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작품이 되기까지 연습)을 이어가다
"구구. 구구구구. 콕콕"
나는 새까맣게 말라빠져 털이 삐죽삐죽 솟은 더러운 비둘기를 보자 소름이 돋았다.
으으, 저 기생충 덩어리들. 온몸 사이사이 기생충이 바글바글하겠지. 나는 한 발로 비둘기 떼를 훅 위협하려다 이내 부리가 뾰족한 녀석의 빨간 눈알과 마주치자마자 놀라서 휙 발길을 돌렸다. 놈들은 날아갈 생각조차 없이 여유 있게 바닥의 알갱이들을 콕콕 쪼며 내 발소리나 움직임 따윈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더러워서 피하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두툼하게 살이 찐 또 다른 비둘기와 눈빛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내 심장은 두근거리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둥그런 눈 안에 어디를 응시하는지 모를 노란빛의 홍채가 차갑고 매섭게 느껴졌다. 저런 눈이랑 싸워봤자 절대 이길 수 없겠지.
"엄마, 일등으로 와! 꼭꼭 꼬옥! 제발요. 알았죠? 일등으로 데리러 오세요."
아직도 비둘기 때문에 두근거리는 내 귓가에선 어린 이도의 목소리가 쟁쟁 울리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쉼 없이 바닥에 박는 비둘기 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매번 이 길에서 비둘기 눈치를 보는 건 언제나 나구나 하면서 말이다.
이 동네에선 그래도 규모가 가장 큰 대단지 아파트에 위치한 유치원이었다. 처음 아이가 추첨에 떨어졌을 땐 분하고 억울해서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하지만 이젠 눈 감고도 유치원 정문까지 걸어갈 만큼 여유가 생겼다.
합격자 대기명단 9번.
그동안 29번, 309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유치원 대기 번호까지 받았기에 처음부터 예감이 좋았다. 사랑스러운 곱슬머리를 가진 아들이 유치원복을 입고 뛰어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됐다, 됐어! 이젠 술술 다 잘 될 거야.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어디 합격할 일이 전혀 없었기에, 입학 조건이 까다롭고 동네에서 가장 큰 이곳에 들어가게 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뻤다.
사랑이 가득한 명문 프리미엄 『라온 잉글리시 아카데미』
요즘 세상에 스스로 명문이라고 자랑한 것도, 굳이 프리미엄을 넣은 것도 좀 민망하긴 했지만 다르게 보면 이것 역시 자부심이겠거니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순우리말과 영어가 섞인 모양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아이의 유치원 생활은 만족, 그 자체였다. 어마어마한 경쟁률, 까다롭고 복잡한 규정, 시시콜콜한 명목의 크고 작은 준비 모임이 귀찮을 정도로 많았지만 그런 짜증 나는 것들은 금방 잊을 수 있을 만큼 아이는 빠르게 유치원에 잘 적응했다. ‘아카데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영어 유치원 생활을 처음 시작한 다섯 살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서 온몸으로 드러눕고 버티던 때와는 달리 엄지를 척 올리며 나에게 ‘수영 선생님도 영어로 말해!’, ‘우리는 하이클래스래!’, ‘엄마, 나도 발레선수랑 골프 선수가 될 거야. 도영이는 아빠랑 주말마다 골프를 친대.’ 라며 배시시 웃었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후다닥 유치원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역시 내 선택이 옳았어, 나는 몇 번이고 뿌듯해했다.
날마다 네 시간씩 배우는 영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알려준 'I have a dream'을 아이가 전부 외워서 부를 땐 뭉클한 마음에 눈물마저 찔끔 났다. 이내 후다닥 핸드폰을 찾아서 틀린 부분이 있나 가사를 전부 비교하기 위해 아이에게 호들갑 떨며 '앙코르'를 요구하긴 했지만.
영역별로 나눠진 활동 시간과 빼곡한 수업시간, 발레와 로봇, 골프, 수영, 심리미술 같은 특별 활동까지 6살 아이에겐 조금 힘든 일정일 것 같았지만 이도는 스펀지처럼 쫙쫙 흡수하며 재밌어했다. 아이는 동화 뮤지컬 시간에 배운 노래를 반복해서 틀어달라고 하며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나에게 새로운 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유치원으로 등원하며 정문 근처에서 습관적으로 나는 아이의 손을 힘 있게 꽉 쥐었다. 그것은 아이에게 더 멋진 세상을 골라준 내 뿌듯함의 표시기도 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진 말이다.
이도의 키에 반도 될까 말까 한 체구가 작고 눈이 엄청 똘똘한 여자애. 나는 눈을 데로록 굴리는 모습까지 작은 다람쥐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딸을 낳게 된다면 저랬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귀엽고 깜찍한 외모였다.
"제 이름은 유지아예요. 아줌마"
"아하, 지아? 지아구나. 지아는 참 귀엽게 생겼네. 우리 이도랑 같은 반이니?"
"히힛. 아줌마, 제 이름엔 J가 아니라 G가 들어가요. 그래서 전 영어 이름도 필요 없어요. Gia 지아! 저는 업그레이드 반인데 그래도 이도랑 잘 알아요. 이도야, 우리 친구 맞지?"
영어 스펠 하나씩을 말했을 뿐인데 자부심이 대단해 보였다.
이도보다 두 단계 더 높은 반이라는 걸 알자 마음이 좀 시큰둥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아의 종종 걷는 모습이 조금 큰 인형처럼 깜찍하게 느껴졌다. 키는 작지만 엄청 야무지고 귀여운 애구나. 하지만 하루, 이틀 이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엄마를 본 것 마냥 두다다다 득달같이 뛰어와서 내 손에 들린 간식을 휙 빼앗아가듯 가져간 뒤, 입을 오물거리는 그 애를 볼 때마다 인형 같았던 첫인상은 사라지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나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하고 애교를 떨었던 것도 다 이런 목적이 있던 거였어, 으이구, 둔탱이. 내가 먼저 경계를 했어야 하는데, 속으로 몇 번이고 화를 가라앉혀야 했다. 고 조그만 아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속을 끓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도 내 손에 들린 간식 봉지를 보자마자 '친구'임을 강조하고 슬금슬금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나도 이젠 종종 거리는 발걸음으로 내 아이보다 먼저 내 간식을 받아서 쌩 자기 할머니에게 돌아가는 그 애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지아는 옆 반에서 이도와 함께 수업 후 유치원 특별 활동까지 전부 하는 아이였다. 엄마, 아빠 모두 단지 안에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어서 늘 할머니 손에 하원을 했다. 다른 할머니들과 달리 세련된 옷차림에 날씬한 몸매를 가진 지아의 할머니도 교사 출신, 아니 교감 출신이라고 들었다. 목에 두른 색색의 명품 스카프는 날마다 바뀌는 것 같았다. 지아의 할아버지 역시 교장 선생님 출신의 교육자 집안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그래서인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그 할머니의 목소리엔 교양이 가득했다. 함께 어울려 수다 떨기보다는 늘 카페에서 파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 와서 벤치에 앉아 있는 조용한 분이었다. 지아네 집안이 전부 교육자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돌았고 유치원 엄마들은 그래서 아이도 똑똑하고 야무지다며 지아를 더 예뻐했다.
“엄마, 지아네가 사는 단지 쪽은 커뮤니티라는 게 있대! 나도 거기로 가고 싶어!”
아파트 대단지 맞은편엔 평수가 어마어마한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왔다고 한 걸 알았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도 이곳까지 등원을 하는 줄은 몰랐다. 이제는 성공한 아이들의 조건이 엄마의 극성과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라고 했건만 우리는 꿈도 못 꿀 어마어마한 액수의 그 새로운 왕국 같은 단지 하나가 아이의 말 한마디에 새로운 꿈이 된 것만 같았다.
“뱁새가 황새, 알지 여보?”
출근길에 한 번 더 말하는 신랑, 넥타이는 오 년 전 결혼기념일에 내가 마음먹고 사준 명품이다. 그걸 또 자랑스럽게 고르고 다시 여러 번 매만지며 말한다. 우리도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가야 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이사를 노래했건만 우리의 가랑이 찢어지는 신세를 한 번 더 확인해 주는 신랑의 그 말에 화가 났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당장이 아니고 우리 이도가 입학할 시기에는....”
“그래, 무슨 말인지 알지만 나는 우리가 여기 왔을 때도 이미 충분히 우리가 무리를 한 거라고 생각해. 아이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누리는 것도 좋지만 그건 부모가 그만큼의 능력과 테두리가 있었을 때 이야기지!”
“아니, 커뮤니티 애들만 이용하는 키즈카페며 수영장, 그런 걸 하루가 멀다 하고 부러워하는데 그럼 어떡해? 회사만 쏠랑 가버리면 그냥 끝이야? 정작 아이의 부러움 섞인 한탄을 들어야 하는 건 누구고?”
말이 나온 김에 무조건 안된다, 안된다만 하는 신랑에게 울컥해서 아이가 나에게 떼쓰듯 똑같이 조르는 말투가 저절로 나왔다.
“아이는 부러워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본디 황새가 아닌 것을. 그냥 부러움에 그쳐야지, 무슨 엄마들끼리 어울려 다니며 맨날 생일 파티를 호텔에서 하고 레고 랜드에서 하고, 그렇게 우르르르 휩쓸리고 다니면서 부러워만 하는 게 과연 행복한가 이 말이야?”
유치원 활동비 외에 이제 막 또래 놀이를 시작한 아이는 함께 어울리는 아이들과도 친해지고 방과 후 활동도 하면서 같이 생일파티며 축구, 수영을 배우는 무리들이 생겼다. 하지만 웬걸, 뭔 부잣집 사람들은 이리도 많은 건지, 다들 생일 파티 시작부터 화려하게 호텔에서, 레고랜드에서 어림잡아 계산해도 캐릭터 케이크와 짐작해서 그려 본 답례품, 데코레이션 비용만 해도 이백만 원 정도는 훌쩍 넘은 금액이었다. 우리 아이도 무리해서 한다는 게 커다란 패밀리 레스토랑과 키즈카페였는데 그 금액마저 38만 원이 나왔다고 펄쩍 뛰는 신랑이었다. 호텔비를 준데도 안 받고 전부 부담하는 그녀들의 재력이 부러웠다. 같이 끼고 어울리고 싶어도 38만 원이라는 숫자처럼 여기에 머물러 삼팔선처럼 더 나가지도 못하는 우리의 신세가 화날 뿐이었다.
학기가 조금 지나고 나는 아이의 하원 시간마다 간식을 조금씩 챙겨갔다. 유기농 음식으로 이뤄진 유치원 식단은 아이 입맛에 안 맞을 때가 많았고 어린이집에서와 달리 과일 몇 알만 나오는 간식은 아이들에게 후식이라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비싼 수업료와 특강 비, 급식비 어디에도 간식 비는 포함되지 않았다. 놀이터에 남아 자주 보는 엄마들과 인사도 나누고 간식으로 배고픔을 달래고 나눠주다 보면 그다음 날은 몇 개 더 챙겨야지 하는 마음이 들 만큼 봉지는 점점 커졌다.
무엇보다 이도가 끝나면 언제나 일등으로 나와서 자기가 직접 돌아다니며 간식 주는 걸 좋아했다. 나는 이제 막 친해진 아이들에게 그 순간만큼은 아주 적은 돈으로도 아이가 인기인이 된 것처럼 둘러싸여 좋은가보다 생각했다.
"엄마, 오늘은 짜요 요구르트 포! 도! 맛! 포도 야쿠랑 어제 내가 맛있다고 한 초콜릿 과자도 꼭 사 와! 알았지? 알겠지요?"
이럴 때만 꼭 존댓말을 잘 쓴다고 살짝 눈을 흘기며 구박했다가도
"아잉 엄마, 난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이런 아이의 한 마디에 금방 마음이 풀렸다. 나는 아이의 작은 애교에 오늘은 막대 사탕도 같이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 말이라면 한 번도 고민하거나 망설여 본 적이 없었기에 아이의 구체적인 요구도 마냥 예쁘기만 했다.
어느 날부턴가 봉지를 한 손에 들고 간식을 챙겨가는 건 나의 또 다른 일상이 됐다.
"엄마, 왜 빨리 안 왔어? 내가 캥거루처럼 통통통 뛰어 오랬는데. 씨이. 날 계속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이도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화난 표정으로 돌진했다. 선생님의 지도 때문인지 볼멘소리로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꾸벅하긴 했지만 온몸으로 '나 화났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마중 나온 아이의 입술은 코끝을 넘어 내 앞으로까지 쑥 나와 있었다.
"엄마도 일등으로 온 건데 선생님이 너를 좀 늦게 불러 주신 거야. 봐봐, 기다리는 엄마들이 엄청 많지? 오늘 엄마가 뭐뭐 사 왔는지 볼까?"
간식 봉투는 이처럼 나와한 몸이었고 아이가 좋아하는 킨더조이 서퍼라이즈 초콜릿처럼 뭐가 들었는지 상상해 보는 커다란 재미가 있는 즐거움이 있었다.
"선생님 나빠! 울 엄마가 일등인데, 나 아직도 화났어!"
쑥 나온 입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삐져있는 아이에게 나는 적극적으로 화를 풀어주기 위해 방금 마트에서 사 온 간식거리를 보여줬다.
얇은 봉지 안에는 딸기와 바나나 맛, 초코 맛까지 다양한 우유와 지구를 지켜줄 것 같은 '야미얼스' 란 이름마저 아주 건강한 색색의 유기농 사탕 한 봉지가 담겨있었다. 나는 언제나 이도의 작은 손에 봉지 째 간식을 전달해 주는 그 순간이 좋았다. 다른 유치원 엄마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에게 간식을 건네주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내 손에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나눠줄 거야. 내 친구들 한테만."
아이는 잠시나마 선생님이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고 내 눈엔 '나누는 연습'을 매일 하는 것 같아 기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나는 이런 방법으로 교육을 해주는 멋진 엄마야. '
나는 나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싫지 않았고 살짝 올라간 어깨를 굳이 내리지도 않았다.
"야, 나도 줘야지, 우리 아트공예 시간에 만났잖아. 나, 나, 나!"
이도가 손을 뻗어 주기도 전부터 투명한 봉지의 간식을 한번 쓱 훑어보고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난 아이. 지아였다. J가 아닌 G로 시작하는 한국 이름과 영어 이름이 같은 그 아이. 처음 만남부터 뜬금없는 인사와 자기소개를 했던 지아.
어느 날은 내 손에서 받아간 작은 젤리 한 봉지를 손에 꼭 쥔 채 조용히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콩콩 뛰어가는 걸 발견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태도가 이상해서 나도 모르게 작은 아이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러더니 작은 손으로 다 가려지지도 않는 할머니 귀에 대고 뭐라 뭐라 하는데 지아 할머니는 허리춤에 찬 작은 가방을 앞으로 돌렸다. 세상에, 나는 옷차림과 어울리지도 않는 저런 작은 가방이 할머니 허리춤에 있는 줄도 몰랐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그다음 행동을 관찰했다. 손으로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있었지만 내 눈은 힐끔 거리며 그늘 아래 앉아있는 할머니와 작은 다람쥐 같은 지아에게로 온통 향해있었다. 할머니는 지아가 받아온 간식을 조용히, 하지만 재빠르게 작은 가방에 쏙 집어넣었다. 내가 준 사탕이 저장 주머니로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순간, 저 애는 다람쥐 같은 얼굴로 들고 간 간식을 저기에 꾸준히 저장했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동작들이 얼마나 민첩하고 깔끔한지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늘 이도보다 먼저 사탕 껍질을 열어서 쪽쪽 빨아먹는 지아가 이젠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놀이터 안에 있는 다른 엄마의 시선들도 두루 챙겨야 하기에 그날도 자연스럽게 이도 옆에서 부스럭 봉지를 열며 간식을 보여줬다.
"우리 지아 왔구나. 지아야, 너도 이거 하나 먹고 놀까?"
어디선가 간식 먹는 소리만 바스락 나도 재빠르게 달려가는 아이이기에 나는 아무거나 하나 줘서 빨리 보내야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친구가 아니어도 자기에게 인사만 건네는 처음 보는 아이들에게도 간식을 나눠주는 아들 때문에, 나는 곤란한 적이 종종 있었다. 정작 친한 같은 반 아이들의 간식을 챙기지 못했기에, 어쩔 땐 지아가 하나 남은 내 아이의 먹을 것 마저 쌩 하니 가져가서 나는 가방 안에 내 아이와 친한 친구들 몇 명 것을 따로 여분으로 빼놓기도 했다. 어수룩한 그런 이도와 달리 어딘가 또래보다 야무져 보이는 지아는 힙색(이라 불리는 엉덩이에 차는 작은 가방) 사건 이후로 나에겐 경계 대상 1호였다. 요즘 젊은 애들이 차고 다니는 손바닥만 한 지아 할머니의 작은 힙색엔 대체 무엇이 들었을까 그걸 발견한 이후로 쭉 궁금했다. 지아는 이제 더 이상 귀여운 다람쥐가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비둘기처럼 어디선가 나타난 줄도 모르게 스멀스멀 다가와 콕콕 자기가 먹을 걸 찍어내는 비둘기같이 느껴졌다. 자기가 찍은 빵 한 쪼가리를 끝까지 낚아채고 발톱을 세우며 먹이에만 집착하는 작은 비둘기. 음식이 떨어진 곳이라면 우르르 떼로 몰려와 더 없냐며 봉투랑 손 마저 콕콕 쪼아 댈 것 같은 비둘기였다.
"자, 지아는 이거 맛있는 딸기 우유 하나 먹을까?"
미워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따뜻한 목소리로 아이에게 차가운 우유 하나를 건넸다.
"그건 시러요. 흥, 지아는 우유는 싫은데. 뭐뭐 다른 건 없써요?"
놀이터 간식 담당을 하면서 겪은 첫 거절이었다. 주는 대로 먹지, 아니 받은 다음에 언제나 빈 껍질,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한 알까지 나한테 공손하게 가져오면서 할머니 주머니엔 알맹이만 쏙쏙 저장했으면서 내가 모를 줄 알고.
그걸 다른 엄마들도 봤어야 하는데, 나는 우유 하나를 싫다고 한 것뿐인데 할 말 다하는 지아의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살짝 화가 났다. 언제나 웃음으로 답하는 엄마들, 고개를 까딱하는 엄마들, 감사하다고 다가오는 엄마들까지 반응은 다양했지만 간식을 거절하고 새로운 걸 찾는 아이는 처음이었다. 나는 살짝 당황스럽고 화도 났지만 따로 챙겨간 유기농 사탕과 가방 안에 든 곰 젤리는 더더욱 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곰 모양젤리는 그 아이, 지아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 중 하나였다.
"다른 건 뭐지? 어떡하지? 그건 없네. 아아, 지아는 우유를 싫어하는구나. 우리 이도는 엄청 좋아하는데. 여기 봐봐. 이 하얀색 흰 우유 있지? 이도는 키도 크고 이 흰 우유도 엄청 잘 먹어."
그 뒤엔 '너는 맨날 이렇게 간식만 기웃기웃 빼앗아 먹는 비둘기 같아서 키가 작구나'까지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겨우 말을 삼켰다.
"아이, 지아는 우유는 다 싫은데. 그름 아줌마, 이도 아줌마가 나한테 요구르트 좀 사주세요. 거꾸로 요구르트. 그거 거꾸로 모양으로 마시는 건데 엄청 커요. 아, 나 계속 몇 바퀴 뛰었더니 너무 목말라요."
애가 이러는데 이 할머닌 뭐 하나, 나는 주위를 살폈지만 오늘따라 큰 모자를 쓰고 온 지아 할머니는 벤치에서 우아하게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있었다. 아메리카노에선 지금도 따뜻한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곤란한 나는 고개를 살짝 저었고 나에게 처음 거절당한 소리는 이내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더니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줌마, 사주세요. 목말라요. 계속 땀나고 이젠 요구르트 먹고 싶어요. 사줘! 우유는 싫어! 아니믄 뭐뭐 다른 거 진짜 없어?"
이제는 반말까지, 나는 한쪽 미간이 저절로 올라갔다.
"응, 없어. 이제 너네 할머니한테 사달라고 해."
혀 짧은 소리마저 꾸짖고 싶고 막 따지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했다. 나는 표정 관리도 잊은 채 소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거절했다. 으앙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뒤로 하고 얼른 이도를 챙겨 반대편 미끄럼틀로 갔다. 잠시 후, 그제야 우는 지아에게 다가와 아이를 다독이는 할머니를 보자 코웃음이 나왔다.
'아니, 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에 엄마 아빠도 전부 학교 선생님이라면서 집에서 어떻게 가르치는 거야? 제일 부잣집에 사는 애가 여기에서 배를 채워? 간식은 주는 곳곳마다 다 받으면서 감사 인사는 한 번도 안 했지, 으그, 우니까 그제야 좀 돌보려고 오는 건가, 그래, 오늘은 사람들도 저 집안의 진짜 모습을 좀 봐야 돼.'
이런 마음으로 소리가 있는 쪽을 살피는데 지아 할머니의 옆구리에 찬 작은 가방에서 색색깔 알사탕이며 젤리, 초콜릿 여러 개가 나오는 게 보였다.
울음이 터진 아이와 할머니의 작은 가방에, 여기저기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런 작은 가방이 늘 할머니와 한 몸이었단 걸 모르는 엄마들은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할머니 딴에도 근처 눈치를 살피며 자기 손녀 입에만 몰래 쏙 넣어주려 했지만 그러기에 우는 아이 주변에 보는 눈은 너무 많았다. 지아가 그래도 싫다고 울고 드러눕자 할머니는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애기 엄마, 저…."
"네, 지아 할머님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아이가 많이 우나 봐요. 간식을 나눠준 것뿐인데 저한테도 계속 우유가 싫다고 하면서..."
나는 최대한 침착한 말투로 인사도 잊지 않았다.
"아니, 애 엄마, 요구르트나 우리 지아 좋아하는 젤리 진짜 없어요?"
나는 지아 할머니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경악했다.
"네? 무슨... "
"아니, 애기 엄마, 늘 불량 식품 같은 거 잔뜩 넣어가지고 올 때도 내가 봤는데 그럼 좀 아이들 좋아하는 걸 넉넉하게 넣어 오거나, 아님 몸에 좋은 걸 넣어야지. 원..."
"아니 할머님, 지아는 지금껏 저한테 계속 와서 받아가기만 갔어요. 늘! 맛있게 먹었는데 감사하단 인사도 없고요. 그리고 할머님이 계신데 왜 자꾸 저한테 와서 요구르트 타령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이가 놀 땐 옆에서 챙기기도 하셔야죠!"
언제나 내 주위로 비둘기처럼 구구 거리며 몰려들었던 간식 아주머니 부대도 내 편을 들기 시작했다.
"어쩜, 손녀 꺼만 그렇게 챙겨 와서, 우리한텐 한 번도 안 사시더니."
"에휴, 할머님. 무슨 교육자라고 하시면서 늘 우리한테도 지아가 잔뜩 얻어먹기만 했어요. 아주 배 부를 정도로 간식을 얻어먹고 돌아다녔다고요."
"아유, 애들 노는 곳에서 왜 언성을 높이세요, 할머니."
이도 엄마가 참으라며 어깨를 토닥이는 엄마들 사이로 지아 할머니는 조용히 작은 가방을 뒤적뒤적 챙기곤 우는 소리를 야단치지도 않고 조용히 끌고 갔다. 그래도 주변에 몰려드는 아이들에게 양껏 간식을 나눠준 성과라면 성과인 건가, 나는 우르르 떼를 지어 몰려서 내 편을 들어주는 엄마들도 한 덩어리의 비둘기 떼처럼 느껴졌다. 누군가 한 마리가 먼저 음식을 발견하고 콱 물어주길 기다린 것처럼 앞 다투어 내 편을 드는 아줌마 부대. 어슬렁거린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무리 지어 하나로 똘똘 뭉친 비둘기 떼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내 편을 들어준 엄마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긴커녕 다신 우리 아이 간식 따윈 챙기지 말아야겠다고, 아니 이 놀이터에서 하루빨리 빼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집으로 오는데 저 멀리서 지아가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요구르트 아줌마가 보였다. 언제나 나에게 상냥하게 먼저 미소를 건네는 아줌마. 내가 간식을 많이 산다고 오백 원짜리 말고 백팔십 원짜리를 사가라고 내 편이 돼서 친근하게 말해준 아줌마라 늘 마음이 갔다. 우리 요구르트 단골이라며 그날 유통기한이 다한 커피며 얼려 먹는 슈퍼백 봉지 같은 걸 서비스로 주기도 했다. 나는 그 상냥한 아줌마를 붙들고 뭔가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경이 들었다. 그때였다. 이도와 내 앞으로 비둘기 한 떼가 우르르 몰려와서 아까 아이가 바닥에 떨어뜨린 곰젤리 몇 개를 미친 듯이 쪼아대고 있었다. 간식을 나눠 줄 때 이도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을 볼 때마다 비둘기를 닮았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보니 그 아이들과 아줌마 무리도 다를 게 없었다. 지아 할머니처럼 몰래 저장하는 비둘기가 없다는 것만 다를 뿐, 목을 쉼 없이 움직이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위아래로 바쁘게 고개 짓 하는 녀석의 몸부림들은 처절했다. 한걸음 한걸음, 자기 눈알보다 작은 조각들을 먹겠다고 너희들도 대단하구나. 비둘기 떼를 피해 요구르트 전동차가 놓인 사잇길로 지나가는 데 익숙한 아줌마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요구르트 아줌마와 동네 사람들의 말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으휴, 저 비둘기 유치원 아줌마들 아주 대단해."
"뭐가? 비둘기 유치원은 또 뭐야? 뭔데?"
단골손님인 할머니가 요구르트 아줌마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뭐긴 뭐야. 아주 좋다면 다 비둘기 떼처럼 우르르르르 몰려들어서. 나는 그 비둘기들이 너무 떼로 모여 징그럽기만 하구먼."
"아, 그래서 비둘기야? 흐흐. 난 또 뭐라고. 집값이 올라가고 이 근방에 대단지라고, 거기에 유치원 규모도 제일 크잖아. 동네엔 또 그만한 사이즈는 없다지. 다 우르르 몰려서 추첨할 때도 줄 서고 가관이더라고. 다 비둘기 떼로 덤비는 거지, 맞아, 아주 비둘기가 따로 없어."
“저기도 곧 망하겠네, 이제 저기 앞에 생긴 뉴타운으로 된 곳에 또 더 큰 데가 들어온대. 거기 전에 왜, 교도소 부지 있잖아, 거길 갈아엎고 안에 수영장이랑 농구장 시설까지 갖춘 사립학교가 들어온다는데 여긴 이제 나가리 된 거지.”
“뱁새가 황새라더니 여기 엄마들은 또 거기 가려면 꿈도 못 꾸겠지 아마.”
아... 지아는 그렇게 벌써 주소지를 옮겨 놓고 이동한 거구나, 이사할 준비도 마치고 이제 곧 거기로 가는 거구나, 주변에 같이 간식을 얻어먹으며 어울렸던 무리들도, 같은 비둘기 떼로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가진 걸 몰래 주머니에 찬 지아 할머니처럼 결국은 제각기 새우깡을 먼저 낚아채는 갈매기처럼 날아가겠구나. 측은한 비둘기. 뱁새보다 못한 한 때 평화의 그 상징이었던 비둘기들에 화가 났다가도 축 처지고 온통 떼로 몰리느라 까맣게 더러워진 그 뻣뻣한 깃털이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소설이라 생각하고 썼지만 동화로 써보란 권유에 동화로 바꿨지만 여전히 동화 같지는 않아서, 이건 뭘까...
원래 처음 그대로 썼던 걸 다시 꺼냈다.
그냥 모든 장르를 다 떠나서, '비둘기 아줌마'라고 하자. 비둘기는 자기 자신이었는데 그토록 혐오하고 싫어한 대상이 때론 자기 모습이 되기도 한다.
***큰 아이가 유치원에 갔을 때, 놀이터에서 간식을 들고 가면 내 주위로 많은 아이들이 몰렸다. 간식을 나눠주는 시간이 행복했다. 뭐 대단한 걸 나눈 건 아니고 요구르트나 사탕, 과자, 뻥튀기 같은 것들이었다. 뻥튀기나 물젤리를 나눠주기 위해 가위나 긴 종이컵을 따로 챙겨 오는 엄마들도 있었다. 아이들에겐 수업이 끝나고 함께 노는 30분이 정말 귀하구나 느낀 시간이기도 하다. 이런 놀이터에서 경험과 제일 피하고 싶은 (어쩌다 평화의 상징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지만) 비둘기를 합쳐서, 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비둘기가 왜 싫은 동물이 됐는지, 좀 더 파고 들어서 그런 특징을 잡아서 내용과 연결시켜서 써보고 싶다.
놀이터에서 하루종일 있으면서 아이들과 사람들을 관찰한 시간만 진짜일 뿐 이 이야기는 어느 단체나 기관, 지명, 아이들을 그대로 따오지 않았다. 등장인물 이름을 정하기 힘들어서 우리 아이 이름으로 했다가 적당한 이름으로 두 번 정도 바꾸는 작업을 했다. 나도 헷갈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