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네 덕분에
엄청난 한파가 시작된 날, 화요일이 되기도 전부터 단단한 준비를 했다. 복슬복슬 극세사 양말은 물론이고 롱패딩을 꺼내 입어야겠다고 결심한 날이기도 했다. 날이 흐리고 추워서인지 이불속에 뭉그적거린 첫째 아이 준비가 늦어진 바람에 아슬아슬 겨우 지각을 면할 것 같은 시간에 등교를 보내고 나니 기운이 빠졌다. 창문을 열어 나가기 싫은 쌩쌩 바람을 한 번 더 체크한다. 휘날리다 못해 헝클어져 날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나갈 채비를 했다. 병원 검진 예약이 있는 날이라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했는데 왜 하필 날을 잡아도 이런 날로 골랐을꼬 한탄하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미션 하나 더, 둘째 등원을 준비해야 했다. 둘째 등원 준비를 후다닥 마치고 함께 나가야 아슬아슬 시간이 맞을 것 같았기에 이런 날 서두르면 괜히 더 짜증을 내게 되고 나도 모르게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생각에 버럭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후다닥 씻고 내 준비를 우선 마치고 둘째에겐 밥을 먹이면서 옷을 입혔다.
10월 말, 11월부터는 달라진 기운, 추워지고 쌀랑한 날씨와 공기에 기분마저 다운될 때가 많다. 이 시기가 항상 그랬다. 아이들도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하고, 습도 많은 여름엔 느낄 수 없었던 건조하고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한 순간부터 기분이 덩달아 나빠진다. 예상대로 아프고 나 역시, 콧물 눈물까지 폭발하면 저절로 에구구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운동을 자연스레 못하고 살이 약간 붙고 부은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뭔가 속상하고 거울을 보기도 싫어진다. 거울과 가장 멀리하는 11월이 온 것이다. 12월은 그때도 여전히 후덕해져도 연말이고 크리스마스여서 그런가, 더 큰 옷으로 가려져서 그런가, 아니면 살찐 모습에 익숙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ㅋㅋㅋ 평소에도 거울을 꽤 자주 보면서 기분 전환을 하는 편인데 11월은 저녁 7시 이후 부기 빠진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아이 옷을 차근차근 입히며
-오늘 날씨가 정말 춥대, 바람 소리 들리지? 율아, 엄마는 이런 날씨가 너무 싫어. 나가기가 싫어.
-엄마, 엄마.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선율이가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엄마, 그름 오늘 나가지 마세요. 밖에 나가지 말고 따뜻한 방에서 이렇게 이불 뒤집어쓰고(담요를 뒤집어쓴 시늉을 한다) 누워서 푹 쉬고 잠도 더 자고 따뜻하게 있어.
평소와 같은 작은 이야기를 건넨 것뿐인데 아이에게 돌아온 답이 실로 놀랍다. 존댓말로 시작한(뒤엔 반말로 끝나긴 했지만 ㅎㅎ) 따뜻한 말 한마디. 갑자기 뭉클하고 차가운 기운이 스르륵 녹는 기분마저 든다. 이렇게 예쁜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내 마음을 알아주고 해주는 말 같아서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그냥 공감해 주는 말을 얼마 만에 들어보는 거지? 갑자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바빠진 신랑은 새벽부터 나가서 밤이 늦게야 들어오고 사춘기가 찾아올락 말락 하는 큰 아이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이거 저거 다 말하고, 수다스럽긴 하지만 이런 다정한 말을 건네준 적이 없다. 6살짜리 아이에게 공감을 받은 기분이 이런 거구나, 몰랐던 또 다른 세계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엄마 걱정해서 따뜻하게 있으라고 장판도 확인해 주고 이불까지 쓰고 있으라고 한 거야. 고마워, 선율아.
-응응, 엄마, 추워. 엄마는 맨날 춥지? 그럼 나가면 안 돼.
-그런데, 엄마는 오늘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어. 그래서 선율이 체육복도 다 입히고 같이 나가서 병원 가야 돼.
-병원? 엄마 어디 아파서?
-아니. 아파서 갈 때도 있는데 아픈 데가 없는지 확인하러 가야 해서(정기 검진을 뭐라고 표현하나 좀 생각을 해 본 뒤에 답을 해줬다)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하는 날이야. 선율이 약속 알지? 약속을 지켜야 하는 날!
-그럼 엄마, 내가 좀 더 서둘러서 빨리 옷 입고 엄마 말 잘 들을게. 같이 나가자.
-세상에! 고마워!
서두르는 내 마음, 시간에 못 맞추면 어쩌나 하는 내 마음과 달리 기분 좋은 다짐과 긍정의 말까지 더해지니 절로 기분이 좋았다.
-엄마, 그럼 아까 말한 대로 병원 갔다 와서 따뜻한 방에서 잘 쉬고 있어야 해. 엄마도 좋은 하루 보내고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나!
이 말에선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는데, 늘 졸려, 졸려, 집에서 더 있을 수 있는 엄마와 선율이가 세상에 젤 부럽네 하는 큰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선율아, 엄마는 너의 말 덕분에 따뜻하게 옷을 입고 나와서 언제나 그랬듯이 네가 탄 차량이 사라질 때까지 혼자 열심히 손을 흔들면서 결심했어.
네 말처럼 오늘 하루를 더 따뜻하고 즐겁게 보내기로. 그리고 다시 우리 웃는 얼굴로 즐겁게 반갑게 만나기로.
추운 날씨였지만, 내 얼굴이 제일 못나 보이는 시기지만 그래도 탁 트인 한강을 보는 것만으로 왠지 기분이 좋아졌고 검진을 마치고 나름의 사치를 부릴 수 있는 두 가지, 「한국집」에서 육회 비빔밥도 먹고 엄마가 좋아하는 교보문고에 가서 책도 읽었어. 최은영작가와 진은영 작가의 책도 사고 형아와 형아 친구에게 선물로 줄 책도 골랐어. 고르면서 엄마는 '은영'이란 이름을 아주 좋아하고 있구나 느꼈어.
수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역시 엄마의 마음에 들어오는 책들은 지금 '소설'이구나. 그리고 엄마에게 필요한 건 시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 너도 언젠가 형아처럼 글씨를 읽을 수 있는 날이 얼른 오면 엄마가 매일 작은 쪽지에 글자를 써줄 텐데, 지금은 글씨를 못 읽어서 엄마 혼자 너에게 쪽지를 쓰고 그걸 낭독(?)하고 있으면 너는 어딘가로 금방 사라져 있더라;;;; 역시 엄마는 이제 졸린가 보다. 또 이상하게 말이 길어지고 다른 길로 요리조리 이야기가 새고 있구나.
사랑하는 선율이가 벌써 이렇게 커서 엄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그 말이 엄마의 하루에 어떤 기적을 일으켰는지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렴.
엄마는 늘 그런, 작지만 큰 '말'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달려온 건지도 몰라. 그런데 세상 어디에도 없을 나의 아이에게 그것도 6년도 세상을 채 살지 않는 너한테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참 뭉클했어. 예상치 못한 평범한, 아주 가까운 곳에 늘 행복이 있었는데 그건 나이랑도, 조건이랑도, 거창함이랑도 상관없고 거리가 멀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꽉 찬다는 걸!
엄마가 우리 아이들, 사랑하는 신랑, 나의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에게 너처럼 이렇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응원을 해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계속했어.
*다정한 5초 컷!
행복은 우연히 자갈 사이에 피어난 꽃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그걸 보고 가만히 멈추고 바라보고 느끼는 마음 그 자체인 것 같다.
#몹시쓸모있는글쓰기
#11월
#일상의기쁨
#아이의말
#행복의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