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탑승해서 어수선하게 짐 정리가 대충 끝나면 앞에 승무원이 두 분 정도 나와서 이륙하기 전 비상 안전 수칙을 꼭 설명해 준다. 나는 흔들리는 난기류도 무섭고 영국 히드로 공항으로 멀쩡하게 날아가던 비행기가 '헤비 스노우'로 몽골쯤에서 회항까지 하는 바람에 비행기는 가장 안전한 교통수단이라고 하지만 한 번 크게 사고를 당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진다는 공포심이 늘 마음에 있다. 비행기는 버스나 전철처럼 일단 종착지가 아닌 곳에서 마음대로 내릴 수 없다는 점이 긴장감을 돌게 한다. 금고처럼 굳센 철문으로 철컥 닫히는 순간 갇혀있다는 느낌도 살짝 무서운데(일단 화장실은 있어서 다행이다, 휴우) 예상치 못한 사고도 일어날 수 있으니, 자연재해, 날씨, 날아다니는 새들까지 통제할 수 없다는 상황이 늘 최악의 시나리오 한편에 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기 전엔 평소보다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속으로 열심히 기도를 한다.;;; 교회에서보다 더 절절한 기도가 터져 나오는 것 같다. 그래, 맞아! 인생은 맞닥뜨려야 제맛이고 실전이 돼야 사람의 본성이 나오는 법이지. 마치 치과에서 입을 벌리기 전 후회와 자책의 기도처럼 비슷한 패턴이다. 그렇다고 막 또 대단한 공포는 아닌 게, 앞 뒤 옆, 함께 탄 사람들도 있고 혼자가 아니라 엄청난 인원이 '다 같이'있다는 점이, 또 묘한 소속감과 안도감을 준다.
안전 상황에 대비해 숙달된 승무원들은 물론, 이미 비행기를 수도 없이 몰아보신 기장님들에 대한 신뢰, 든든한 동료들(?)까지, -한 번 보고 말 사이가 대부분이지만 이상하게도 묘한 동료애가 솟구친다- 나 혼자만 어딘가에서 허우적거리고 떨어지지 않겠구나, 까지 생각이 머물면 이제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Memo 헤비 스노우라고 했지만 사실 영국 히드로 공항 활주로에 있는 눈을 제대로 치우지 않아 발생한 일이란 걸 나중에 깨닫고 어찌나 허탈했는지! 우리나라 같으면 다들 거대 삽을 들고, 제설차까지 등장해 쓱싹쓱싹 쌓이기도 전에 눈부터 해치울 일을! 요즘에는 공항 가는 길 도로와 활주로에 열선이 눈이 쌓이는 것을 대비해 녹여주기도 한다던데, 영국은 정말이지 너무했단 생각이 들었다. 회항한 덕분에(?) 그 다음날, 공항에 새벽부터 대기해서 삼일이나 쭈그리고 자고 이름이 불리길 기다려야 했다. 그야말로 영화 '터미널' 속에 있는 주인공 심경을 잠시 잠깐 체험한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래도 안전상 벨트는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 불이 꺼져도 절대 풀지 않는다. 이·착륙 시 창문을 열어놓고 앞판을 내리지 않는 규칙도 철저하다. 기내식이 나올 때마다, 맛있게 꼭 챙겨 먹는다. 언제 어디서 먹을지 모르는 마지막 만찬이 될 수도 있어서 비행기 기내식은 고칼로리로 구성되어 있단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도 일어나자마자 못 먹고 지나친 기내식을 찾아서 먹는다.
Memo 회항 사건이 있을 때 저마다 사람들이 울고 불고 난리치고 아우성이 빗발쳤는데 그때 갑자기 등장한 게 바로 또 기내식이었다. 잉? 먹은 지 얼마가 안 됐는데 왠 갑자기 밥? 했는데 사람들을 진정시켜 주는 데는 밥만큼 좋은 게 없었다. 순식간에 기내는 조용해졌고, 어안이 벙벙한 나도 먹다 보니 맛있어서 빵을 갈라서 버터까지 바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뒤로도 피자, 샴페인,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기까지 간식과 술, 음료가 계속 나왔다. 가족을 만날 생각에 울고 있던 영국인들도 몇 명 있었는데 모두 눈물을 닦더니 다시 진정하고 맛있게 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가 '에드워드 권' 셰프라고 유명한 스타셰프가 대한항공과 컬래버레이션을 했다고 하는데 요리도 엄청 맛있었지만 사람을 위로해 주고 조용히 안정시키는 데는 역시 '음식'만 한 게 없다고 깨달았다.
비행기를 탈 때 비상구 근처에 타면(아마도 비상 착륙 시 슬라이드가 내려오게 되는 위치였던 것 같다) 직원들과 마주 보는 구조로 앉게 되는데 그때, 대학교 졸업 여행 때 J와 내가 하필이면 그 자리에 앉게 됐다.
-비상시, 승객 탈출 시, 가장 늦게 탈출하게 되더라도 직원을 도와서 구조를 도울 수 있나요?
하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맑고 청아한 음성과 달리 너무도 고민되고 무거웠던 질문이었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단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끝나는 '통보'에 가까운 과정인데 내 옆에 앉아있던 J랑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네? 몇 번째로요?
마지막은 싫은데……
꼭 그래야 하나요?
잔뜩 쫄고 긴장해서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동의를 못했는데 대부분 승객들은 한 번에 YES를 하는데 두 명의 여학생이 한 번에 시원하게 대답을 안 하자, 대답을 해야 비행기가 뜰 수 있다고 해서, 마음과 다른 이타심의 YES를 쥐어 짜내서 한 적도 있다. 우리 둘 다, 제일 마지막 차례로 내려가긴 싫다고 계속 중얼 거렸는데, 거짓말로 선뜻 대답하기엔 꽤나 진지했던 성격이었던 것 같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인데 역시 비행기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할 이야기보따리가 둥둥
엉뚱한 상상을 하는 틈에 벌써 구름 위에 떠있는 느낌이 든다. ^^
올여름에 영국에서 온 형부랑 큰 조카, 우리 식구 넷이 제주도에 갔다. 똑같이 비상 상황을 대비해 안전 수칙을 열심히 들었다. 남*녀 승무원이 직접 바람을 넣는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걸 아이들에게도 잘 보라고, 말해주면서 빠져들듯 보고 있는데 막상 안전 수칙 그림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반드시 아이가 아닌 보호자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써야 한다.
보다가 잠시 읭? 타이타닉 호의 침몰 같은 재난 상황에서도 젠틀맨들이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구명보트에 올라가게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에 앞서 귀족들이 우르르 먼저 탔지만;;) 당연히 아이를 먼저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일상에 익숙한 나로서는 아이가 아닌 내가 먼저 써야하는 산소마스크가 낯설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어른이 먼저 기절하거나 다칠 수도 있으니까 아이를 지키려면 그만큼 보호자가 정신을 차리고 자기 스스로도 돌볼 줄 알아야 아이에게도 멀쩡하게 아이용 마스크를 씌어줄 수 있다.
아이가 늘 우선, 아이들 위주의 삶이 언제나 옳고, 무조건 좋은 거, 행복한 것만은 아니구나. 하지만 우리는 저출생 시대, 점점 귀해지는 아이들을 애지중지 얼마나 소중하게 떠받들듯 모시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보다 아이들이 귀하다고 그 앞에 먼저 마스크를 씌워주다간 돌볼 수있는 시간이 사라질 수도 있다.
엄마만의 시간, 쉬는 시간, 엄마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육아를 하면서 점점 깨닫는다. 사소하게 지나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꼭 내가 있어야만 우리 애가 가장 행복해!라는 생각은 뭐, 그렇게 생각할 순 있지만 지나친 생각이기도 하다. 나 역시 아이 옆에 내가 꼭 있어야 아기가 가장 안전하고 행복할 거라는 확신의 시기가 있었다.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할 즘이었는데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샤워를 하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그냥 하면 됐을 것을 뭐가 걱정되고 불안했는지 아이를 혼자 둔다는 게 참 미안하고 망설여졌다. 아마도 열심히 샤워 중에 아이가 배밀이로 기어 와서 화장실 안에서 찰방찰방 막 아래서 물놀이 물장구를 친 기억이 또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던 것 같지만.
엄마가 먼저 숨 쉴 줄 알아야 아이도 잘 돌볼 수 있다. 산소마스크는 이기적인 게 아니라 늘 엄마가 먼저! 맑은 공기도 쐬고 좋은 체력도 유지하고, 아프지 않고, 행복한 마음이 들어야 아이에게도 씌울 수 있다. 어쩌면 아이에겐 뭔가를 씌우려 하지 않아도 엄마가 이미 안정적으로 편안함과 웃을 수 있다면 그 가정은 이미 행복하지 않을까. 보통 짜증과 화, 육아 시 자주 찾아오는 번아웃은 아이들을 챙기다가 체력이 후달리거나 시간에 쫓길 때 제일 많이 일어난다. 나 역시 그랬다는 걸 깨달으니 이 작은 안전 수칙 그림 하나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비행기의 착륙은 아주 서서히 천천히 내려오면서도 주변 하늘과 바닥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추락은 그냥 곤두박질치는 사고 그 자체이다. 보통 연예인들이 인기가 떨어져도 천천히 그리고 담담하게 내려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비행기를 타다 보면 그 이야기가 더 실감 나게 와닿는다. 곤두박질치는 사고가 아니라 내려올 준비를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내려오고 싶다는 이야기, 아주 멀리서 보이지도 않았던 크고 작은 건물이나 마을이 보일 땐 경이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추락할 때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여유 따윈 없다. 우리 인생의 좋은 순간들이 추락하는 사고나 아픔이 아니라 착륙하는 멋진 순간이길, 착륙도 멋지고 우아한 경험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서서히 다가오는 낯선 풍경과 흔들리는 기류를 견디는 시간처럼 과정도 견뎌내고 혼자서 감당하는 게 아닌 내가 비행기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든든한 동료애로 느낀 것처럼 '함께' 걸어가고 싶다. 신랑과도, 부모님과도, 좋은 이웃, 벗들과도.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 손을 놓지 말고 꼭 잡아주고 싶다. 두렵고 낯선 순간을 즐기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아가다 보면 이륙보다 늘 무서웠던 나의 착륙의 순간도 조금은 웃으며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비행기의 착륙은 '순간'이지만 사실 이 순간 같은 찰나가 꼭 순간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착륙을 할 땐 언제나 용기와 결심이 필요하다. 착륙 때마다 흔들리는 기체 내의 소음과 덜커덩거리는 느낌이 늘 긴장돼서 유심히 살펴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글로 한 번 써봐야지 했는데, 다음엔 비행기 안에서 좀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겠다.
***아이들의 긴긴 겨울방학을 어찌 보낼까 고민하다가 언니가 있는 영국에 두 달 다녀오기로 했다. 13시간이 넘는 시간을 이제 아이들과 비행기에서 보내야 하는데,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야 밤 비행기라 잘 수 있지만 ㅎㅎㅎ 우리 셋이 잘할 수 있다!
즐거운 팁이 있다면 과감하게 나눠주시길 바란다. ^^ 잠이 그대로 쏟아지는 감기약이나 천연 멜라토닌 같은걸 찾아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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