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랑 나 그리고 언니
칭찬에 목마른 아이 었다. 누군가, 잘한다! 최고네! 잘했어. 이렇게 한 마디 해주면 그게 나를 인정해주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엄마나 아빠가 칭찬을 많이 해주지 않은 편이었나, 생각해보니 한 살 터울 언니가 매 학년마다 거의 올백을 받았고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았기에 내가 7,8개만 틀려도 공부를 못한다고 혼나거나 구박을 받은 기억이 난다. 4과목에 그렇게 많이 틀린 점수가 아니었음에도 자랑하려고 들고 간 시험지는 언제나 긴장과 야단으로 내 손에서 축축하게 쭈굴쭈굴 젖어있었다. 예쁘다는 말, 잘한다는 말이 늘 고팠던 아이. 그래서 내 또래가 아닌 다른 주변 어른들에게 말을 걸어서 칭찬을 받거나 인정을 받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 앞에서 칭찬을 해주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겐 내 칭찬과 자랑을 많이 하고 다녔다고 한다. 나중에 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동생 보미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엄마가? 진짜?’ 근데 왜 나한테는 한 번도 제대로 마음껏 칭찬해주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도 자라오면서 칭찬을 잘 못 받고 커왔던 건 아닐까. 부모님은 일하고 사느라, 아래로 3명이나 더 있는 남동생까지 챙기랴 엄마는 거기에 장녀 역할까지 누가 칭찬이 아닌 해야 할 것만 후다닥 해야 하는 위치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키우고 음식을 하면서도 한 번도 일을 쉬지 않았던 엄마, 아래로 줄줄이 남동생 셋을 전부 우리 집에서 키우고 살피며 장가까지 보낸 엄마에게 언니와 나는 ‘소중한 딸’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걸 표현해줄 아주 작은 용기와 여유는 늘 없으셨던 것 같다. 지금 떠올려보면 우리 언니도 딱히 칭찬을 많이 받았던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모든 걸 나보다 잘했기에 덜 혼나고, 내가 혼날 때 언니는 야단 대신 소파에 앉아서 과일을 먹거나 다른 보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모든 게 어린 마음에 분명한 차별과 상처가 돼서 꽂혔다.
어느 날은 엄마가 너무 미워서 일기장이 아닌 엄마가 사준 기다란 빨간색 지갑에 엄마 욕을 잔뜩 써 났다. 욕을 써놓는 것만으로도 화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언젠가 이런 걸 발견하고, 깜짝 놀라시겠지,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고 가슴 아파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튼튼한 가죽 지갑이 온갖 욕으로 너덜너덜 걸레보다 못하게 됐다. 그걸 왜 버리지 않고 침대 아래 기다란 서랍에 다시 담아뒀는지 모르겠다. 내 일기장과 몇몇 감추고 싶은 시험지, 읽다만 소설책 같은 걸 던져두는 엉망진창 나만의 보물 쓰레기통(?) 서랍이었는데 아마도 엄마가 중학생 된 이후에는 내 방을 청소해주지 않았기에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걸 진짜 쓰레기통에 버릴 용기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지갑을 가지고 싶었던 물건이기에 엄마에게 조르고 졸라서, 선물로 받았을 때 정말 좋았으니까. 나중에 욕으로 뒤덮인 지갑을 발견하고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웃었던 것도 같고.
욕으로 가득 찬 그 글자들은 엄마에게 우연히 발각됐고 엄마는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길에서 통화한 기억이 나는 걸 보니(핸드폰을 처음으로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대학생 때까지 안 버린 모양이다. 화를 내지도 않고 이게 뭐냐면서 웃으셨던 엄마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엄마의 반응에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이제 다 큰 딸에게 어쩌면 매질할 수도 없고 화를 내도 소용없다는 걸 아셔서 그랬을까. 엄마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너는 엄마가 이렇게 미웠구나. 엄마가 진짜 이렇게 미웠어?
질문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떨렸고 웃고 있었다.
영국에 사는 언니에게 처음 놀러 갔을 때 언니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여러 장의 편지 묶음을 보게 됐다. 거기엔 익숙한 글씨, 하지만 내용은 내가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절절한 엄마의 사랑 편지가 숨어있었다. 사랑하는 내 딸아, 로 시작하는 엄마의 편지는 몇 장 가득 빼곡한 글자가 가득했고 거기엔 엄마가 언니를 얼마만큼 생각하는지, 언니가 떠난 빈자리가 얼마나 그리운지, 고맙고 든든한 딸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나에겐 단 한 장도 안 써준 편지를 엄마가 이토록 용기 내서 쓴 이유는 뭘까, 8854km나 되는 어마어마한 거리, 비행기로만 10시간도 넘게 날아가야 하는 그 거리만큼 딸이 절절하게 보고 싶고 그리웠던 거구나, 엄마는 편지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거구나, 읽으면서 질투 어린 마음, 엄마의 그리움, 긴 시간 타지에서 고생했을 언니의 외로움까지 우리 세 모녀가 각자의 장소에 떨어져 지냈던 저마다의 시간이 그 편지 한 장에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서 눈물이 펑펑 났다. 이상하게도 내가 좋은 옷을 선물 받으면 엄마는 늘
그건 나영이한테 더 잘 어울리겠다. 나영인 키가 크잖아.
무슨 소리야? 이건 주연이가 내 생일 선물로 나 입으라고 사준 옷이야!
그래? 엄마는 나영이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럼 주연이한테 따로 하나 더 주문해 달라고 해. 엄마가 돈 줄게.
엄마는 내가 화장품을 사거나 가방, 심지어 고급 빗을 사도 나영이, 나영이만 찾았다. 머리가 잘 빗겨지는 고급 빗이라 엄마에게 선물했는데 언니를 준다고 바로 챙겨 넣은 상자엔 이미 비슷하게 생긴 빗들이 4, 5개 그득그득했다.
내 건? 나는 그동안 하나도 안 챙겨주고?
너는 딸이 없잖니. 그 집엔 딸만 세 명에다가, 나영이도 늘 머리를 기르고.
결국 씩씩 거리다가 내 빗은 엄마한테 전달하지 않고 그대로 가방 안에 꽁꽁 넣어왔다. 주변에 이런 이야기를 속상해서 말하면 선하고 좋은 친구들이라 언니를 생각해서 물건을 보내 주거나, 언니한테 양보하라고, 엄마 입장에서도 내 친구들 입장에서도 아이 넷을 키우며 타지에서 사는 언니가 이토록 안쓰러운 거구나 느낄 수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마음의 숙제처럼 나만 엄마에게 내내 삐져있고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철부지 딸이었다. 그래, 이건 언니에게 서운한 것도 질투의 감정도 아닌 ‘똑같지’ 않은 엄마의 태도 문제야! 항상 이런 식으로 결론짓게 되는 마음의 고리들.
나경아, 넌 너네 언니가 안쓰럽지도 않니. 오죽하면 엄마가 그러겠어. 넌 친구들도 자유롭게 만나고 네가 사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다 누리고 사는데 나영이는 늘 아이들이 먼저잖아.
엄마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그건 사실이다. 나도 언니의 삶을 옆에서 같이 살아보니 우리 언니는 진짜 5분을 앉아서 쉴 시간도 없이 바삐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청소하고 그것만 하는데도 하루해가 다 가고 어쩌다 시간이 생기면 그 5분을 앉아서 성경책을 보고 기도를 했다. 아이넷과 6 식구 대가족의 빨래는 하루 두 번 세탁기가 돌아갔고 청소기도 아침저녁으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나중엔 나도 빨래를 개다가 ‘아 몰라! 각자 빨래며 양말을 다 찾아가라고 해!’ 빨래 지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아이들 빨래가 거실에 널브러진 적 없게 바로바로 열심히 옷을 갠 언니. 착착착 저마다의 옷이 각자 서랍에 재빠르게 들어갔다. 어쩌다가 더 긴 시간이 생기면 교회 사람들과 봉사활동을 다녔다. 어쩌면 저렇게 살 수 있을까 감탄스러운 삶. 아이를 재우다가 항상 언니가 먼저 코 골고 잘 수밖에 없는 고단한 하루, 그 하루하루를 견뎌낸 우리 언니가 대견했고 짠했고 나 역시 안쓰러웠다.
이건 뭐, 근데 불평이랄 것도 불평할 수도 없어. 내가 전부 선택한 거고 내가 이렇게 많이 낳기로 결정한 거니까. 누굴 탓하고 원망할 수도 없고. 그냥 나는 이렇게 살아.
언니네 집에 간 첫날 우리는 밤새 수다를 떨었는데 언니는 이런 말을 해줬다. 자기가 선택하고 계획하고 결정했음에도 늘 그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고 난 매번 욕하고 짜증을 냈는데 그럼 안 되는 건가, 난 어땠지를 생각해 봤다.
그냥, 엄마한테 고마워. 내 동생을 낳아줘서. 우리가 이렇게 몇 년 만에 봐도 밤새 재잘거릴 수 있잖아. 있지, 우리 딸들이 특히 예니랑 예아가 터울이 별로 없어 그런가, 점점 자라면서 투닥거리면서도 둘이 엄청 잘 노는데 난 그때마다 너랑 내가 생각나더라고.
나도 언니가 있었기에 의지되고 힘이 되는 순간이 정말 많았다. 인형놀이를 해도 제일 예쁜 애를 골라서 해도 언니 친구들은 도끼눈을 해도 언니는 항상 ‘나경이 먼저’를 외쳤다. 나는 신나서 즐거웠고 선생님 놀이 시간엔 언니가 선생님 역할을 해줘서 밥으로 나오는 죠리퐁이랑 과자들은 늘 보미랑 내가 더 많이 먹을 수 있었다.(선생님은 늘 밥상을 차려서 아이들에게 급식으로 주기만 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양보하고 보살펴주고, 언니 모든 생일 파티 사진엔 내가 언니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데 옆에 다른 언니 오빠들이 나를 째려보고 노려봐도 개의치 않고 혼자 당당히 케이크 칼을 잡고 있는 내 모습, 그 뒤로 환하게 웃고 있는 우리 언니, 엄마도 그런 언니를 알았기에 더 안쓰러웠던 건 아닐까. 엄마에게 편지는 못 받았지만 언니가 나에게 이미 차고 넘치게 사랑스러운 편지를 끊임없이 보내주고 있었다. 사랑은 받은 만큼 흘러가고 흘러간 사랑이 또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머나먼 영국에서 돈이 없어서 밥 대신 제일 싼 칩스 과자만 사 먹고 살이 왕창 쪘을 때도 언니는 돈을 아껴 나에게 전화했다. 국제 전화로 잠깐 통화했지만 나와 가고 싶은 곳, 나랑 먹고 싶은 음식을 이야기했다. 용돈까지 아끼고 아껴서 소포를 보내면서는 나에게 작은 카드, 긴 편지를 언제나 넣었다.
내 사랑스러운 동생 나경이, 나경아, 네가 내 동생인 게 정말 자랑스러워.
사랑해 나경아,
나와는 다르지만 또 네가 있어서 언제나 든든하고 고마워.
언니의 손글씨에는 사랑이 넘쳐나고 흘러나왔다. 예찬이 방보다도 더 작은 단칸방에 친구 한 명과 2층 침대를 놓고 살아야 했어도 집세가 200만 원 가까이 돼서 청소 알바며, 새벽 알바를 했어야 해도 언니는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 기도해줬다.
새벽마다 지금도 기도해. 우리 아이들, 신랑을 기도가 아니라 내가 제일 먼저 기도한 게 언제나 너야.
이런 사랑을 받고 자랐는데 어쩌면 넘어지고 분노하고 쓰러져서 울 때도 나를 일으켜준 기도들 덕분에 혼자가 아니었던 거구나,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단 한 번도 편지에 엄마,라고 시작한 적이 없다. 늘 어머니께. 울 어머님 보세요. 평소에 쓰지 않는 말로 거창하게 존대를 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늘 내 글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엄마를 실망시켜주기 싫기도 했고 정신없는 내 속마음을 다 보여주는 편지가 엄마에게도 상처가 될까 봐,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유년기 기억이 그랬기에 아이들에게 크게 반응하는 엄마가 됐다. 아이의 작은 거 하나에도 진심을 다해 칭찬하고 아이가 나에게 작은 걸 가져다줬을 때도 고맙다고 반응했다. 상담을 하면서 알았다. ‘칭찬’은 오히려 자라는 아이들에게 독이라고. 칭찬이 독? 나는 늘 목마르고 받고 싶었던 칭찬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상황을 말해주면 됩니다. 뭘 그렸으면 이걸 그렸네. 이런 걸 했구나. 백점을 맞았더라도 아구, 너한텐 이번 문제가 쉬웠구나. 다음에 더 어려운 걸 도전해보자.
칭찬 한 마디에 인정받고 어른에게 맞추려는 욕구가 강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야기, 칭찬을 끊어내고 무덤덤하게 있는 상황을 말해주는 게 나에게 이토록 힘든 일인 지 몰랐다.
그럼 칭찬을 하고 싶어지면 어떻게 하죠? 제 사랑 표현은 언제나 칭찬이었는데요.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무슨 일이 없어도 평소에 이유 없이 사랑해,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세요. 오늘 학교에서 시간을 잘 보내고 와줘서 고마워, 덕분에 엄마도 쉬고 엄마만의 시간을 잘 가졌어. 안아줄까? 엄마가 꽉 안아줄게! 시도 때도 없이, 언제나, 그러고 싶을 때마다 사랑을 표현하세요.
아, 칭찬만이 사랑을 표현하는 길이 아니구나. 나도 상담을 다니고 그 말에 위로받고 내 행동을 조금씩 고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가만히 있는데도 사랑을 표현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평소에 이렇게 작은 아이인 내 아이들 조차 예쁘게 웃고, 내 기분을 맞춰주고 뭔가를 잘해야 내가 사랑을 표현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칭찬에 목마른 나 자신도 어쩌면 뭔가를 잘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나’를 꽉 안아주길 원했던 건데.
공감이란 것도 결국 말이 차지하는 거는 10%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나머지 90%가량은 그럼 결국 비언어적 표현인데 너무 아팠겠다, 슬펐겠다 표정으로 일그러뜨리고 크게 보여주는 것, 쓰담 쓰담해주는 행위, 꽉 안아줘서 토닥토닥해주는 손길,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는 그 모든 게 사실상 공감하고 있는 그 자체, 마음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설명충처럼 설명에만 혈안 되고 말로만 나열하고 쫘르르 말로 해줘야 그게 ‘사랑’의 실체인 줄 알았건만 내가 알던 모든 건 사실 내 안에 갇혀있는 나의 콤플렉스, 편견일 수도 있구나 깨달았다. 말로 해주긴 뭐 쉽지, 영혼이 없는 말로 잘했구나, 사랑한다, 네가 최고야 하는 것보다 어깨를 툭툭 쳐주고 엄지를 강하게 척척 웃으며 보여준 행동이 더 의미 있는 것처럼 내가 받고 싶었던 것 역시 어쩌면 후자에 있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교회 수련회 때 우리 엄마보다 나를 더 꽉 끌어안고 신금복 권사님께서 울면서 기도를 해주셨는데 어린 나는 기도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지만 나를 안아주고 그냥 하염없이 울고 기도하는 그 포옹이 참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추운 겨울에도 코끼리 밥통에 따뜻한 물을 넣었다 다시 버리고 따뜻한 국물 싸주셨던 엄마, 내가 조금이라도 따뜻한 국물을 먹길 원했기에 날마다 다양한 음식과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챙겨주셨던 엄마의 도시락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사실 엄마는 나에게 칭찬과 사랑해란 말도 없으셨지만 언어는 말만 있는 게 아니기에 그 외에 모든 행동과 온 마음을 나를 사랑하고 계셨구나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처럼 아니, 형은 모든 걸 탕진하고 돌아왔는데 왜 형만 예뻐하냐고 따지는 동생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이 모든 게 이미 네 것이지 않냐고’ 나는 어쩌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주말마다 엄마 요리와 반찬과 모든 걸 누리고 맛보고 양손 무겁게 늘 싸오고 있는데 엄마의 편지는 나에게 글자가 아닌 다른 형태로 내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말로 전부를 표현하지 않으셨을 뿐 이미 그 모든 것 이상을 채워준 우리 엄마, 열심히, 언니보다 더 바삐 살아오면서도 불평보다는 언니와 나에게 더 좋은걸 먹이고 입히길 궁리하셨던 엄마, 지금은 영국에 있는 손주 4명과 우리 집 2명 아이들, 총 6명의 아가들 것까지 챙기기 바쁘시다. 그런 와중에 편찮으신 영주 할머니도 꼬박꼬박 뵈러 가고. 삼촌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병원비도 전부 엄마의 지갑에서 나갔다.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고 열심히 일해서 그 모든 걸 전부 가족에게 돌리는 것에 한 푼도 아까워할 새가 없는 우리 엄마에게 난 한 번도 진심으로 편지 써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철없는 내 속마음도 꺼내고 엄마에게 대한 사과와 사랑의 편지를 더 늦지 않게 보내야겠다.
P.S 엄마, 우리 엄마! 부르기만 해도 먼저 편안하게 웃게 되는 엄마, 사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데 하나도 공감이 가지 않더라. 울보인 내가 눈물도 안나더라고. 우리 엄마 같지가 않아서. 엄마는 공감이 좀 됐어? 그렇게 온전히 희생하고 자식만 생각하는 엄마가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옛이야기 같기도 하고. 나는 늘 좋은 거, 맛있는 거 재미난 거 엄마랑도 같이 보러 다니고 싶었는데 엄마는 늘 일하고 쉬는 시간도 없고 피곤하니까, 나랑은 그런데 다닐 시간도 없었지. 사실은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살아준 덕분에 내가 재밌는 걸 더 많이 누리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세상을 여유 있게 볼 수 있었던 건데 말이야. 미안해 엄마. 불평만 하고 사과만 요구한 딸이라서, 좀 더 느슨하게, 고마움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기 전에 엄마에게 삐진 마음, 엉킨 마음을 풀기보다 뾰족하게 예민하게 날을 세웠어. 미안해. 엄마.
뜸부기 오빠란 글을 필사하는데 엄마가 생각나더라고. 엄마는 실제로 오빠가 없지만 진짜 뜸북새 동요 가사처럼 오빠가 돌아오는 날 말 타고 비단 구두 사 가지고 어린 정남이에게 선물도 하고 잔뜩 좋은 물건 받을 줄 알고 기대했다고 했는데. 그냥 무심코 들었던 말이, 다시 글로 써보니 엄마가 참 어린 나이에 어린 남동생 3명을 다 책임지고 장녀의 어깨가 무거웠겠구나. 삼촌들 클 때까지 서울에서 다 데리고 살고 장가 장가 장가 세 번 다 보내고 우리 엄마 여장부가 따로 없네 싶었어. 사랑 표현이 더디다고 생각한 엄마가 할아버지 요양원에서 할아버지 늘 꼭 끌어안고 사랑해요, 아빠, 우리 천국에서 꼭 만나요 하는데 그때 나도 임서방도 참 많이 울었어. 할아버지가 나 아들 셋 낳을 거라고 했는데 선재만 보고 돌아가셨네. 선율이가 아들 두 몫은 하니까 셋째는 절대 안 낳을라고. ㅋㅋ걱정하지 마, 엄마!
엄마, 난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참 엄마가 좋더라. 아빠랑 엄마랑 비교해도 엄마가 늘 좋았어.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도 예쁘고 잘 꾸미고 그래서 아빠 닮았다고 사람들이 나한테 말할 때마다 화도 나고 엉엉 울기도 했잖아. 아빠가 당황해서 나를 불러서 혼낸 적도 있거든. 아빠 닮았다는 말이 그렇게도 싫냐고 하고. 엄마는 마냥 나를 어리고 철없게만 봤지만 나는 사실 속이 엄청 복잡하고 꼬마 철학자처럼 온갖 생각을 다 품고 다니는 아이 었어. 그런 나를 늘 책 읽을 수 있게 내 방을 책으로 가득 채워주고 닦달하지 않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엄마. 뜸부기 오빠는 없지만, 내가 엄마의 돌아오지 않는, 없는 오빠 대신 엄마 곁에 있는 딸이 돼줄게.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여전히 철이 들고 있는 중이지만 엄마의 사랑의 언어를 많이 먹고 자란 딸이라 그런지 내면이 그래도 날마다 더 단단해지고 있어.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라는 이름을 백번을 부를까 말까 한 사람들도 있더라. 나랑 친한 선주 언니는 엄마가 얼굴도 기억이 안 날, 선율이 보다 더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하고 선율이네 반 이준이도 이제 갓 4살이 되자마자 엄마가 돌아가셨어. 그 아이가 나를 보고 엄마엄마, 하는데 왠지 마음이 찡하더라. 나의 질풍노도 성장기에, 지금까지 엄마의 그늘이 아빠의 그늘이 나를 지켜주고 다독여주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비빌 언덕이 돼주었구나. 고마워, 엄마, 엄마에게 복수하려고 쓴 욕으로 뒤덮인 지갑도 정말 미안해. 말도 안 되는 걸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웃으면서 그 얘기를 꺼내 주는데 이미 내가 진걸 알았어. 엄마는 나보다 날 더 품어주고 기다려준 사람이란 걸 이미 그때 알았는지도 몰라. 언니를 낳아줘서 고맙고 함께 자라나게 해 줘서 고마워. 우리 언니처럼 천사 같은 언니도 세상에 없단 걸 알았어. 내가 울고 눈물 흘리고 쓰러질 때마다 날 일으켜준 게 우리 가족이란 걸 잘 알아. 언제나 알고 있었지만 나 역시 표현하지 못하면서 표현받기만 바랐던 것 같아. 이번 엄마 음력 생일은 크리스마스더라. 언니도 영국에서 온다고 하고 엄마 생일을 몇 년 만에 또 함께 보낼 수 있어 영광이야. 우리 좋은 시간 보내자, 예수님 생일도 축하하고 예수님이 보내주신 엄마 생일도 축하하고. 재잘재잘 계속 떠들고, 다투고, 서운한 것도 계속 이야기하고 그래도 우리 손 꼭 붙들고 있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