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생각나는 나만의 『초원의 집』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어김없이 아이들의 독감으로 발목이 묶여버린 듯한 가을은 사실, 하나도 반갑지가 않다.
싸늘한 날씨가 이어지면 온몸이 건조하고 따가워지고 손끝이 저릿저릿, (나는 9월부터 도토리 창고에 보습 크림과 수면 양말을 잔뜩 쟁여둔다) 차가워진 바람에 기분도 덩달아 우울해질 즘에 아이들까지 모두 아프면 …
하... 가을을 탄다는 건, 여름엔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독감, 감기에 시달리고 그만큼 뜨거운 해를 바라볼 수 없어서 마음의 스위치가 금방 어두워지는 기분이 든다. 슬픈 일이다. 너무도 빨리 사라져 버리는 해, 순식간에 찾아온 땅거미, 무겁고 두꺼운 옷으로 감싸야하는 계절, 다른 계절은 안타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을을 유난히 싫어했던 것 같다. 겨울은 오히려 가을이 있어서 예열(?)을 할 수 있었다면 작렬하는 더위에서 너무도 쉽게,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버리는 스산한 가을바람은
언제나 낯설고 어색했다.
한국은 사계절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배웠는데 두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가 돼 보니 오히려 매 계절마다 챙겨야 할 준비물도 옷가지도 넘쳐나고 월동준비까지, 빠릿빠릿하지 못한 나에겐 '똑똑'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가을은 매번 힘들고 귀찮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그래도 이런 날씨, 가을이 되면 꼭 한 번씩 꺼내보는 책이 있다.
우리에겐 「초원의 집」이란 외화로 더 익숙한 책이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가 지은 이 책은 로라가 네 살 때부터 결혼 후 한 아이의 엄마가 될 때까지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시리즈 중에서 위스콘신 주의 작은 통나무 집에 사는 로라네 가족이 월동 준비를 하는 과정이 담긴 《큰 숲 속에 있는 작은 집》 -이라는, 가장 첫 번째 이야기를(*1권) 제일 좋아한다.
겨울의 낮과 밤이 무척이나 지루할 것 같지만 숲 속에서 모든 걸 자급자족하고 그 안에서 놀거리를 찾아 끊임없이 눈을 돌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활기 넘치고 사랑스럽다. (*모든 이야기를 전부 어린아이 로라의 시선으로만 담았다는 점이 놀랍고 신선하다. 아마 어른의 시선으로 봤다면,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걱정하는 마음이 더 앞섰을 테지만 순수하고 천진한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더 즐겁게 느껴진 것 같다.) 겨울 낮과 겨울밤을 거쳐, 크리스마스, 일요일, 설탕 눈 이야기까지 하나씩 순서를 따라갈 때마다 나도 저렇게 작은 오두막 집에서 옹기종기 놀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언니랑 웃으며 상상하곤 했다. 특히 이야기 앞부분에서 케이크 위에 올린 호두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다람쥐를 잡아서 위를 갈라서 그 안에 들어있는 따끈따끈한 견과류를 얻는 과정이 꽤나 자세히 나오는데 영상이라면 조금은 충격적일 수 있는 그런 장면들이 글로 읽으면 어찌나 즐겁게 읽혔던지! 돼지 오줌보를 크게 부풀려서 축구를 한다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아빠에게 듣긴 했지만 당최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는데 그런 과정이 모두 이 책에 나와있어서 아하, 하면서 신기하게 빠져들었다. 돼지꼬리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꼬챙이에 구워서 맛있게 구워 먹는 아이들의 이야기도 생생한 경험과 현장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만큼 자전적 이야기, 성장의 과정이 진솔하게 다가온다. 다정하고 포근한, 가을바람이 불면 꼭 다시 펼쳐보고 싶은 이야기 책이다. 덕분에 외화 시리즈도 무척 재밌게 봤지만 역시나 최고는, 《큰 숲 속의 작은 집》 바로 1권이다. 그래서 나는 「초원의 집」-이라는 제목보다- <큰 숲 속의 작은 집>이라는 제목이 언제나 더 정감 있게 느껴지고 좋았다.
시작부터 가을에 대해서 온갖 불평을 해댔지만, 책 이야기를 떠올려보니 그렇게나 싫었던 가을도, 겨울의 문 앞에 다가온 스산한 기분도 또 다른 즐거움을 선물해 주는 것 같다.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안에서 좀 더 따뜻하게 뒹굴거리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도 노랗고 빨갛게 물든 온통 가을로 가득한 자연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도토리 열매를 주워서 소꿉놀이를 해볼 수 있는 것도 가을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따끈한 붕어빵, 호빵, 길거리 어묵 같은 걸 지나칠 수 없는 것도 가을이 있기 때문이다. 귤이나 맛있게 익은 반시가 은행잎 같은 알록달록한 맛을 선물해 준다. 무거운 외투를 싫어한다고 했지만 사실, 목도리와 장갑은 나의 가을 패션 ‘필수’ 아이템이 아니던가! ㅎㅎ
가을은 또 그만큼 독서가 깊어질 수밖에 없는 계절이다.
해가 빨리 지니 불을 켜고, 어둠을 조금 몰아내고 독서에 몰입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깊어가는 가을의 한가운데서 오늘이 올해 가장 큰 보름달, 슈퍼문이 뜨는 날이다. 지구와 가장 가까워지는 시기에 뜨는 슈퍼문, 평소보다 약 14% 더 크고, 30% 더 밝게 보인다는 그 달이 오늘 밤 12시 10분에 가장 높이 오른다고 한다. 가장 가까이 빛난다는 그 달도 지나치고 모르면 볼 수 조차 없다.
어쩌면 우리 마음도, 내 마음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더 많이 누리고 밝은 빛 속에 찾을 수 있는 즐거움도 넘치는 지금 이 계절, 오늘이, 가을이, 다른 소소하고 지나가는 감정에 휩싸여 더 축 처지고 우울했던 건 아닐까. 가을을 좀 더 사랑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우리가 저마다 맞이하는 큰 숲 같은 세상 속에도 '작은'집은 어디에나 있다. 어디를, 무엇을 나의 작은 집으로 정할 건지 내가 고르기만 하면 된다. 커다란 숲처럼 변화무쌍한 날씨와 예상치 못한 상황처럼 좌절하고 힘든 순간도 매번 찾아올 테지만 작은 집, 나의 공간, 나만의 쉼이 있는 곳이 있다면 조금 흔들리긴 해도 가을, 겨울쯤이야, 끄떡없다. 또 그 안에서 잘 넘기고 견디고, 어쩌면 또 다른 행복과 행운을 무수히 만날지도 모르겠다. 어린 로라에겐 든든하고 작은 통나무 집 하나가 더 큰 숲을 사랑하게 하는 원천이 됐다. 웅크리고 주저할 순 있어도 나만의 ‘통나무 집’찾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단, 많이 읽고 더 부지런히 쓰는 걸로 단단하게 월동 준비를 하고 싶다.
*브런치, 오랜만에 쓰려니 쑥쓰럽고 좋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서야,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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