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습작
어제, 컴퓨터 안 끄고 간 사람 누구야?
아니, 누구예요, 대체?!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또 또 나왔네, 흥분하면 반말부터 튀어나오는 버릇. 가장 교양 있어야 할 공간에서 얼차려나 받아야 하는 모양으로 다들 어정쩡,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앉아있지만 머리만 카펫 위에 안 박고 있다 뿐이지 이건 마치 낑낑거리며 고꾸라진 자세로 머리도 박고 손도 뒷짐 져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제 컴퓨터는 다 끄고 나갔는지 말입니다.
평소 자기 할 일만 하고 말이 거의 없는 소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 말했다. 학원에서 아이들 차량 업무나 중요 자료 복사, 자료 정리를 도맡아 하는 선생님이기에 항상 뒷 마무리까지 꼼꼼하게 점검하고 나가는 편이었기에 책임감 있는 소선생님은 긴 정적을 깨고 한 번 더 확인하고 나갔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가 아침에 여기 문을 열고 아주 깜짝 놀랐어요. 깜빡깜빡깜빡, 마우스에서 불빛이 계속 켜져 있질 않나, 이렇게 깜깜한데, 전기도 귀한 세상에, 내가 몇 번을 말해요? 몇 번을! 제발 좀 컴퓨터 점검하고 코드까지 전부 뽑아놓고 가란 말이에요!
불빛이, 깜빡? 마우스? 선생님들의 고개가 갸웃갸웃, 몇몇 선생님들끼리는 눈짓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고 벌써부터 아랫입술을 꽉 깨문 윤선생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건 광마우스라 그래요. 광센서가 부착돼서 손으로 잡고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광마우스 아시죠?
그제야, 여기저기서 쿡쿡 웃음이 터졌다. 세상에, 심지어 저건 전선이랑 연결도 되어있지 않고 빛이 나는 마우스인데, 저 불빛을 보고 컴퓨터가 켜져 있다고 생각한 건가?
여기는 또 다른 대치동의 작은 세상, 도곡렉슬, 타워팰리스에 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대치동 중심 학원가에 있는 논술 학원이다. 옆으로는 사고력 수학학원과 윗 층엔 꽤 거창한 영어를 온갖 가져다붙인(Self Up Study 플러스+플러스는 왜 한글인지 모르겠지만 학습 코칭이라고 쓰여있다) 자기 주도 학습 학원까지 학원만 세 개가 붙어있고 원장님은 모두 한 사람인, 겉으로 본다면 꽤 그럴싸해 보이는 학원이다.
-아니, 서울대를 나왔다면서 광마우스를 모르면 어쩌자는 거예요?
-아유, 말도 마세요. 저번엔 계속 유비에스 좀 달라고 해서 유비에스요? 그게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니까요.
-UBS, 아하, 유에스비! USB!
아침 광마우스의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간 뒤에는 이미 여러 번 실수가 있었던 원장님의 전적이 한 번씩 더 소환된다. 선생님들끼리는 그간 모르고 지나쳤던 자기만 아는 일화들을 꺼내놓고 한참을 키득키득 웃는다. 달달한 간식이 없어도 커피에도 이 정도 즐거운 간식만 한 게 없다.
아침마다 화려한 옷차림과 새도 둥지를 틀고 갈만하게 어마어마하게 크게 부풀린 머리스타일에 선생님들과 찾아오는 학부모들의 기를 누르려는 기세가 등등하지만 실상은 입만 열면 와르르 쏟아지는 말실수의 향연이 펼쳐진다. 흥분하면 튀어나오는 경상도 사투리 억양, 긁히는 듯한 앵앵거리는 목소리에서도 품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사회 초년생으로 이 직장에서 이제 일한 지는 6개월이 채 안 됐지만 맡은 일에 그저 ‘네네,’하고 성실하게 하는 편이어서 그런지 원장님께서는 꽤 멋지고 괜찮은 선자리를 소개해준다는 둥 살갑게 다가오셨다. 집안이 빵빵하고 학력도 최고급(?)에 성실하기 이루 말할 데 없다는 말에 솔깃하긴 했지만 곧이어 그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수학학원의 멀대같이 큰 교사이고 이내 그 사람이 원장님의 노총각 조카라는 걸 알게 됐을 때는 단 둘이 있는 시간을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려고 도망 다녀야 했다. 이미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 있지도 않은 애인이 생겼다고 했지만 있지도 않은 내 애인을 길거리에서 봤다며 관상이 심히 안 좋다고 할 때는 내가 상대하기엔 너무 벅찬 상대라는 걸 직감해야 했다.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이 학원까지 오게 된 걸까, 나는... 내 거짓말도 우스웠지만 연애를 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눈이 족제비같이 찢어지고 관상이 영 별로라는 내 애인을 봤다는 원장님의 말은 귀신이라도 본 건지, 옆에 지나가는 남자였는지 뭔지, 슬슬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했다.
-여기는 모두 아시다시피, 강남에서도 제일 잘 사는 엄마들이 주 고객이에요.
아, 학원인데도 아이들이 아니라 엄마가 고객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저기 출판사 시험까지 전부 떨어지고 나를 오라는데도 여기뿐이어서 나는 이상하게도 왠지 이곳이 마지막 동아줄 일 것만 같았고 사회생활의 시작은 원래 참을 ‘인’ 자에서 시작한다더니 참아야 하나보다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데는 이렇게 경력도 없고 갓 졸업한 선생님에겐 아예 월급도 안 주고 일하는 거 알죠? 수습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까지 지켜보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야박한 사람은 아니고, 아시다시피 여기가 내 건물이에요. 논술이랑 국어로 시작했지만 신랑이 또 카이스트를 나와서 카이스트 알죠? 카이스트. 거기 졸업하고 뭐 사업하다가 은퇴하고 수학 학원 수학이 전공이니까 차리고 여기서 보니까 애들이 또 스스로 공부를 못해. 그래서 뭐가 중요하냐? 스스로 학습 공부방을 차린거란 말이에요.
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생사와 어딘가 전부 자기 자랑 같은 이야기를 듣노라니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지만 나는 적당히 웃고 딴생각을 하며 추임새도 넣어주고 대단하시네요, 감탄도 몇 번 했던 것 같다. 뜬금없이 써보라는 내 손글씨와 첨삭을 보더니 글씨 합격! 내용 오케이! 하면서 바로 채용이 됐고 수습 기간엔 정장 한 벌 값이라며 70만 원에서 잘하면 100만 원까지도 주겠다는 생색까지 들어가며 그렇게 나의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됐다.
생각보다 업무량은 많았고 매일 수업하는 아이들 태도에 관한 일지를 써야 했다. 어떤 부분이 향상됐고 잘하는지, 수업 태도나 아이에 대해 꽤 자세히 쓰면 어김없이 불려 가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니, 공 선생, 나 참..., 이렇게가 아니고 신쌤처럼 못쓰나? 저학년 반 신쌤 자료 좀 가져와봐요. 두껍게 사전보다 더 크고 묵직한 아이들 기록표가 원장실 책상에 놓인다. 이렇게 애들 욕을 써야지, 욕을! 그래야 내가 늘 모니터로 보고 있지만 늘 일일이 수업하진 않지만 요런 단점, 저런 단점, 이렇게 저렇게 해서 부족한 걸 말해야 엄마들이 자기 아이 파악을 잘한다 싶어서 한 달 치를 또 끊고 간단 말이에요. 여기 엄마들이 다 얼마나 똑똑한지 알아요? 공 선생님, 여기 주변 사는 엄마들은 지금 자수성가한 엄마가 아니란 말이에요. 할아버지 그 윗대부터 줄줄이 돈을 잘 벌고 그 재력으로 다들 병원 건물도 차리고 하나씩 누리고 아빠 직업란 좀 한 번 열어봐 봐요. 판사에, 영어 교수에,...
지겹도록 잔소리를 들은 후에야 죽은 동태 눈깔과 같은 피로한 표정으로 원장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순하고 예뻤다. 대부분 부잣집 아이들이어서 그런가 진짜 구김살 없이 사랑받으며 큰 것 같았다. 공부를 못해도 다들 여유가 넘쳐 보이고 옷차림이며, 예의 바른 말씨도 뽀송뽀송해 보였다. 지금은 공부를 못하지만 언젠가는 학원이 아닌 일대일 과외라도 해도 다들 나보다 좋은 학교를 가뿐히 가고도 남을만한, 미래가 창창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잠시라도 머무는 여기서는 책도 읽고 논술도 토론하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다가 가게 해주고 싶었는데, 원장님의 마음은 내 마음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고 오랜만에 마주친 젊은 선생님에게도 호의적으로 보였는데, 딱딱하게 대하고 무조건 흠집부터 잡아내라는 말은 볼품없는 내 수습 월급이라고 불리는 70만 원 보다 나를 더 비참한 기분에 들게 했다.
1시부터 시작된 학원 업무는 9시 반, 10시에 끝났는데 중간에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바삐 돌아갈 때가 많았다. 수학 학원 한쪽에 있는 선생님들 탕비실 같은 곳에서 급히 저녁을 해결하라고 해서 도시락을 싸왔는데 어머니가 반찬가게를 하는 손선생님과 친해져서 선생님의 반찬을 많이 얻어먹곤 했다. 특히 오징어 초무침과 간장게장 국물로 담근 새우장이 일품이었는데 평소에 수업이 끝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맥주도 한두 잔 하면서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둘 다 홀어머니와 함께 자랐다는 가정환경이 비슷했고 1시부터 9시까지 핸드폰을 금지하면 금지시킨 대로 그대로 원장에게 반납하는 것도 우리 둘 뿐이어서 뭔가 말 잘 듣는 아이 같은 성실함과 순박함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 반찬을 싸왔다며 같이 나눠먹자는 손선생님이 나를 봐도 본체 만 체 쌩 하니 지나가고 인사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싶어 왜 그런지 주저 주저했는데 그 비밀이 풀린 것은 어이없게도 저녁 시간을 놓쳐 삼각김밥이라도 후다닥 10분 안에 먹고 가려는 날, 벌어졌다. 평소엔 당연히 사용하지도 않을 시간이었지만 그날따라 꼬르륵 소리가 너무 심해서 황급히 수학학원 탕비실 문을 열었더니 원장님의 남편, 카이스트를 나왔다는 그 수학학원 원장님이 냉장고 앞에서 쭈그린 채로 오징어 초무침 국물까지 싹싹 긁어서 거의 들고 마시다시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때 마침 커피 한 잔을 타러 온 손 선생님도 그 광경을 나란히 목격했고 우리는 그날 맥주를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쌩하니 찬바람이 불었던 태도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공선생님, 미안해요. 늘 반찬을 싸와도 고맙다고 말해주고 같이 뭐든 작은 거라도 나한테 나누는 걸 알았지만 어느 날부턴가, 초무침을 싸와도 이틀 만에 그 많은 양을 다 먹고 인사도 없고 분명 하루에 먹을 양이 아닌데, 자취방에 싸가는 걸까, 아니 먹고 싶으면 더 싸달라고 말을 하지, 내가 혼자 오해했어요.
-그럼 여태껏 반찬을? 반찬 때문에...
-그르니까요. 그게 뭐라고. 새우장에선 양파와 고추만 둥둥 떠있고 새우만 쏙쏙 빼먹고 껍질을 그대로 놔둔 채 치우지도 않고 그런 게 반복되다 보니 이걸 직접 말하자니 기본적인 문제 같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고민 중이었어요. 그냥 처음부터 물어볼걸 그랬어요. 미안해요, 정말로.
-세상에, 선생님. 저는 아니었어요. 늘 나눠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지만, 제 그릇에 따로 덜어먹었고 어느 날부턴 반찬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냥 드실 만큼 싸와서 다른 선생님하고 또 드시는 줄 알았죠.
-맞아요, 오늘 광마우스가 오늘은 남편까지 미치'광'이라는 걸 드러냈네요. 드디어 걸린 거죠, 어쩐지 커피가 그렇게 마시고 싶더라니. 진짜 쥐새끼같이 저게 뭐래요?
그날 우리는 웃으며 서로 오해를 풀었지만 쭈그리고 마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모른 채 허겁지겁 무덤을 뒤지는 구미호처럼 오징어 초무침 국물까지 마시고 있는 키 작은 그 남자 원장님의 모습이 집에 가는 내내 잊히지 않았다.
탁탁탁, 저녁 9시가 넘어가면 어김없이 책 정리를 하는 시간, 아이들이 열심히 읽고 수업했던 책들을 제자리에 꽂고 정리할 때면 원장님은 마치 수금하듯 이 시간에 들러 빙 둘러보며 아이들 수업 카드와 목록을 대충 훑어보기도 하고 정리된 곳을 체크하기도 했다.
-아니, 참. 이게 왜 여기 꽂혔지?
잘못 누가 여기에 꽂았냐면서 아가사크리스티의 ‘쥐덫’을 과학 코너에 자연스럽게 꽂았다.
-...!
-이렇게 과학이랑 문학이랑 다 분류가 있어요, 분류가! 제대로 좀 꽂아서 정리합시다!
-원장님!
나는 그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원장을 다급하게 부르고 있었다. 이미 터진 목소리와 달리 내면에서는 뭐든 네가 생각하는 걸 말하면 안 돼,라고 외치고 있었는데 입이 생각보다 먼저 터져버린 것이다.
-공 선생, 왜요? 바쁘니까 빨리 말해요.
-아.. 아니, 그게 저, 그건 아까 윤석이가 꽂아놓은 건데, 그 책은 그 자리가 맞아요.
-...? 뭔데? 뭐가?
다급해지고 이상한 분위기만 직감에도 이미 기선제압인지 뭔지 반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가사크리스티는 추리소설 작가이고 쥐덫은 쥐에 대한 책도 쥐덫에 대한 과학책도 아니고 그냥 추리소설이에요.
-그건 제가 어렸을 때 가장 재밌게 읽은 추리소설이에요. 영국 메어리 여왕이 80번째 생일을 맞아서 BBC방송국에서 생일 축하 방송으로 뭘 듣고 싶냐고 물었을 때 메어리 여왕이 말한 게 바로 저 소설이라고요. 메어리 여왕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극을 듣고 싶다고 당당하게 말했어요. 방송국 측에서 웅장한 오케스트라나 셰익스피어 연극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 두 개가 아니고 메어리 여왕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렬한 팬답게 그녀의 작품을 원했고 솔직하게 말한 거예요! 이 소식을 들은 크리스티는 일주일 만에 이 작품을 썼어요. 30분짜리 방송극으로 꾸며진 이 극본이 바로 쥐덫의 창작 동기였다고요! 제발 좀! 엉뚱한 데다 잘난 척하며 책 좀 뒤적거리고 꽂지 말라고요!
쥐새끼처럼 반찬을 훔쳐먹고 아무 사과도 안 했던 신랑과 광마우스 하나에도 벌벌거리면서 쥐 잡듯이 우리를 잡았던 원장님의 모습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 안 그래도 산이 높게 꺾인 원장님의 진한 눈썹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태껏 내가 대답하거나 말한 중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원장님 앞에 꺼내놓은 순간이었다. 광마우스 때까지만 해도 웃으며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어이없게도 어린 시절 즐겁게 웃었던 나의 ‘쥐덫’으로 인해 아가사 크리스티 여사로 인해 나는 잘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아니, 잘려도 그만이었다. 한 번쯤은 메어리 여왕처럼 솔직하게 원하는 걸 말하고 싶었으니까. 명랑한 음표가 놓인 치즈 위에서 나를 골리듯 치즈를 갉아먹는 회색빛 생쥐 한 마리가 쥐덫에 걸리지 않고 광마우스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