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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눈 오는 날은 튀김이지!"

by 앤나우

이 동네에 이사 오고 밤에도 온통 불 꺼진 집들, 캄캄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왠지 낯설었다.

-다들 빨리 자나 봐, 신기하다. 새벽형 사람들인가.

신랑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단지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단지별로 조경에는 엄청 공을 들인 것 같은데 마주치는 사람들도 아이들도 없는 것 같았다. 엄청 큰 공원은 전부 아이들과 내 차지여서 좋긴 했지만 단지 안 놀이터는 방치된 폐허 같았다. 여긴 뭘까?

대단지 안에 유치원과 어린이집, 어딜 가나 시끌시끌 사람 소리가 났던 전에 살던 동네가 한 번씩 떠올랐다. 그리운 감정인지 뭔지는 몰라도 한 번씩 생각하니 지나치게 조용한 이 동네가 더 낯설고 이상했다.


밤만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목도리까지 칭칭 감아 중무장을 한 뒤, 아빠가 퇴근하는 길목 공원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코로나로 답답하던 시기였기에 낮과 밤에 한 번씩 바람을 쐬고 외출을 했는데 온 동네 사람들은 어디로 숨은 것처럼 조용했다.


엄마, 우리가 놀이터도, 공원도 전부 다 차지한 것 같아!

큰 아이는 신이 나서 더 뛰어다녔고 이제 막 뛰어다니기 시작한 둘째는 그런 형을 발발발 따라다녔다. 서울보다 더 춥고 조용한 일산의 겨울이었다.


그때 눈이 왔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 겨울, 차갑고 건조한 공기부터 모두 싫어하는 계절인데 세상에, 이곳 겨울은


Amazing!!


함박눈이 끊이지 않고 펑펑 오는데 죄다 오래된 나무뿐이어서 그런지 어제와 다른 세상으로 변신했다. 아, 눈이 내린 풍경이 이렇게 다른 세상으로 보이기도 하는구나, 한참 넋을 잃고 바라봤다. 나는 겨울도 눈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렇게 오랜 시간 눈 내리는 걸 쳐다본 적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겨울엔 트리를 사지 말고 눈이 오는 날 아이들과 이렇게 밖에 나와서 자연이 선물해 준 '눈 트리'를 구경해야겠다, 이런 (*이상한) 다짐을 속으로 하기도 했다.


Let it go~ 노래가 절로 나오는 풍경의 연속, 손끝부터 시리게 추웠지만(여기는 서울보다 1,2도 정도 기온이 낮고 더 추웠다) 자꾸만 주방에서도 베란다에서도 창밖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손끝에 닿을 것 같은, 소나무 가지 위에 잔뜩 쌓인 눈을 만져보기 위해 창문을 열기도 했다.


겨울이 아니라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일산의 겨울 풍경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함박눈이 내리는 동네 풍경에 매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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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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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펑펑 내린 흰 눈을 보는 아가의 표정은





온 세상이 갑자기 하얗게 '눈 세상'이 된 걸 바라보는 아가의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신기했다. 낯설어하다, 찡그렸다 뭔가 어색해하다가도 이내 눈을 빛내며 그 안에서 만지고 눈 속에서 뒹굴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사실은 모두 마음속으론 하늘에서 내려준 하얀 가루 같은 솜뭉치 같은 눈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나도 외가댁이 통리라 태백 근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통리역에 내릴 때마다 이렇게 엄청난 눈을 봤다. 하지만 너무 어린 시절이라 잘 기억나진 않는데 아마도 눈길을 걷다가 아빠 허벅지정도 높이의 눈 속에 폭 빠진 경험도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얼른 나를 꺼내서 언니랑 나를 양팔로 번쩍 안아서 눈길을 헤치고 걸어갔다. 세상이 온통 하얗고 뿌옇고 아빠 안경은 더 뿌옇게 서리가 한가득이었지만 푹푹 빠지는 눈을 거침없이 헤치고 우리는 할머니 댁으로 걷고 또 걸어갔다. 아마도 안겨있던 그때 내 나이가 눈을 처음 봤던 저 두 살 무렵 선율이 표정 같지 않았을까. 두려우면서도 신기한 표정, 아이의 표정에서 또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한 꼭지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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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수록 빠져드는 눈사람 메이커 (전부 내가 만든;;;;)













올 1월에도 그렇게 펑펑 내리는 눈을 맞이해서 밖에서 실컷 놀고 아이들과 거실 창문을 통해 눈 풍경을 보고 있는데 선재가 말했다.




엄마 눈을 보니까 튀김가루 같아,
소나무 가지에 얇게 붙어있는 튀김가루!



형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갑자기 튀김을 만들어달라는 둘째 아이, 읭?! ㅋㅋㅋ


눈이 오는 날엔 튀김을 먹어야 한다는 아이들 성화에 마침 냉동실에 넣어둔 튀김세트를 에어프라이에 돌리고 떡볶이도 만들어서 먹었다. 사실 엄마도 비슷한 걸 떠올리고 있었거든. 튀김가루는 최소한 붙어있는 아주 바삭바삭한 깻잎 튀김!

(나는야, 밀키트 에어프라이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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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이 이렇게도 잘 나오다니! 두번째는 실패했지만 맛있었던 김치전 (모두 함박눈이 내리는 날마다 먹었던 메뉴다)






소복소복 바사삭 튀김가루처럼 나뭇잎에 앉은 눈송이들 덕분에 아이들과 꿀맛 같은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겨울 방학은 길고 길었지만 눈송이에서 튀김을 떠올려준 큰 아이 덕분에 눈이 오면 우리는 김치전도 구워 먹고 고구마나 애호박전도 해 먹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답게 사실 눈과 전혀 상관없이, 먹고 싶은 걸 먹은 걸 수도 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함박눈이 오면, 그때도 엄마가 해준 (사실 내가 한건 아니지만;;;) 함께 먹었던 이런 음식들을 떠올려주면 행복할 것 같다.


사실은 펑펑 내린 함박눈 하나로도 이 동네에 정이 붙기 시작하고 마음이 열린 것처럼 사소하고 자연스러운 변화들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열쇠가 될 때도 있다. 눈은 세상을 덮어주고 그 자체로 전혀 다른 풍경을 선물해주기도 하지만 자꾸만 뭉쳐서 어딘가로 던지고 싶고 직접 만져볼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인 것 같다. 옛날, 눈덩이 속에 폭 빠졌을 때 나를 꺼내준 우리 아빠처럼 무섭고 두려운 세상 속에서도 같이 손 잡아주는 누군가가 자꾸만 떠오르는 날이다.


#함박눈

#눈오는날은튀김

#몹쓸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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