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된 울음일 뿐 남자도 수시로 운다. 소리도, 눈물도 없는 속울음이라 모를 뿐이다. 남자든 여자든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어야 한다. 눈물의 무게와 삶의 무게가 서로 엇비슷해져야 잠시나마 생(生)이 후련해진다. 이래 저래 울어야 할 이유가 많은 시대이다.
낙엽 지고 있는
소슬한 가을 저녁의
공원 벤치에
한 사내가 앉아
울고 있다.
양손으로 뒷머리 누른 채
희끗희끗한 머리 한껏 숙이고 있지만
들썩이는 어깨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누군가가 사내에게 물었다.
그대※, 어찌하여 그리도 슬피 우십니까?
물음 무거웠던지 선뜻 대답지 못하고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고개 숙이고 있던 사내가
힘겹게 고개 들고 쓸쓸한 얼굴로 말한다.
이십여 년 잘 다니던 직장에서
단칼에 목이 잘렸습니다. 어이없게도
문자 한 통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요즘 세상에 흔하디 흔한 일이니까요.
다만, 성실과 근면으로도
호구지책(糊口之策) 삼지 못하는 세상이
참으로 슬퍼서지요.
밤새려는 것인가?
산책 마치고 귀가하는 늦은 밤
사내는 그때껏 그 자리 앉아
우는 대신 마치 잘린 제 목 들여다보듯
손에 쥔 낙엽 보고 있다.
사내여, 울던 사내여.
잘린 목 들고 피투성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사내여.
놀라 연유 묻는 식구에게
입 없어 말하지 못할 것이니
대답 대신 너무도 쉬이 잘린
가늘고 약한 목 건네라.
그러나 사내여, 늦은 저녁
어느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서럽게 울었다는 말은
결코 하지 마라.
때로는 잘린 목보다
우는 그대 등 토닥여주지 못해
미어지는 가슴 있을 것이니.
사내가 앉았던 그 자리
젖은 낙엽 수북이도 쌓인.
※한비자(韓非子)의 화씨지벽(和氏之璧)에서 부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