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영화 ‘벌새’를 봤다. 워낙 소문이 무성했기에, 극찬이 오갔기에, 꽁꽁 숨겨서 아껴뒀다 봐야지 했는데
-3년 전에 쓴 감상문입니다-
사실은 삶에 너무 지쳐 영화를 쳐다볼 계기조차 놓치며 살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영화 감상에도 둘째를 낳고 나서부터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는 있었는데 이젠 인정을 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KBS1 독립 영화관에서 상영해 줬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아기를 재우고 얼레며 영화를 봤다. 아이 머리가 어딘가 받칠까 눈은 꼬맹이를 향하면서도 내 귀와 마음은 온통 영화에 가있었다.
나도 지나왔기에, 나도 겪어온 여중생 시절이기에, 더 놓치기 싫었다.
우리 때 있었던 가정환경 조사서만큼 웃겼던 날라리 적어내기, 피식 웃음이 났다. 노래방에 가고 담배 피우고 남자 친구를 사귀고 ~ 날라리의 기준과 조건이 겨우 저거였구나 싶은데도 당시엔 누가 볼까 고민하고 손으로 가리면서 진지하게 썼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굴 썼는지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중학교엔 괴롭힌 아이들을 따로 쓰는 칸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소지품 검사와 더불어 꽤 자주 실시했던 기억이 난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사실은 별거 아니다. 겉에서 겉면만 바라보면. 중학생 은희의 삶 자체도 잔잔하게 담담하게 때론 어른스러울 정도로 침착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면 중학생 은희의 삶은 폭풍처럼 하루하루가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나는 그게 좋았다. 사실 삶에서 시련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배신, 가까운 사람의 폭력과 폭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혹은 상실과 이별, 이런 것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깝지 않고 얼굴만 스쳐가거나 그냥 아는 얼굴의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일은 하나도 와닿지 않는 게 원래 사람의 속성인 걸까. - 이 부분을 쓰는데 마음이 찌르르 좀 슬프고 이상하다.-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외로울 때 이다음에, 자신의 만화를 보며 외로움을 달래길 꿈꾸는 은희의 마음이 느껴져서, 나는 중학생만도 못한 어른인 거 같고 부끄럽기도 하다. 세상을 냉혹한 척 다 아는 어른 같고 그런 게 좀 슬프다. 사실 어른도 아니고 그냥 사람으로 정정하련다. 그래서 벌새라는 영화 포스터에 쓰인
1994년, 가장 보편적인 은희로부터
이 말이 내 이야기처럼 와닿기도 하고 거대한 플롯으로 짜여있지 않아도 담담하고 고요해 보이는 여중생의 하루하루, 그 일 년이 실로 엄청 어마어마한 거였구나, 다시 깨닫게 된다. 맞아, 나도 이때 여중생, 정확히 14살이었는데 그래서 은희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나 보다. 수줍은 듯 하지만 좋은 상대에겐 마음을 다 표현하고 싶고 영지처럼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고 마음 써주는 선생님이 그렇게나 좋았던, 친구 사이가 또 인생의 전부일 것만 같았던 그런 사춘기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걸어왔구나 싶었다. 김일성의 죽음, 성수대교 붕괴, 상품 백화점 참사가 어마어마한 역사의 사건 같다가도 사실은 나와 가까이, 아주 가까운 곳에 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있는 날 아침 학교에서 안내 방송으로 다리를 건너 통학하는 학생은 전부 교무실로 부르고 인원을 파악하라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 적이 있다. 뭐야, 뭐야, 소란스럽게 까르르 웃었던 그때 나의 여중 교실과 달리 그날 현장에선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거나 혹은 등교하는 우리 또래의 여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더 이상 세월호, 이태원 참사가 아이고 어쩌나 하고 지나치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뼈아픈 사건이라고 느낀다.
수술실에서 깨어났을 때 은희는 제일 먼저 침샘에 생겼던 자신의 혹을 찾는다. 자신을 병들게 했고 갑갑하게 했고 울퉁불퉁 아팠을 혹을 비몽사몽 마취에 깨어난 순간에 왜 제일 먼저 찾았을까.
아프고 도려내고 싶은 과거, 사실은 그 과거의 순간에 너무 싫었던 ‘내’가 있어도 그냥 마주하고 들여다본다는 영지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던 건 아닐까.
살면서 이불 킥을 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돌이켜서 말하기조차 부끄럽고 싫고 지우고 싶은 순간은 또 어떻고, 그런 혹들을 마주하고 그럼 뭐 내가 싫을 수 있지 하고 덤덤히 바라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좀 위로가 됐다. 떼어질 혹처럼 묵직하게 박혀있고 거슬렸지만 괜찮아질 거다.
흉이 좀 남아도 혹이 떼어질 수 있다. 모두 견디디 못해서 그렇게 울면서 참으면서 때로는 발광하면서 하루를 견디고 산다.
말 못 할 상처가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됐으리라. 나에게도 위로가 됐다.
나를 바라봐주고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고 내 편인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사실, 살아갈 용기가 생기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선생님의 편지처럼 세상은 신기하고 이상하고 참 아름다운 곳 같다.
곳곳에 울컥한 장면이 많을 거란 내 생각과 달리 영화는 담담하고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따뜻하고 친근한 장면에선 웃음이 더 많이 났다. 얄미운 캐릭터가 없다는 것도 좋다. 처음엔 왜 저래? 친구의 황당한 행동에 나도 은희처럼 사과하라고 이 미친*아! - 속으로 아우성쳤지만 사과하는 마음을 알게 되니 그랬구나 나도 그냥 사과하고 싶어 졌다. 카메라가 겉만 훑지 않고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봤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권위적인 가부장, 삶에 힘겨운 엄마, 폭력적인 오빠, 한심해 보이는 언니, 닮아있는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사실은 그래서 또 다른 내면을 읽어나갈 때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폭력이 정당하단 건 절대 아니지만 폭력과 권위 뒤에도 두려움과 나약함이 있단 걸 알았다.
나는 많은 장면들 중에서도 은희가 선생님을 꽉 안으면서 선생님이 좋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전혀 생각지 못한 그 장면에선 은희의 마음이 느껴졌다. 혼자 끙끙 앓았을 두려움과 외로웠던 시간들, 견뎌내야 할 시간이 앞으로 더 많은 사춘기의 작은 여학생을 나도 같이 꼭 끌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질풍노도 시기의 내 유년시절 역시 안아 주고 싶어 졌다. 처음으로.
말이 필요한가, 이런 게 훌륭한 영화지!
누군가 밀착해서 따라다닌 듯한 카메라 뒤로 내 모습이 겹쳐 보일 때 그래서 할 말이 많이 생기고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 때, 터져 나오는 듯한 이야기로 영화가 아닌 '내 삶'을 진짜 보고 싶어 지게 만드는 영화가 나에겐 훌륭한 영화다.
은희는 생각보다 용감한 소녀구나. 싫은 걸 전부 와르르 말하지 않아도 좋은 걸 좋다고 표현하는 그 마음이 대단하고 대견하고 예뻐 보였다.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마주하고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다음엔 아무렇지 않게 자기에게 가하는 폭력에도 당당하게 소리칠 수 있구나. 터져 나오려는 작은 슬픔이 끊임없이 날갯짓하는 벌새처럼 쌓이고 쌓여서 단단해진 걸까. 날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 벌새처럼 나약하고 귀엽고 어딘가 닮은 듯하다. 벌새, 영화 제목도 와닿는다.
벌새는 1분이 아닌 1초에 19-90번의 날갯짓을 한다고 한다. 실로 작고 연약하기 때문에 무수한 날갯짓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날아다니는 힘이 강하며 벌보다 더 부지런히 날갯짓을 할 수 있다. 정지한 채로도 꿀을 빨아먹을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새. 나비 같은 곤충이 아니라 분명한 '새'다.
벌새의 새끼는 모든 수각류 중에서 가장 작다고 한다. 하지만 비행 실력은 모든 새들 중에서 으뜸, 벌같이 부우웅윙윙윙 멋진 소리가 난다. 구타와 실연과 소중한 이의 죽음까지, 모두 사춘기 은희를 점점 더 작아지고 나약하게 만드는 것뿐이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성장을 가만히 마주 보고 기다리는 은희가 작은 벌새 같다.
아, 나도 영화에서처럼 따뜻한 우롱차를 호로록 마시고 싶다. 그리고 삶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우롱차 한 잔을 대접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이미지 출처 : 영화 벌새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