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자기만의 색을 찾고 기록하는 시간 | 윤병옥 작가님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었을 때 나는 사실 글을 쓸 공간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가 앉아서 글을 쓸 나만의 공간 -서재나 책상 같은 물리적 공간은 물론이거니와 글을 써서 올리고 기록하고 나눌 SNS나 글쓰기 플랫폼-그 어느 것 하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글을 쓸 수 없었던 건 아니다. 한 번씩 장문으로 글을 썼던 face book이 아직 살아있었고 거기에 빠른 손놀림으로 (나는 핸드폰 문자 치는 타자도 엄청 빨랐기에 엄지 손가락으로 글 쓰는 속도도 대단했다) 글을 썼다. 쓰다 보면 이 정도에서 끝나야지 했는데 핸드폰의 작은 화면에선 글이 멈추지 않았다. 신들린 듯 엄청난 속도로, 엄청난 양으로 주저리주저리 입이 터진 것처럼 글이 터졌다.
네이버 블로그에 나만의 글쓰기 공간을 만들어서 페이스 북에서 썼던 글을 그대로 다듬어서 사진과 함께 올리기도 하고 그래도 여전히 목말랐던 나는 글 쓰는 오늘의 PM, 이너조이님의 권유로 브런치 작가에 응모했다. 어마어마하게 긴 글, 의식의 흐름대로 경계 없이 정리되지 않은 온전히 나로만 가득한 내 글이 블로그나 다른 sns보다 브런치에 어울릴 거라고 권유해 준 분도 이너조이님이다. 대학시절 내 친구 두 명이 제발 글 좀 쓰라고 내 핸드폰에 깔아 둔 브런치 앱을 몇 년 만에 눌러서 처음으로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응모를 했고 핸드폰으로 하긴 뭔가 아쉬워서 노트북을 켜서 내가 썼던 글을 그대로 오타, 띄어쓰기만 수정해서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바로 이어진 합격 소식에 환호가 터졌다. 진짜 제대로 나만의 글쓰기 공간이 생긴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브런치는 나에게 가장 특별한 공간이다. 온전히 나로만 파고드는 글을 쓸 수 있고 나만의 숨통을 틔여주고 뭐라 뭐라 써도 분량의 제한도, 누군가의 시선도, 하나도 두렵지 않은 곳이 바로 브런치다. 그만큼 제대로 꾸준히 잘 활용해서 썼냐고 하면 뜨끔하고 찔리긴 하지만, 블로그엔 왠지 조금 더 힘을 뺀 가벼운 마음을 담게 되고 글자수가 정해진 스레드 같은 곳엔 가끔 글을 쓰다 보면 제한된 글자 수에 답답함을 느낀다. 역시 나의 노마드 글쓰기를 받아줄 곳은 이곳이구나, 느낀다.
그래서인지 브런치에서 만난 귀한 인연들도 반갑다. 수많은 닉네임, 다양하고 개성 있는 필명들이 넘쳐나는 곳이지만 여기에서도 자기 이름 세 글자를 그대로 사용하시는 분들의 정직함과 우직함이 뭔가 색다르고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로 만난 사이 중에, 빛나는 이름 그대로 사용하시는 분들 중, 인상적인 두 분이 있는데 바로 윤병옥 작가님과 김정준 작가님, 나에겐 그 두 분이 그렇다.
윤병옥 작가님은 대학시절 은사님이셨던 조성기선생님의 북 콘서트에서 뵌 사인데 사실 누구인지, 얼굴도 아무 정보도 모른다.
교수님께서 올려주신 북토크 후기 감상문을 읽다가 우연히 작가님의 글을 봤고
|**작가님의 글을 보려면 여기
반가움에 댓글을 달았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런 신기하고 즐거운 인연을 놓칠 수 없지, 나는 바로 댓글을 달았고 반가움을 담아서 인사했다. 짧게라도 스쳐간 인연이라도 '함께'했다는 것만큼 귀한 건 없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스쳐가는 짧은 인연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다. 잠시 그 순간 머물렀어도 '시절인연'이라는 말도 참 좋아한다.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도 그 시절 빛나고 소중했던 존재와 그 시간 속에 '함께'했다는 의미가 새롭고도 귀하다는 걸 잘 알기에.
과학 교사로 일하셨고 칼 융의 심리학에 관심이 많으신 분 답게 영화의 텍스트 속에서, 꿈에서 심리학적 상징을 찾고 해석한다는 소개글이 무척이나 끌렸다. 당시에 나도 카를 융《기억 꿈 사상》을 읽고 아주 신기한 꿈 한 편을 꾸고 동화인지 소설인지 모를 이상한 글 한 편을 막 썼던 참이었다. 더군다나, 영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할리우드 키드인 나를 언제나 콩닥콩닥 감성을 건드리는,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영화 소개와 리뷰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 윤병옥 작가님의 글은 나에게 다르게 느껴졌다.
우선 영화를 감상하는 시각이 언제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삶에 대한 태도란 걸 깨닫자, 내가 놓치고 넘어간 다른 장면을 또 찾아보고 싶어졌다. 사실 작가님은 일상에서 건강한 요리나 음식에 대한 글도 종종 올려주시는데 거기서 두 아들을 생각하고 식구들을 위해 요리하는 모습들 하나하나가 어쩌면 나에게 먼저 와닿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마침 나도 두 명의 아들을 키우고 있었기에 어떻게 키우셨을까, 어떤 마음으로 견뎌내셨을까, 이런것들이 궁금해진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작가님 글 중에 반하게 된 계기가 된 글은 <시간 여행자의 아내> - 시간을 초월하는 사랑에 대해서 쓴 글인데 나는 이 글을 읽고 푹 빠져버렸다. **전체 글을 보시고 싶다면 여기
맥 빠질지도 모르지만, 나는 시간여행을 항상 은유로 본다.
이 단락이 시작하는 부분부터 커튼 콜처럼 또 다른 막이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상상을 부숴버리는 말 같지만 과학자로서의 접근 같은 그 말의 본질은 차갑거나 해부된 상태가 아니라 '은유'라는 따뜻함이 《행복한 왕자》의 마지막 심장처럼 끝까지 타지 않고 빨갛게 살아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은유'이기에 넘쳐나는 진실이 더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영화 속 나타나는 시각의 장면 역시 지나갈 뿐이지만 글로 다시 남긴다면 이런 매력이 있겠구나, 또 다른 감상의 즐거움을 깨닫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잊히는 것이야 말로 진짜 죽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시간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연이라는 생각, 전 생애를 사랑하고 품어주는 '마음'을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이미 한 번 봤거나, 읽었거나 했던 작품들이 누군가의 깊은 사유속에서는 이토록 또 다른 보물을 품고 있고 보여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 작가님 글은 읽을 때마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따뜻했는데 책을 내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신랑 회사에서 마침 문화 생활비로 지원된 금액이 충전처럼 쌓여서(한 달에 삼만원씩인데 첫 달만 책을 사고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서 아이들과 함께 갈 워터파크 사용권을 몇 장 끊고 남은건 전부 책으로 올인!) 예스(*24)에 20만원 넘는 상품권이 있었는데 일 번으로 이 책을 담았다. 내가 나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
빨리 읽고 싶었다.
좋은 글은 인쇄된 종이 책으로 받았을 때 기쁨이 몇 배가 된다.
작가님처럼 나 역시 종이로 된 책에 메모하고 글 쓰기를 좋아하고 만지는 물리적 촉감까지 좋아하는 독자니까, ㅎㅎ 브런치에서 내가 애정을 가지고 글을 읽는 분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내거나, 하는 소식들이 그냥 스쳐서 사라지지 않고 나에게도 하나의 추억과 시간으로 기록되길 원한다. 가까운 분들의 책 소식, 전시회 소식들이 많이 들리면 좋겠다. 우리의 연이 시절인연이라면 그 시절이 《서유기- 선리기연》의 대사처럼 '만년'으로 정하고 싶을 정도로 좋은 분들이다. 신기하다. 얼굴도 모르고, 정확한 나이, 사는 곳은 모르지만 글로만 먼저 만난 사이라는 것은 내면의 거울을 서로 먼저 보여주고 시작하는 사이인것 같다.
모두가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나 자신으로, 자기의 색깔대로 살면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마음의 한 줄 - 자기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꿈을 꾸며 사유하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p93, 2부 「노년의 여름」중에서
제목에 등장하는 예의라는 단어가 와닿아서 궁금했는데 이 구절을 읽다가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온전한'나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한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이 책은 인생의 사계절을 그대로 떠올리며 노년의 봄 | 노년의 여름 | 노년의 가을 | 노년의 겨울 구성으로 짜였다. 사실 요즘엔 예순은 더 이상 '노년'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쑥스러운 나이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늙은 때, 또는 늙은 나이라고 하는 말이 노년이라면 우리는 '노년'이란 말을 뭔가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부터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이런 생각도 들었다.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않고 언제나 나이가 들어가기만 하니까.
각각의 계절마다 성장하고 소생하고 사유하고 성찰하고 회상하는 과정들이 나뉘어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 재밌게도 봄˙여름은 그 계절답게, 충만하게 일어나고 매미같이 재잘재잘 시끄럽게 일어나는 이야기가 가득이라면, 가을부턴 시간이 좀 더 빨리 흘러가기라도 한 걸까. 실제 나이가 점점 드니까 하루가 엄청 길게만 느껴졌던 젊은 날보다 더 후다닥 지나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가을, 겨울부턴 그 구성도 짧아진다. 하지만 짧다고 해서 이야기가 아쉽기보단 더 깊어지고 인생의 부족함과 어두운 면까지 받아들이고, 자기의 중심으로 도달하고 완숙하게 나아가는 발걸음이 된다. 브런치에서 읽지 못했던 작가님만의 꿈 이야기(내가 주로 영화나 일상 이야기만 읽어서 잘 못 봤을 수도 있다), 부모님과 이별에 대해, 작별 인사와 정리에 대해 나오는 부분은 울컥하고 묵직하게 한 방 맞은 기분이 들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한 편의 영화와 같다.
영화 제작자가 어떤 장면들을 살려서 영화의 스토리를 정의하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필름을 편집하는 것처럼, 나도 스스로 정한 이야기의 주제와 맥락대로 기억을 선택해서 내 인생을 편집한다. 열심히 살았던 기억을 정성껏 편집해서 마지막에 내 이야기를 잘 완결하고 떠나고 싶다.
나는 떠나도 이야기는 나보다 오래 남을 것이다.
AI가 모든 걸 차지하고 사람의 일자리마저 실제로 대신하기도 하고 빼앗아가기도 하는 세상 속에서 이제는 어딘가에 일하고 소속되는 자리가 아니라 그런 AI를 만들고 활용해야 하는 역할, 나에 대해 창의적인 활동으로 모두 저마다의 창조의 영역이 강조돼야 한다는 이세돌 교수님의 강연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뭔가를 빼앗기고 진다, 사라진다라는, 부정적 측면보다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를 찾아가고 알아가는 것만이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처럼 느껴졌다.
윤병옥 작가님의 이 책에는 귀하게도 각 챕터마다 '성찰 노트'가 담겨있는데 여기 있는 질문들이 묵직하고도 깊다. 자연스럽고 유쾌하다. 글을 잘 쓰는 분들은 아마도 좋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아닐까, 모든 글은 대부분, 여기서 출발하니까. 다시 파랗게 색을 채워가고 페인트칠을 하는 표지의 뒷모습이 작가님이 아닐까 싶게, 비워내고, 정리하고, 다 버리는 노년이 아닌 내 인생을 편집해 가는 즐겁고 유쾌한 모습으로 보인다.
작가님, 북 토크 해주세요.
감상 읽기 시간이 있다면 독후감도 써가서 '저요! 저요!' 또 손들겠습니다. ^^
이렇게나 멋진 인생의 사계절 이야기를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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