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능 시험 도전기, 수능 시험날 아침 공기는
수능 시험 아침, 차가운 공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전날 예비 소집일을 통해 내가 시험 봐야 할 학교가 어딘지까지 전부 파악하고 다녀왔지만 교실까지 들어가서도 어느 자리가 내 자리인지 알 수 없어서 제일 뒷자리 책상만 쓰다듬다 온 기억도 난다. 수험표대로 어디 앉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커닝을 한다고 이렇게 학교까지 지정해서 바꾸나, 어디가 내 책상인지는 몰라도 이왕이면 앉을 거 아예 뒷자리에 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순박해서 수능 시험 당일 아침에는 비행기 소음도 하나 들리면 안 돼서 비행기도 안 뜨는 줄 알았다. 당시 김포 공항 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에 살았는데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날 때마다 어찌나 가깝게 보이는지(무슨 항공사인지 코 앞에서 보이는 듯했다 ㅎㅎ), 또 날아가는 소음도 엄청나서 시험 당일에 저 비행기 소리는 어쩌나 했던 생각도 난다. 친구들끼리 수군수군 '수능날은 비행기 뜨는 것도 금지래, 금지' 까르르 웃었다. 뭐든 어리고 철이 없었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사고에서 비롯된 일화지만 신기하게도 비행기가 고도를 조절한 건지 뭔지 당일에는 다른 길목으로 간 건지 아직까지 해답은 뭐 알 길이 없다.
수능 아침이 밝았다. 아빠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차량을 점검하고 이왕 시험 보는 거 학교까지 태워준다고 서둘러서 나가셨다. 그때도 역시 어마어마한 방향치에 길치라, 아빠는 수능 당일 내가 학교를 못 찾을까 걱정하셨던 것 같은데 나는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친구들이랑 같이 대중교통을 타고 학교 정문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걸어가는 긴 행렬 속, 강렬한 응원 풍경도 가까이서 보고 싶었고.
어제 「라디오스타」란 프로그램에서 학습과 관련된 콘텐츠를 만드는 유튜버가 수능 당일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고 하면서
시험 잘 보고 와
(엄마는) 너를 믿는다
잘할 수 있지? 파이팅!
여기까지 듣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나는 당일 아침에 이미 세 개 다 들었던 말인데, 금지어라니!
그날따라 한 번도 현관 밖으로 나를 배웅해 준 적 조차 없는 엄마가 슬리퍼를 신고 계단 아래까지 함께 내려와서 나를 안아준 기억도 난다. 당연히 평소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그런 행동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사실,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이 시험은 중요한 시험이구나, 적당한 긴장감이 들었고 나를 생각한 가족들의 마음이 뭉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평소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후다닥 서둘러 나가면
-그래, 잘 다녀와!
이런 대답도 잘 못 들었던 같은데,
그럼 자식 눈치 보느라
-잘 다녀와,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이런 말도 못 한다고 생각하면 이건 또 좀, 너무 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 평소에 했던 그대로, 부담을 주지 말고 아무렇지 않게 학교 가듯 대하라고 했는데 그게 글쎄...
과연 될 수 있을까도, 싶다.
"잘~ 다녀와" 할 때 '잘'이라는 말에도 그럼 너무 길게 호흡을 끌면 안 된다는 건가, 나도 이젠 더 이상 수능을 치르는 학생이 아닌 '학부모'입장이 돼서 그런가, 저런 말이 웃음이 터지는 한편 궁금해지기도 했다. 평소에 잘 배웅해 주고 늘 믿어주는 엄마라면 수능 당일에 믿는다, 사랑한다, 이런 말이 주는 부담감이 좀 덜하고 오히려 든든하려나, 그냥 아이들에게 평소에 좀 더 다정하게 잘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 가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남의 학교에 가서 시험까지 치르는 대대적인 일인데, 일상적으로 학교 가듯 대해선 안되지, 암.
옛날로 치자면 현대판 과거시험 같은 수능인데, 수능 하나로 신분이 상승되고 장원급제해서 파바밧, 인생 반전이 바로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수능은 자기 직업이나 미래 할 수 도 있는 '전공'이나 '진로'를 배우고 계획하게 될 중요한 4년을 결정짓는 시험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시험 그 이후에 대학 생활이 4년이 더 중요하지만 어느 학교, 무슨 과에 가게 되느냐에 따라서 내 진로나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사실 이렇게 쓰고 있지만 요즘 입시제도를 잘 몰라서 -수시로 대부분 간다고 들었는데- 수능시험이 차지하는 무게가 어떤지 '라떼는'을, 떠올리고 비교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도 있겠다.)
수능 시험장은 너무 추웠다. 손이 꽁꽁 얼어서 제대로 컴퓨터용 사인펜을 쥘 수 있을까, 차가운 입김이 언제쯤 사라질까 이런 생각도 한 것 같다. 전부 모르는 얼굴들, 어색한 분위기, 평상시 늘 내가 있었던 교실에서 치르는 모의고사 분위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였다. 국어, 영어 듣기 평가를 위한 테스트용이었는지 지직지직 하더니 방송용 스피커에서 주파수를 맞추는 소리와 노래가 흘러나왔다.
머라이어 캐리의 'Hero'라는 곡이었다.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머라이어 캐리의 노래, 그것도 수능 시험 보기 전 '영웅'이 시험 바로 직전에 흘러나오는 노래라니 뭔가 운명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모르게 긴장감을 떨쳐내고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
이미 알고 있는 가사라 가사를 듣는데 갑자기 시험을 보기도 전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데 공부를 좀 더 할 걸, 이렇게 후회되는 순간도 없는데 여기에 어디 내 안에 영웅이 있단 말인가?
두려움 천지인 이 상황에서도 머라이어 캐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내 영혼 깊은 곳에 답이 있고 진짜 히어로가 나타날 거라고 하니까. 나의 내면에 단단한 진짜 히어로를 나는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바삐 움직이여 일분일초라도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 틈에서도 노래 가사에만 푹 빠져있었다. 생각보다 꽤 길게 흘러나온 이 노래는 점점 클라이 막스로 향하고,
까지 흐르다가 멈췄다. 이 노래를 부른 머라이어 캐리와 발음이 같은, '캐리 온' 특히 저 클라이맥스 부분을 좋아했는데 저 부분이 흐르다가 뚝 끊겼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라는 신호 같이 느껴졌다.
그래, 뭐가 됐든, 어쨌든,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새로운 힘을 이끌어줄 영웅이 제발 이 수능 시험장에서 나타나주길 기도했던 것 같다. (그냥 찍어도 다 맞게 해주는 신이 나타나길 간절히 바랐다고 해야 할까, 이게 솔직한 심경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울면 안 되지, 눈물을 털고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머라이어 캐리의 응원 덕분인지 언어영역 시작이 기분 좋았다. 수능 첫 시간이 늘 언어영역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학창 시절부터 언어영역은 시험 문제를 푸는 것 자체만으로도 지식이 쌓이는 기분이 들고 아는 문학, 비문학 지문중 아는 내용이 나오면 그거대로 그렇게 반가운 마음이 들 수가 없었다. 행여 모르는 지문이 나와도 시간 안에 파악하고 풀이하면서 시험 시간 자체에서도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곧이어 제일 자신 없는 수리영역(수학) 시간에는 평소보다 정신을 더 바짝 차리려고 했지만 문제 난이도가 쉬웠다는 평가에 비해서도 나에겐 어렵게 느껴졌다. 답안지를 제출하자마자 예상대로 망했구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다른 반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는 현희와 만나서 같이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나자, 다시 편안한 수다가 이어졌다. 수능 시험장에서 처음 먹는 도시락은 그 기분도 달랐다. 나는 평소보다 더 묵직한 도시락 가방을 들고 시험장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별로 의아하지 않았는데 도시락통을 열어보니, 엄마와 언니의 응원과 사랑이 마구마구 들어있었다. 언니는 쪽지를 접어서 긴 편지를 써줬는데 그게 하필이면 밥 먹기 전에 나를 울렸고 엄마는 그때 당시 유행하던 코끼리 밥통 보온 도시락 통에 뜨끈한 밥과 국, 국물까지 보온병에 체하지 않게 먹으라며 국물까지 챙겨 넣어주셨다. 몇 시에 또 일어나신 건지 내가 좋아하는 평소 잘 먹었던 깻잎 나물이며 다양한 삼색 나물 반찬과 엄마표 특제 소스가 들어간 두부 불고기가 보이자 눈앞이 뿌옇게 되서 더 이상 먹을 수 조차 없었다. 2교시 수학만 망하지 않았어도 맛있게 먹었을 텐데 나는 평소보다 사랑이 더 들어간 도시락을 더는 삼키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남기고 가면 엄마가 시험을 못 봤나 행여나 걱정할까 하는 마음에 잘 들어가지도 않는 밥을 눈물과 함께 삼킨 기억이 난다. 여린 마음, 약한 멘털의 소유자였던 나에겐 수능 시험날 도시락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1교시 시험이 끝나고 빈자리도 보였고 점심시간엔 '야, 우리 짜장면 시켜 먹을까?' 하는 날라리들의 점심메뉴 선정에 대한 이야기도 나에게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지나칠 정도로 긴장하고 보는 이 시험이 누군가에겐 중간에 그냥 포기하고 나갈 정도로 별로 중요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 긴장이 연속이었던 부담스러웠던 그 도시락통을 마주하는 것과 다르게 짜장면 같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배달 이야기, 저마다 삶의 방식은 달랐고 그걸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내는지 각자 자기 몫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이미 귀한 상차림(*도시락)처럼, 정성 가득한 언니의 쪽지처럼 대단한 기대와 사랑을 받고 있구나, 나를 응원하고 사랑해 주는 가족들 생각이 많이 났다. 감사한 마음 한편에 더 정신 차리고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부담과 책임감도 느껴졌다. 꼭 수능 시험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책임감 있게 살아야겠다는 무게를 떠올렸던 것 같다.
점심을 안 비우고 싹싹 비운 탓에 3교시엔 잠과 사투를 벌여야 했지만 그래도 4교시 영어 듣기 평가 때부터는 잠을 완전히 깨서 긴장이 제일 많이 풀린 채로 가장 집중한 컨디션으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영어 듣기 평가 시간에는 누군가 꿀팁이라며, 방송을 듣지 말고 아이들이 가장 많이 움직이고 고개를 숙여 표시하는 순간에 그걸 답으로 적으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솔직히 그렇게 누구를 타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단체의 움직임에도 별로 신뢰가 안 가서 그냥 소리만 집중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난이도가 평이하고 대체적으로 어렵지 않은 문제들이 이어졌다. 수학은 평소에 너무 못해서 수학마저 쉬웠다는 물수능이 끝났다. 다 같이 높은 점수에 잘 봤다고 해도 나는 그래도 쉬운 수능이 좋았다. 그게 내 마음을 좀 더 뭔가 편안하게 해 줬던 기억이 난다. 돌아오는 길, 이제 끝났다!! 끝이다! 가! 가란 말이야! 정우성이 나오는 CF를 따라 하며 현희랑 낙엽을 던지면서 놀았던 기억도 난다.
사실 우리가 말하고 싶었던 건 수능, 시험, 전부 가!! 가란 말이야! 였던 것 같다.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하늘은 금방 저녁놀이 물들었다. 하루가 이렇게 시험으로 금세 지나가는구나, 그 날 보았던 붉은 저녁놀과 사방 어지럽게 알록달록 물들어있었던 떨어진 낙엽길, 시험 점수 여부에 상관없이 세상이 참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수능 한파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늘은 낮부터 포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제 시험을 치르고 속이 편한 학생들도 결과에 만족한 학생들도, 불안하고 무서운 학생들도 많을 것 같다.
물론 후자에 속한 학생들이 훨씬 더 많겠지만 이 말은 꼭 해줘야겠다.
길고 긴 시험, 긴장되고 자신과 싸움을 치러야 하는 시험,
시험 보느라고 고생했습니다.
모두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고 내 안의 '영웅'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한다.
인생의 크고 중요한 시험들 속에서 언제나 답을 고르고 답안지를 마킹하고 이제 그럴 일은 점점 줄어들지만,
더 중요하게 결정하고 치러야 할 시험의 순간들이 많이 찾아올 것이다. 그땐 내 마음속 영웅이 가장 좋은 답을 찾아주길, 응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