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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by 앤나우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갑자기 책을 읽고 싶어졌다. 주일에 만난 한밤중 동학(도반) 모임을 다녀오면 언제나 책이 한가득 산처럼 쌓인다. 거기엔 선재가 읽을 책도 내가 읽을 책도 언제나 한가득이다. 집에 돌아온 밤부터 어떤 책을 먼저 읽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이미 빌려오고도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책이 한가득임에도 새로운 책들은 눈을 빛내며 나를 좀 읽어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쌀이며, 밑반찬까지 한가득 한 짐이었다. 우리는 늘 낑낑거리며 책을 들고 내려오는데 반찬까지 턱밑까지 쌓아서 내려올 줄이야. 혜진쌤, 윤하쌤과 서로 반찬통까지 든 모습을 마주 보며 웃었다. 곧 홍콩. 마카오로 여행을 떠나실(이미 떠나셔서 열심히 여행 중이신) 심 선생님께서 냉장고 정리 겸 농사지으신 쌀도 나누고 싶어 하셔서 각자에게 큰 통을 하나씩 챙겨 오라고 하셨다.

와, 책만 많으신 게 아니라 이미 농사지으실 땅도 가지신 분이었구나, 믿는 구석이 지식뿐이 아니었다며 혜진쌤과 농담을 하며 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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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가진 사람은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인줄 모르고 주문하는 경우도 생긴다 (덕분에 내가 선물받은 책도 꽤 된다! ㅎㅎㅎ)






「갈라테이아」와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팬티 바르게 개는 법」을 얼른 읽고 싶었다. 《팬티 개는 법》은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심 선생님께서 너무 재밌다고 감탄하셔서 한 번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혜진쌤이 모르고 주문한 덕분에 한 권 얻게 된 책과 우연히 누군가 잔뜩 버린 책 무더기에 발견한 책도 선물로 받았다. 아주 깨끗했다.


:서찰을 전하는 아이:

겉표지에 이름만 귀여운 글씨체로 써놓고 재밌는 책인데 속은 눈부시도록 하얗고 깨끗했다. 책을 펼쳤을 때 새책 냄새가 풍겼다. 아, 이 책의 주인은 한 번도 안 읽었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난겨울에 혜진쌤한테 이 책을 빌려서 선재와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혜진쌤이 동네에서 버려진 책들 틈에 발견해 준 덕분에 내 손으로 올 수 있었다. 보물을 보는 눈이 또 보물을 발견하는 법! 반갑고 고맙기도 하면서 책 주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왠지 미안하기도 하다. 미안한 만큼 다시 열심히, 선재와 재밌게 읽어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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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양식을 넘어 '몸'의 양식까지! 선생님 댁에서 가져온 반찬으로 밥도 한 끼 든든하게 먹고




그날은 마침 혜진쌤도 나도 군고구마를 쪄와서 간식으로 도란도란 나눠먹었다. 집에 마침 잔칫집 식혜가 4개 있어서 우리 인원수와도 맞고 캔맥주 마시는 기분이 살짝 들까 싶어서 챙겼는데 군고구마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밤고구마/ 호박고구마 모두 달디달았다.


행복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시간, 서로 빌리고 읽은 책, 앞으로 읽을 책 이야기를 마음껏 나누고 그간의 안부도 묻고 반가운 얘기를 나눈다. 우리가 싸간 간식까지 통하는 거 보면 우린 아무래도 '책'으로만 연결된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어젯밤 마지막 책으론 진은영 시인의 시집을 골라서 읽었다. 앞부분 몇 편만 다시 읽어야지 했는데 세월호 이야기가 한가득 담긴 글자를 보는데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울컥하고 그러다 잠이 깼고, 아이들이 모두 잠들어서 간접조명으로 글자를 읽는데 자꾸만 눈이 뿌예지고 있었다. 코를 훌쩍거렸다. 눈물이 났다.


새벽에 눈을 떠서 다시 잠들다가 읽은 시집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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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언어란 무엇일까 밤처럼 깜깜한 새벽에 고요한 중에 찬찬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시집의 제목이 바로 처음 수록된 시 '청혼'의 1연 1행에 나온 구절이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익숙하고 편안하게, 늘 걷고 싶고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사랑하겠다는 이야기일까, 첫 구절부터 마음에 들어온다. 이런 시들은 무조건 끝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다. 느낌이 좋은 첫 구절이다. 빗방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새벽에도 토독토독 비가 오고 있었다.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손바닥을 두들기는 빗소리. 여름은 아니고 겨울을 알리는 비였지만, 비가 오는 것만으로도 이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과거와 미래에도 아첨하지 않는 사랑이란 대체 어떤 사랑일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사랑에 빠져버렸을 때 그 순간에 행복을 느끼고 행복한 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사랑 앞에선 슬프거나 좌절된 일보다 과거의 슬픔과 아픔, 트라우마까지 덮어버릴 거대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이 구절이 좋았던 건 그런 시간보다 과거, 미래에 아첨하지 않는 '현재' 지금 나와 우리의 모습에 집중한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뒤이어 쓴잔을 죄다 마신다는 표현도 경험상 와닿습니다. 그러다 문득 찐하게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게 되네요.(글향작가님)

시의 처음 부분이 좋아서 감성 충만해서 읽다가 마지막 부분이 걸립니다. 한 여자를 위해 슬픔을 죄다 마신다는 표현을 읽으니 사랑하고 시가을 함께 하는 몽글몽글한 핑크빛 감성에 찬물을 끼얹는 느낌이 드네요.(현이작가님)



오늘 아침 함께 글 쓰는 방에도 이 시를 공유했는데 글향 작가님현이 작가님이 청혼의 마지막 구절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여주셨다. '쓴잔'과 '슬픔'이란 구절에서 서로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 것 같았다. 청혼을 할 때 달콤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누군가의 쓴잔을 죄다 마시고 버텨내야 하고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도 포함된 것을 시적화자는 잘 알고 있다. (결혼을 한 우리들도 잘 알고 있다. ㅎㅎㅎ)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청혼을 하는 남자가 화자인가 보다. 인류를 위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단 한 사랑'을 위해 어쨌든 무릎을 꿇고 가겠다는 마음이 갸륵하기도 짠하기도 하다. 그가 마셔야 하는 컵은 슬픔으로 담겨있고 그 슬픔의 형태는 투명한 유리 조각 같다. 나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에 마지막 연이 더 여운이 남고 절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가 아닌 '단 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올 시련과 고난도, 투명 유리조각처럼 빤히 보이지만 전부 마시겠다는 그 사랑이 그래서 더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아, 그래서 제목이 또 청혼이구나.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삼켜버릴 수 있는 청혼.


결혼은 두 사람만의 결합이 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기도 한다. 꼭 자녀를 말하는 것이 아닌 서로의 가족들이 내 가족이 되는 좀 더 큰 범주를 말한다. 그 안에서 크고 작은 갈등도 겪고 한쪽만 일방적으로 참고 참아내기보다 서로가 부딪히고 아파하면서도 조금씩 물러서고 참아야 하는 부분들이 생긴다. 나는 어떤 청혼을 받고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가 떠오른 게 아니라, 나를 위해 참아주고 사랑해 준 배우자의 마음과 반대로 내가 삼켰던 슬픔의 시간들을 생각해 봤다. 뭐 그게 엄청 대단한 게 아니라 해도 시 한 편, 글자에서 시작하는 시의 언어로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회상하고 떠오를 수 있다니 그 자체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좋은 시는 읽고 또 읽어도 그때마다 전혀 다른 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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