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 함께 소설 읽는 '큰' 기쁨
작년에 재밌게 읽어서 찾아보니 '오랜만에' 하루 만에 다 읽은 소설이라고 쓰여있었다. 삼일 동안 치러지는 장례식장 이야기인데 울고 웃다가, 어쩐지 하루 만에 다 읽었다는 게 머쓱하기도 했다. 뭐 어쩌랴, 소설을 너무 재밌게 잘 썼는걸. 하지만 여운은 삼일을 뛰어넘어 일 년 후인 오늘, '한국소설 읽는 방' 덕분에 여기까지 닿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설을 혼자 읽지, 왜 같이 읽어?
사실 주변에 소설을 재밌게 읽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 방에 연결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여전히 소설책은 읽었겠지만) 이렇게 풍부한 감상을 나누며 한 달에 두 권씩 설레면서 소설책을 넘기면서 기록할 일조차 없었을 것 같다. 거기다가 이 방에선 한국 소설만 읽어서, 외국 소설을 더 많이 읽는 나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주변에 책을 좋아하고 읽는 사람은 많지만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도 분명했다.
소설보다 더 재밌는 책이 많아서
너무 몰입되는 감정에 헤어 나오질 못해서
나도 최근에 마이클 핀클의 《예술 도둑》이란 소설보다 더 재밌는 소설 같은 논픽션을 읽고 나니 참 재밌었다. 함께 줌으로 수업까지 하는 찰스만의 《1493 콜럼버스가 문을 연 호모제노센 세상》도 마치 소설 이야기, 별천지다. 재미가 무지막지하다. 방대한 분량의 인문학, 과학, 역사책도 때론 소설보다 재밌기에 요 근래 2년 동안 나름 다양한 다른 책도 읽어 나갔기에 끄덕끄덕 할 수밖에 없다. (그전까진 그냥 때려 죽어도 '소설'만 읽자는 마음이었습니다만 ㅋㅋ)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섬세한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심리에 전부 모든 걸 쏟아버리게 되는 소설이 오히려 마음에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끄덕끄덕, 어떤 감정인지 알기에 오히려 그런 이유들에 공감한다.
우리가 언제, 그 사람 인생이 되어 몇 회차로 거듭나서 온전히 살아볼 수 있을까. 유일하게 누군가 타인의 감정을 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는 장르, 공감하고 눈물이 터지고 화가 나고 답답해서 소리 지르고 싶고, 설레서 밖으로 막 뛰어나가고 싶은 심경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스토너를 읽으며 나는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영문학교수의 삶에 온전히 빠져들었다. 정확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무던하고 순종적인 주인공 스토너가 셰익스피어의 일흔네 번째 소네트를 듣다가 숨을 참을 만큼 거기에 몰입되는 부분에선, 나도 같이 숨을 참으며 느끼고 있었다. 이게 꼭 소네트일 필요가 있을까?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사람으로, 음악으로, 꿈으로, 수학으로, 미술로, 중국어로, 영화로, 다양하지만 한 번씩 자기에게 찾아온 세세한 그날의 분위기와 숨결이 느껴지는 순간이 전부 있지 않을까? 소설 속에 빠지고 읽는 동시에 '최면에 걸리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꼭 몰입해야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소설 속에서 나는 동성연애자가 되기도 살인마의 딸이기도, 살인마의 이모가 되기도, 이미 죽은 소년이 되기도, 자식을 잃은 부모가 되기도 했다. 비극 같은 일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한 걸음 더 내딛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지 다짐했고 지만 생각하는 나르시시스트를 알아차리는 나만의 혜안도 생겼다. 소설 덕분이다. 소설은 때론 가슴 아프게, 직설적으로, 때로는 너무 빙 둘러서 장황하게, 다큐멘터리처럼, 연극- 그것도 모놀로그처럼 나를 무대로 이끈다.
누구 편을 들 거냐고 그래서 너의 최선이 뭐냐고 묻지 않아도 소설을 절반쯤 읽어가면 이미 마음이 반 이상 기울어진 대상이 생기고 그 인물이 그저 웃기만 해도 마음이 벅차오른다. 전화벨이 한 번일 울렸을 뿐인데 대담한 여주인공의 행동이 부끄럽다가도 당차고도 멋있다. 각기 다른 밤새워 본 수많은 소설 속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에겐 꿈이 됐고 사랑이었다. 닿을 수 없는 짝사랑이어도 좋았다. 읽기 전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짜릿했다.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없는 우리에게 얼마든지, 대놓고 마음 놓고 '타인'으로 잠시 몇 시간 살아보라고 기회를 주는 것 같다. 소설책은. 그 유혹을 거절할 방법을 모르겠다. 몇 시간이 며칠이 되기도 몇 년, 삶이 되기도 하니까.
난 '소설'밖에 없다고 본다. 등장인물에 온전한 공감을 하지 않아도 적어도 왜 그런 행동을 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대놓고 까놓고 마음대로 헤집고 들여다볼 수 있는 건 무수한 글자로 이어진 '이야기'뿐이다. 영화도 물론 좋아하는 장르지만 영화는 배우가 누구냐 감독이 누구냐에 따라서 나의 상상이 따라가고 빨리는(?) 경험을 한다. ㅎㅎ
더군다나 문제와 사건을 해결하는 해답이 한 가지가 아니고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답이 나온다면, 이것만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나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장르가 있을까?
소설예찬!
'아버지의 해방일지' 감상을 쓰다가 어김없이 또 우리 아버지가 떠올랐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지만 언니와 나에게 또 최선을 다하셨던 아빠, 그런 아빠가 아른거리다가 아빠의 어린 유년 시절이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아빠가 선율이에게 지게에 대해 설명하다가 아빠는 5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와서 아이용 지게가 따로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유복자로 태어난 우리 아빠는 막내아들로 예쁨 받는 게 아니라 할머니 곁에서 이 일 저일 다 돕고 지게까지 져야 했지, 빨치산 아버지 고상욱의 이야기가 왜 또 이렇게 연결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내 아버지' 생각에 다다르자 애처롭고 짠한 마음이 들었다. 다섯 살짜리한테 지게라니! 지게에 태워주진 못할망정 화도 났지만 아빠의 고생 이면에 아빠를 단단하게 비춰줬을 밤하늘의 북두칠성 이야기가, 교회의 종탑 이야기가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전에 조성기 교수님의 '아버지의 광시곡'북토크 시간에도 A4 한 장에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써서 발표한 적이 있다. 별 거 아닌 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를 열심히 읽다가 또 어느 부분에서 울컥 눈물이 튀어나왔다. 발표를 다 마치자, 교수님께서 조심스레 물으셨다.
> 아, 그럼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가?
- 아, 아뇨! 건강하게 잘 살아계십니다. 여전히 일도 하시고요!
순간 좌중의 폭소가 터졌다. 추억하는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야 더 극적이 되는 무대였던가, 사람들의 반전인지, 안도인지 모를 웃음에 나 역시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빨치산 고상욱, 거짓말같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장 풍경이 소설의 전부다. 고상욱과 나의 '아버지' 박희락(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그 '희락'이 맞다)은 아무 공통점이 없는데도 이미 '아버지'하나만으로도 연결된다. 주인공을 사랑하고 아꼈던 아버지 모습에서 누룽지 안 줘도 아빠가 최곤디, 같은 대사는 나에게 없지만 언제나 우리 아빠도 나에게 제일 좋은 걸 주셨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루키 소설에서 읽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자리에서 외워버린 구절, '죽음은 삶의 대극의 아니라 삶의 부분이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하는데 죽음이 뭔지도 잘 모르는 청소년시기에 이 글귀를 허세처럼 외우고 편지에도 썼다면 그 이후로 숱한 장례식장에서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 마주하며 나는 그 소설 속 구절을 다시 되뇌었다.
때론 삶에서 가장 무거운 자리가 반대로 반갑게 모이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내가 제일 잘 알 것 같은 우리 아버지 모습이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도 깨닫게 됐다. 하지만 그렇게 오가는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 가다 보면 진짜 아빠와의 추억이 떠올라 나를 울릴 것 같다. 아니, 이미 울음이 터졌다.
** 우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에 나와있다.
오늘 만난 손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도 의도적으로 '아버지'란 구절을 피해왔고 애써 외면했는데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시더니, 갑자기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하셨다. 다시 읽으면서 떠올리고 기억하고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걸까. 책 한 권으로 이어지는 연결, 감상을 이야기하고 눈물이 떨어지는 순간을 못 참았을 뿐인데 소설은 늘 우리를 어딘가로 끊임없이 연결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준다.
한국소설 읽기 방을 만들어준 영글음 작가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소설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도 이 방에 들어와서 소설과 사랑에 빠졌으면 좋겠다. 소설이 재미없다는 사람들은 소설에서 아직 나랑 같은 점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닐까.
소설 쓰고 앉아있네 방에서 만나야 하는데 소설은 어째, 술술 읽히는 재미난 소설을 읽고 나면, 아, 이렇게 쉬운 한 문장 쓰기가 너무 어렵다는 걸 알아서일까. 갈 길이 멀지만 또 기분 좋은 밤이다.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저마다 귀한 보석 같은 이야기가 내 안에 또 쌓이고 쌓여서 뭐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저번에 재밌게 읽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의 유일한 삶의 낙이 바로 이 '연애 소설'이다. (신기하게도 그의 이름은 매번 이렇게 긴긴 이름으로 토시하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난 여기에도 작가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본다. 욕심 많은 읍장은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고 그저 '읍장'일 뿐이므로.) 수아르인(원주민)과 다름없지만 또 온전한 수아르인도 아닌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꼭 연애소설만을 고집했었지! 나와 아무 상관없는 아마존에 홀로 살고 있는 그 노인이 끔찍한 문명이 지겹고 싫어서 다 버리고 밀림으로 들어가면서도 '소설' 한 권은 꼭 쥐고 들어갔을 생각을 하면 그냥 미소가 지어진다.
*여기엔 총 7권의 소설이 있습니다. 사진을 보고 제목을 맞추신다면, 답글에 자랑을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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