ‘6411번 버스 연설’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내가 본 새벽에 일하시는 분들이었다. 신문배달뿐이 아니다. 우유 배달, 도로 청소, 쓰레기 수거하시는 분, 그런 분들이 모두 노의원님이 말씀하시던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들이다. 우리의 일상을 채워주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들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우리 대부분은 그들의 존재를 모른다.
배달업계의 대선배님 이야기
끝으로 배달업계 대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스팅의 자서전에 나온다. 그의 유려한 음악이 그간 내가 그를 오해하게 만든 것인지. ‘곱게 자란 부잣집 태생일 것만 같은 외모, 어릴 적부터 음악교육을 잘 받은 덕에 수준 높고 고급스러운 음악을 하는 줄, 막연히 생각했던 뮤지션 스팅에게 이런 유년기가 있었다니’ 싶어 책을 읽으면서 아주 많이 놀랐다. 스팅이 1951년 생이니, 50년대 후반, 지금으로부터는 60여 년 전 이야기이다.
[일곱 살부터 나는 공휴일이나 주말이 되면 아버지를 따라 도시 북쪽의 하이 농장과 광산촌까지 우유 배달을 나갔다. 아버지는 크리스마스만 빼고 일 년 열두 달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사장이라 해도 휴일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새벽 5시 아버지가 남동생은 쏙 빼고 나만 흔들어서 깨우면 나는 부스스 일어나 제일 뜨듯한 옷을 겹겹이 껴입었다. 혹한에는 유리창 안쪽에 서리가 앉을 만큼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옷을 갈아입어도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눈앞에 서렸다.
<중략>
내 기억 속 겨울은 혹독했다. 살을 에는 듯한 새벽 추위에 발이 꽁꽁 얼어서 몇 시간 동안 아무 감각도 없고 손이며 얼굴은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빙판길이 되면 베시가 강가의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베시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트럭에 붙인 애칭이었다. 이런 날 아침이면 내가 힘겹게 썰매를 지치며 우유 배달에 나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찌나 추운지 하얀 우유 크림이 은박지 마개 밖으로 터져서 병을 타고 얼어붙은 적도 있었다. 주둥이 밖으로 꽁꽁 얼어붙은 모양이 흡사 난생처음 보는 버섯처럼 희한했다. 이렇게 터진 우유를 돈 주고 살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추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미치도록 추운 날에는 석유풍로를 트럭에 싣고 다녔는데, 풍로 때문에 트럭에 타고 내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 출처 <스팅 : 뮤지션을 키워낸 성장의 순간들>(스팅 자서전, 오현아 옮김, 마음산책, 2014)
스팅의 목소리와 그의 음악은 ‘폴리스’ 시절 것부터 거의 다 좋아하지만 자서전을 읽은 후, 그가 겪은 많은 시련들을 알게 되고, 늘 듣던 음악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어린 스팅의 경험들이 스팅의 음악에 이런 깊이를 가져다준 것인가 다시금 생각해 본다. 좋은 곡이 너무 많지만 나는 ‘Fields of Gold’를 가장 좋아한다. 제목과 가사에서 말하는 ‘황금의 들판'은 ‘잘 익은 보리밭’의 은유적 표현인데, 스팅 정도면 진짜 황금의 들판을 거닐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시련을 이겨내고 잘 자라준 기특한 스팅을 지금 당장 한번 만나보자.
“We’ll walk in fieds of gold~♬”
※ 아주 아주 먼 곳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의 소유가 되는 그것을 나에게 가져다주시는 이 땅의 모든 분들께 항상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