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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동트기 전 어둠의 산책

by 앤나우

설 연휴가 시작됐다. 어제 할머니댁 영주에 와서 할머니가 차려준 시골밥상, 오랜만에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음식을 먹고 도란도란 아랫목에서 막내 아이 애교도 보다가 책이나 좀 읽고 자야겠다 했는데,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600페이지 넘는 벽돌책.

책의 두께가 중요한 게 아니다.

톨스토이 문학상과 엄청난 광고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상으로 주목받기도 하지만 실상은 어마어마한 책이기에 그런 큰 상을 받는 영예로운 결과들은 지극히 선물 같은 결과라고 끄덕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렇다고 모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들이 전부 재밌었던 것도 아니다ㅎㅎㅎ)








김주혜 작가님의 『작은 땅의 야수들』


실로 어마어마한 책이다. 와이파이도 안 되는 할머니댁에서 오늘 하루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펑펑 눈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선비 세상'이란 곳에서 아이들과 뛰놀고 체험을 하면서 나의 마음이 온통 이 책에 있었으니까. 잠시 아이들 간식을 사기 위해서 기다린 시간에도 궁금해서 두꺼운 책을 가지고 차에서 내렸고 행여 눈비를 맞을세라(심선생님께 빌린 책이라 더 소중히 다뤄야지!) 두꺼운 롱패딩 점퍼 안에 꼭 안고 뛰었다. 보물 같은 책이니까.


요즘 한국 작가님들의 필력이 폭죽처럼 빵빵 터져서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속으로는 와, 미쳤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감탄했다) 얼마 전에 읽은 대온실 수리 보고서도 그랬고 작은 땅의 야수들까지, (이 책은 물론 다시 영어를 번역하긴 했지만 김주혜 작가님은 번역가 박소현님과 모국어로 서로 깊은 이야기와 의견을 나눌 정도로 한국어 실력도 빼어나다. ) 우리의 작가님들이 각각 창경궁 대온실동물원을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짓는 것도 흥미롭고 즐거웠다.


*연휴가 끝나고 꼭 가고 싶은 곳 : 다름 아닌 창경궁!! 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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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동안 푹 빠져버린 이야기





3·1 만세운동을 꿈같은 이야기처럼 환상 같은 마음으로만 품었었다. 영화나 소설로도 많이 접하고 심지어 어린 시절 유관순 언니의 전기문으로 읽으면서도 와, 대단하다 생각만 했지 그들의 대단한 결의와 행동 자체의 빛난 면 뒤에 진짜 현실은 내가 외면하고 잘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시위를 준비하면서도 결의문과 태극기를 나누는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가장 소중한 걸 잃을 각오를 하고 나온 모든 사람들, 희생된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만세, 만세, 태극기를 단체로 흔들었던 어린 학생들이 동원된 하루 반나절도 안 되는 해프닝, 한 줄로 기록된 역사적 사건이 아닌




우리가 여기 있다!
작은 땅에 야수들이,
이 땅의 주인이 살아있다!




외치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총에 맞은 호랑이는 꼬리를 숨기고 도망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총에 맞고 상처받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는 대사는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사냥꾼 남경수의 이야기로 시작된 첫 시작이 매력적이다. 남정호라는 인물의 여정으로 오기까지 이어져온 역사가 전혀 무관한 게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게 놀랍고 그저 놀랍다!


이성을 잃고 복수하고 되갚아야 할 수많은 한이 서린 세월을 살았을 우리의 조상님들, 독립운동을 하셨던 독립운동가들, 한 마음으로 움직였던 수많은 민초들. 백성들.

눈물이 절로 나고, 이제 곧 터지는 그 사건이 이미 비극으로 치닫는 결말임을 뻔히 알아도 그 역사의 현장을 떠올린다는 사실 만으로도 가슴 벅차고 내가 한국인인 게 자랑스럽다고 느껴졌다.


소설 속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전부 실타래처럼 얽혀있고 심지어 첫 이야기 사냥꾼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이야기 곳곳에서 감초 같은 상징을 보여주고 모든 걸 아우르고 있다. 맞아, 우리는 지도부터 호랑이 민족이었지! 호랑이 형님 이야기처럼 진짜 호랑이도 형님이라고 생각한 백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년 말, 비상계엄 사건이 터지고 국회로 뛰어가는 국회의원들 뿐 아니고 정치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달려간 수많은 시민들을 봤다. 거기엔 내가 아는 편의점 사장님도, 친구 아버지도 계셨다.

그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나라의 가장 큰 위기를 느꼈고 잠 못 이루는 시간 동안에도 행동하고 뭉치고 싸우고 지켜낸 사람들 덕분에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을 학교와 원에 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국회의원, 대통령, 정치인은 이상한 사람들 천지인데 국민들은 너무 괜찮지 않아? 대단해! 한국인들 대단해!


국회 담벼락을 넘고, 넘는 걸 도와주는 사람들을 실시간 뉴스로 보면서 그날 밤이 지나고 친구에게 내가 한 말이다.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하기도, 달려간 그 벅차고 두려운 심경이 어땠을지 상상하면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뭉클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이 어찌 다 이리 같은 마음만 있겠는가. 친한 무리에서 함께 어울리는 사람이 반대쪽 윤의 입장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광화문으로 매일 출퇴근하다시피 했고 이런 정치 이야기가 좀 불편하단 기색으로 자기 입장을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각양각색 우리는 저마다 처한 입장도, 내면의 삶도, 자라온 환경도 다른 사람들이기에 옳다, 나쁘다 한마디 말로만 판단하고 이분법적으로 편을 가르고 나눌 수만도 없다. 결국은 나눠지고 갈라지게 되지만 나는 조금 달라도 조금 더 옳은 방향으로, 정의롭게, 새로운 걸 꿈꾸고 한 발 더 나아간다고 믿고 싶어진다.



신기하게도 이 소설에선 호감 가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 어느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마지막 에필로 옥희조차도) 모두가 주인공으로 느껴지는 이야기다. 심지어 일본인 야마다 조차도 마지막 심리까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놀랍고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사람들은 모두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현실적인 분들이 씁쓸하기도 무조건적인 호감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지점이기도 했을까. 제한적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신도 모를 거 같은 인물의 솔직한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마음의 소리 끝판왕, 온전한 전지적 작가시점! 나는 그 지점이 불편할 정도로 감탄스럽다가 아,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렇구나 깨닫게 된다.

memo 마지막 에필로그 하나만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썼는데 이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을 따라가고 쫓아가는 게 아니라 역사의 또 다른 장, 주인공 스스로의 이야기가 다시 새롭게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부턴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닌 다시 거대한 바다로 뛰어들어 새로운 이야기를 쓸 우리의 차례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정의롭고, 정의로운척하고, 명예롭고, 존중하는 척하고, 고고해 보여도 실상은 외롭고 비참한 그 뒤에 있는 쓰디쓴 이야기가 놀랍도록 솔직하고 소름 돋고 애처롭다.


호감 가고 좋아하는 인물이 안 나올 뿐 미운 인물이 없었다. (*물론 월향이를 종잇장처럼 짓밟은 일본인 하야시 소좌를 빼고는! 부들부들! 그냥 이놈은 주요 인물이 아니라고 쳐두자)


1918년부터 해방 이후, 48년, 그 이후 1964년까지 시대별로 1부 -4부로 나눠진 이 방대한 이야기가 전혀 어렵거나 어마어마할 정도로 어렵게 짓누르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작가가 숨겨놓은 자연스럽게 박아놓은 연결된 사람들과 호랑이 때문, 아니, 덕분이다.


나는 초반에 인물들 하나하나가 매력적이고 뭔가 이어질 것 같아 메모해서 보기도 하고 적어놓기도 했는데 중반쯤 읽으니 따로 정리할 필요도 없이 한 명 한 명이 그 '이름의 상징성'의미와 더불어 깊게 각인됐다는 것을 알았다. 개똥이, 오월이, 돌쇠처럼(극 중엔 돌쇠란 하인도 물론 나온다) 그냥 보이는 대로 바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 신중을 기해, 토끼 한 마리를 사냥해서라도 특별하고 고귀한 사람으로 가꾼 이름, 옥빛 나는 푸른 바다의 조약돌처럼 강인함을 품은 이름, 이름의 상징성이 실로 어마어마한 소설이다. 잠깐 등장하는 줄 알았던 제주도 출신 가사 도우미 '해순'언니의 이름도 그렇다. 성조차 모르지만 그 이름은 또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물림 되고 우리는 그렇게 이름을 간직하고 잊지 않는다.


역사란 이런 게 아닐까. 알게 모르게 우리 삶 속 곳곳에 스며있지만 대충 지어낸 이름이라도 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와 삶이 있는 것처럼 이름을 잊지 않고 누군가 불러주고 외쳐주고 간직해 줘야 존재하는 것처럼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간 순간부터 아무 의미가 없는 거구나.



우리나라는 작고, 연약해 보이고 일제의 탄압에 굴욕을 맞이하고 빼앗긴 주권의 세월들도 있었지만 사냥꾼, 야수의 본능이 남아있어 아무것이 없는 듯해도 실로 어마어마한 것을 지녔다.


책의 앞머리 첫 장을 펴기도 전에 또박또박 글씨체로 적힌 작가의 글이 와닿는다.




동트기 전 어둠의 산책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책이 되길 … 김주혜




이 책을 보면서 재밌게 읽었던 모단걸 〔체공녀 강주룡〕이 떠올랐는데 앞부분 서평에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작가님 글이 먼저 등장해서 반갑고 신기했다. 패왕별희의 마지막 장면도, 강주룡의 모단걸을 동경하는 옷차림과 노동운동운동으로 빠져드는 계기와 과정도 한 번씩 떠올랐다.



동이 트는 줄 모르지만 그게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서로 가장 소중한 걸 나누고 아낌없이 내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거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겠다는 꿈이 아니라 기억하고 지키고 싶었을 추억과 사람들이 있었을 뿐인데 그 이야기를 엮어준 멋진 이야기꾼에게 감탄과 감사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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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에.

-p603 에필로그 『해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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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년 10월 17일 ·지은이 : 김주혜 ·옮긴이 : 박소현 /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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