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좋아하는 장면

스치듯 지나갔어도 마음엔 꽉 차오르는

by 앤나우
영화 《러브레터》




다리를 다친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트랙이 아닌 곳에서 출발 신호와 동시에 마구 달린다. 달리는 선수 트랙은 아니지만 갑자기 미친 듯이 달리고 싶었던 걸까? 아무도 자기를 관심 있게 봐주지 않지만(그런데 사실은 얼굴 하나가 기가 막히게 '잘'생겼기에 주목을 안 받을 수가 없는;;;) 답답한 마음을 '표출' 하고 싶었던 걸까.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어딘가 선의 경계에 서있는 듯한 모습, 사춘기의 일탈 같은 감정도 포함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짝사랑하는 여자애(또 다른 후지이 이츠키)에겐 한마디 말도 못 하는 답답한 바보 같은 자신에 대해 화가 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볼 땐 나도 고등학생이어서(19세 | 막 수능을 본 이후였다) 잘 몰랐는데 다시 어른이 되고 영화를 보는데 이 장면이 유난히 마음속에 강렬하게 들어왔다. 중요한 건 이 장면 뒤에 또 다른 동명이인 후지이 이츠키(여자)가 그 장면을 포착하고 카메라 셔터를 마구마구 누른다.


남들은 주목하지 않지만 자꾸만 눈길이 가고 한 번 더 쳐다보고 싶은 거, 기이하고 이상한 행동에도 뭐라고 판단하기 전에 그냥 응원해주고 싶은 거, 첫사랑의 두근두근한 마음은 그런 게 아닐까.

촤르르르르, 나는 이 무수한 순간포착 셔터 소리 만으로도 이미 둘이 서로를 좋아했네, 했는데 자기들만 몰랐네. ㅋㅋㅋ


《러브레터》는 다시 볼 때마다 놓쳤던 장면들, 웃음이 터지는 장면들이 유난히 많은 영화다. 벚꽃이 날리는 봄이 되면 이와이 슌지 영화 한 편은 꼭 다시 보고 싶어진다. 《4월 이야기》,《러브레터》, 《하나와 앨리스》 까지, 마음까지 일렁일렁한 고교시절, 첫사랑, 뭐 이런 단어들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영화들이다.

마츠다 세이코의 두 번째 싱글 음반인 「푸른 산호초」를 배경 음악으로 곁들인다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봄, 벚꽃, 신입생, 여고생, 남고생, 학창 시절, 첫사랑, 짝사랑 …

『푸른 산호초』이 노래는 하나의 짧은 에피소드, 지나가는 대사처럼 《러브레터》에도 등장한다.



남자애가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커다란 갈색 봉투를 그대로 여자애에게 냅다 씌워버리는 심술궂은 장면이나, 꽝꽝 얼어버린 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던 후지이 이츠키(여자)가 꽝꽝 얼어버린 눈 속에 갇힌 죽은 잠자리를 발견하는 장면 같은 거, 신기하게도 이 모든 장면이 그저 우연한, 짧게 지나가는 장면일 뿐인데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서로의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와이 슌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동명이인이라는 평범한 소재로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 차곡차곡 쌓아놓는 평범하고 잔잔한 에피소드가 종극에는 터지고 연결되는 클라이맥스! 이와이 순지의 영화야말로 청춘의 시절, 내가 사랑에 빠진 작품들이 아닐까 싶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센이 다친 하쿠를 구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한 번씩 열리는 기찻길이 발목까지 찰방찰방 물이 넘치고 있다. 물이 마구 범람해서 다리가 놓인 길도 아니고 거센 물결이 넘치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발목으로 차오르는 물을 견디며 센은 길을 나선다. 투명하지만 몸으로 그대로 차가움과 촉감이 전달되는 물, 느낄 순 있지만 몸속으로 스며들진 않는 물, 센의 나이가 10세라는 걸 생각하면 10세 아이는 더 이상 건널 수 없는 강, 무슨 지칭하는 언어가 있었던 것 같은 도저히 생각나질 않는다. 완전 유아기에서 벗어나서 어린이기도 하지만 사춘기는 또 아니고, 고작 10살인 치히로가 하는 일도 겨우 고작 자기의 '이름 하나'를 지키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자기 이름을 지키고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야 말로 어쩌면 어른도 가장 힘든 일이 아닐까?


어린 소녀가 자기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절대 자기 이름을 잊지 않게 해 준 고마운 하쿠를 위해서 길을 나서는 장면은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가 많이 들어가 있다. 여기에 이름도 정체도 알 수 없는 또 다른 가오나시가 조용히 스르륵 치히로 옆으로 따라온다. 치히로는 그런 가오나시에게 처음으로 자리를 내주고 함께 앉는다. 정체성을 몰라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로 (금덩어리) 유혹해 보지만 거기엔 눈도 꿈쩍하지 않는 10살 소녀에게 화가 난 가오나시는 닥치는 대로 전부 먹어치고 전부 다시 토한다. 처음 자기 '존재'를 알아봐 주고 발견해 주고 인사해 주고 문을 열어준 작은 소녀에게 고마웠던 걸까. 어떤 부분에선 닮아있기도 한 이 둘은 처음으로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는다.





영화 《연연풍진》




가난한 주인공 '완'은 힘들어도 인쇄공장에서 일하는 이유가 거기서 일하면 뭐라도 읽을 수 있어서 읽는 걸 포기하기 싫어서라고 할 때 마음이 찌르르했다. 돈 때문에 잘하는 공부도 더 이어 할 수가 없고 첫사랑'후엔'마저 헤어져야 했지만(아, 이 나라에도 가슴 아프게 입영 통지서가 있고 '고무신 거꾸로'는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현재 자기가 일하는 곳에서도 뭔가 인쇄된 종이 글자들을 읽어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나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보다 이 영화의 기차 터널 장면을 더 좋아하는데 2000년도에 개봉했으니 어쩌면 허우샤오센의 이 영화를 이창동 감독이 오마쥬 한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박하사탕》을 먼저 봤고 이 영화는 몇 년 뒤 낙원동에 있는「허리우드 클래식」 극장에서 본 기억이 난다. 기차 터널 장면이 나오는 씬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오래된 극장은 좁았지만 극장 의자도 낡았지만 그 안엔 복작복작 사람들로 가득 찼다.


나 역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될지 몰랐지만 가장 좋았던 건 바로 원 없이, 무수한 책, 신간 책들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독서퀴즈를 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읽은 재미없는 책에서도 감동과 즐거움을 느꼈다. 글자를 '읽는다는 것'이, 글을, 책을 읽으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나에겐 완의 대사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어린이 도서, 청소년 책, 어른 책까지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을 신간 코너에 구입하기도 했고 전혀 읽을 일 없었을 책을 읽다가도 나도 모르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러브레터 Love Letter · 1999년 · 일본 · 117분 / 이와이 슌지 감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 2002년 · 일본 ·126분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연연풍진 Dust in the wind · 1986년 · 대만 · 109분 / 허우샤오센 감독




#러브레터

#센과치히로의행방불명

#연연풍진

#영화속장면

#몹시쓸모있는글쓰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