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행복이 있다
설 연휴에 친정엄마를 모시고 외할머니가 계시는 영주 서릿골 마을에 갔다. 고맙게도 신랑이 긴긴 연휴에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댁에 가서 며칠 따뜻한 아랫목에서 온 식구가 모여 잠도 자고 영주 근처도 한 번 둘러보고 장모님도 길게 쉬시니까 오랜만에 다 함께 가자고 제안해 준 것이다.
긴 시간 운전이 지칠 법도 하고 전부 처갓집 식구들이라 불편할 것도 같은데 시골 출신(?) 신랑은 나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고 옛날 집에서 잠도 잘 자고 무엇보다 우리 엄마와 할머니 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ㅎㅎㅎ
특히 할머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는 언제나 최고라며, 속이 제일 편한 음식, 삼시 세끼 된장찌개만으로도 밥을 먹을 수 있겠다고 한다. 할머니께선 힘든 몸을 일으켜서 손녀사위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며 지짐이까지 정성스레 준비해 주셨다. 도착한 첫날 함께 모여 저녁도 먹고 막둥이 선율이의 애교도 보면서 따땃한 아랫목에서 뻥튀기, 감, 사과, 한과 같은 간식을 쉬지 않고 먹었다.
내가 영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은 부석사와 소수서원인데 요즘에는 무섬다리가 있는 무섬마을도 하나 더 추가됐다. 4년 전 여름에 왔다가 찰랑찰랑 물이 닿을랑 말랑한 공포의 외나무다리(?)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기 때문이다. 외나무다리는 말 그대로 다리가 길쭉하니 얇아서 중간에 마주쳐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한 사람이 한쪽에 잠시 대기해 주는 기다려주는 (나무 벤치같이 생긴) 짧은 버팀목이 곳곳에 있는데(*이것도 무슨 명칭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참 불편했겠다 싶으면서도 막상 그곳에서 기다려보면 누군가 먼저 건너가라고 양보해 주고 기다리는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싫지만은 않다는 걸 곧 알게 된다. 오히려 잠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사람들을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와 아이들을 위해 기다려주고 일부로 돌아가주는 고마운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 누군가를 기다려주면서 뿌듯한 마음이 살짝 들기도 했다. 기다린 김에 쉬어간다, 기다리면서 둘러보는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설 연휴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살짝 어지러울 수 있다. 생각보다 높이감이 있고 걷다 보면 길이 너무 좁아서 아찔하기도 하다. 신랑이 고소공포증이라 몇 번 심호흡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간중간 웅덩이처럼 물이 고인 곳에 발도 시원하게 담그고 아이들은 아예 온몸을 푹 담그고 수영하기도 했다.
《나는 solo》라는 신랑의 최애 프로그램에도 이 무섬다리가 나와서 반가웠다. 무섬마을에서 한옥민박을 하고 무섬다리를 건너는 데이트를 즐기는 코스였던 것 같은데, 제대로 안 봐서 모르겠지만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손을 잡아주다 보면 없던 썸이 혹시 생기지 않았을까? ㅎㅎ 그 반대로, 밖으로 밀어버릴 수도 있다. ㅎㅎㅎ
인생은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묘미가 있으니까.
설 연휴 중반쯤 우리 식구들은 경상북도, 예천 용문사로 향하고 있었다. 아템포님이 추천해 준 소백산 하늘자락 전망대도 가고 용문사 가는 길에 『미스터 션샤인』촬영지로도 많이 알려진 초간정에도 들릴 예정이었다.
나는 절 주변을 산책하거나 성당 성지순례를 좋아하는데 내가 다니는 교회도 가끔 산자락이나 넓은 평원에 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상상을 하면서 한 번씩 웃는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와 또 다른 경건한 마음이 드는 장소에 갈 때마다 마음은 차분해지고 발걸음이 가볍다. 아무튼, 이런 기세로운 출발과 달리 산중턱에 다다랐을 때부터 아뿔싸! 눈방울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입체적으로 점점 커지면서 눈앞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굵은 눈발을 보며 신랑과 나는 와, 3D영화가 따로 없다며 감탄하며 웃다가 아침에 예천에 폭설예보, 대설 주의보가 있었는데 이건 올라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차가 미끄러지면 어쩌지, 덜컥 걱정이 됐다. 아이들이 실컷 뛰놀 수 있는 하늘자락 전망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기에 이미 눈이 쌓이기 시작한 입구가 막혀있었다. 사실 입구가 아니라 산자락에 있는 공용 화장실부터 막아버린다는 진실, 두둥! 볼일이 급한 사람들이라면 절대 대설주의보가 있을 때 용문사로 오르지 마시길...
결국 겨우겨우 용문사 입구에 다다랐을 때 우리 가족은 대설주의보 한가운데 덩그러니 갇혀있는 신세가 됐다.
아, 소백산 하늘자락 전망대가 폭설로 막혀 아쉬운 마음에 향한 다음 코스, 용문사에서도 입구에서 돌아와야 하다니. 여길 또 언제 와볼 수 있을까, 할머니가 계신 곳이니 또 언젠가 올해 가기 전에 여름에도 휴가로 꼭 들리는 곳이니 올 수 있지만 이렇게 눈앞에 오고 싶은 곳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 바로 코 앞인데 놓쳤다는 생각, 그 생각만 하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계획이 어그러지는 순간.
하지만 이제 점점 쌓이는 눈발은 이대로라면 곧 내려가는 산길은 미끌미끌을 넘어서 꽝꽝 얼 것 같았고 산 중턱에선 돌아가는 발길을 서둘러야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평소라면 아쉽고 짜증이 울컥 올라올 만도 한데 새하얀 설경이 나를 전혀 다른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 준 기분이 들어서일까, 내리는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차분해지고 신기한 세상으로 온 기분이 들게 했다. 신랑과 나는 동시에 짠 듯, 웅장한 입구에서 잠시만, 하면서 잠깐 내리기로 했는데 이럴 땐 또 잘 통한다! 우리는 내리는 순간 와! 차 안에서 본 것과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적막강산에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눈이 내리는 소리만 펑펑 들리는 것 같은 조용한 산속, 흰 눈과 대조되는 화려한 색의 단청도 멋있고. 비록 발만 담그고 입구컷으로 그 앞에 길이 막혀 돌아와야 했지만 이런 경험을 또 언제 해볼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맞아, 이번뿐이 아니지. 우리 가족이 야심 차게 준비한 대관령 양 떼 목장 여행 때도 작은애가 같은 반에서 활동하고 밥 먹는 아이 중에 코로나가 나왔다며 다 도착해서야 다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코로나 초반 시기라 자가격리 대상자 중에 '밀접 접촉자' 위험군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때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우리는 오는 휴게소 길목에서 코를 찔러서 코로나 검사를 하는 "드라이브 쓰루 검사 장소"를 열심히 찾았고(이런 곳도 진짜 있었다!!) 함께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돌아가야 하는 길 모든 곳에 사실은 우리 가족이 함께 했다는 그 사실 하나가 어쩌면 나를, 우리를 웃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펑펑 내리는 눈처럼.
계획이 어그러져도, 좀 막혔어도 행복은 어디에나 있다. 이렇게 펑펑 내리는 눈처럼 도처에 깔린 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내가 가려는 목적지, 방향은 잃었지만 뜻하지 않은 (어느 정도는 살짝;; 예상 가능했던) 폭설로 좌절됐지만 아쉬운 마음보다 멋진 풍경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아이들과 함께 본 모아나가 말한 다른 길이 이런 걸까?! 길이 막혔다고 생각해도 거기서도 뭔가 돌아볼 곳이 있고 갈 데는 어디든 있었다. 코로나 자가격리 밀접 접촉자로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사실 그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기에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최고로 멋진 코스로 드라이브를 하기로 결심했던 건지도 모른다. 문이 잠긴 초간정이었지만 눈 쌓인 흔들 다리도 건너고 초간정 앞에서 작은 눈사람도 만들었다. 어딘가 견학한다는 게 그곳에 속속들이 안까지 구경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밟아보고 그저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또 다른 경험이 되고 좋을 수도 있다. 나는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했다.
넋이 나갈 것처럼 아름다웠던 눈 오는 초간정의 풍경까지, 선물로 받은 날. ㅎㅎ
아쉽고 서운한 걸 붙들기보단 새롭게 얻은 자연의 선물이 더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졌다.
한 발 더 딛지 못해도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누리고 또 누리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나는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영주무섬마을
#무섬다리
#눈오는날용문사
#함박눈속초간정
#발을더딛지못해도
#자연의선물
#설국풍경
#몹시쓸모있는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