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본 영화는 그 자체가 추억이 된다
우리 아빠가 영화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니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빠는 손을 꼭 잡고 대한극장으로 우리를 데려가줬다. 같은 단지에 살아서 잘 어울렸던 보상이, 보미와 함께 할 때도 많았다.
《영구와 땡칠이》, 《영구와 홍콩할매》, 《영구와 공룡 쮸쮸》, 《우뢰매 시리즈 》, … 나는 심형래 아저씨를 좋아한 건 아니지만 이런 영화들을 아주 꼬꼬마시절부터 극장에 가서 다 봤다. 극장이 아닌 무슨 마을 회관 같은 곳에서 바닥에 쪼르르 앉아서 보기도 했다. 사회자(?) 같은 분이 나와서 우리에게 말한다. 어쩌면 이 순간이 두근두근 제일 재밌는 순간이기도 하다.
-자 여러분, 우리 그럼 이제 영구를 불러볼까요? 크게 불러봐요!
이유는 모르지만 일단 시키니까 막 소리 지르면서 영구를 애타게 부른다. 그러면 어김없이 커다란 화면에서 모자라 보이는 영구가 등장해서 우스꽝스러운 팔자걸음으로 헐레벌떡 뛰다가 마치 우리를 코 앞에서 보는듯한 시선으로 말한다.
영구, 없따!!
그러면 그때부터 깔깔깔, 아무 이유 없이 배꼽 잡고 떼굴떼굴 구르는 아이들도 생긴다. 영화가 시작된 것이다. 89년도에 나온 영화니까 진짜 어렸을 때 봐서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심형래 아저씨 특유의 영구 분장을 한 바보 같은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어린 나이에 보면서도 참 유치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유치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동 반사처럼 영구를 애타게 부르고 공룡 쮸쮸랑 헤어질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고, 이런 거에 울다니, 뭐지? 속으로 자존심도 상했는데 중요한 건 무슨 영화든 몰입해서 엄청 재밌게 봤다는 사실이다. 아니다, 《우뢰매》에선 변신 후에 목소리를 깔고 독수리 오 형제 같은 옷으로 갈아입은 심형래 아저씨의 모습은 좀 멋있기도 했다. 영구는 없다고 맨날 후다닥 도망갔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웃었다가 울었다가 늘 마음 한편엔 영구가 '있었다.'
성인이 되선 아무리 혹독한 평이어도 영구에 대한 의리로 심형래 감독의 《디워》를 봤다. 정말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봤다. 와, 이 영화 다시 찾아보니 전국 관객수가 842만 명이 넘다니! 그때도 극장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면서 놀랐는데 '영구'시리즈처럼 웃었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쩐지 좀 맥이 빠졌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뭐, 심형래 감독님은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과 이 많은 사람들은 왜 다 극장에 몰린거지?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작 나도 봤으면서. ㅋㅋㅋ혹평을 받을지도 모르는(사실은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영화를 극장과 유년에 대한 추억으로 감상하는 내 또래 관객들이 많을 걸까, 주변 사람들의 연령대를 기웃기웃 살폈던 생각도 난다.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산만하게 주변을 살핀 것도 처음이었다.
아빠는 극장 안에서 팝콘이나 오징어, 다른 과자 같은 건 사주지 않았지만 영화가 끝나면 따뜻한 군밤도 사주고 친구가 하는 국수 가게에 데려가서 언니와 나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국수도 한 그릇씩 사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 엄마랑 함께 한 극장에 간 기억은 전혀 없지만 아빠랑 주말마다 극장에 간 기억, 보상이 보미 아버님이 우리에게 삼분 햄버거, 오뚜기 카레 같은 요리로 우리에게 요리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유년 시절 35년도 더 된 오랜 이야기지만 아마도 주중에 내내 우리를 돌봐주셨던 어머님들을 대신해서 아버님들께서 주 6일 근무 때라도 서로 번갈아가서 우리를 데리고 극장도 가주시고 일요일엔 '내가 요리사'로 변신하셔서, 맛있는 것도 많이 만들어 주셨다. 대훈 오빠랑 지훈이네는 오래된 LP판과 전축이 있었는데 지훈이 아버님께서 그걸 모으시는 취미가 있어서 전축 구경도 시켜주셨다. 낡아 보이는 전축에서 먼지 낀 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내 옆에서 마치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생생한 소리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우리 목소리를 녹음해 주시거나, 함부로 만지진 못하게 하셨는데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셨다.
영구(는 심형래 아저씨와 동의어나 다름없다)를 졸업하고 아빠가 처음 보여준 외국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는 바로 장 자크 아노 감독의 《베어》다. 지금 궁금해서 찾아보니 1992년도 여름에 나온 작품이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이 영화를 봤다니 '아, 옛날이여!' 하다가 지금 또 우리 큰 아이가 바로 12살, 그때의 나와 같은 나이라는 게 신기하고 재밌다. 이전에 《영구 시리즈》만 주구장창, 혹은 조금 더 업그레이드 됐다고 해도 《콩콩 강시》정도가 있었는데 -요건 극장이 아닌 비디오로 빌려봤다.
사실 《강시》시리즈는 명작이다. 영화의 긴박감과 긴장감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나는 중간중간 걷다가도 갑자기 숨을 참는 연습을 했을 정도다.(강시는 특이하게 숨을 참으면 사람이 있는 곳을 찾지 못했기에) 영환도사의 화려한 손놀림은 또 어떻고. 그때는 인터넷이나 따로 정보를 찾아볼 곳도 없었기에 무조건 한 번 볼 때 집중해서 영화를 본 후에 재밌는 장면을 무한 반복, 돌려보고 그 장면 액션을 여러 번 떠올리면서 따라 하곤 했다.
영화에 사람보다 동물이 더 많이 나오는, 거기다 곰이 주인공인 영화라니, 호기심 많고 상상력 폭발인 나에겐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아기 곰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곰 옆에서 벌을 쫓아 주면서도 자식에게 꿀을 먹이기 위해 벌통을 따주는 엄마곰의 모습이 뭉클했다. 인간이 겪은 시련보다 더 가혹한 곰생의 쓴맛을 다 보고야 만 아기 곰 '두스'. 동물들의 1년은 사람의 1년과 같지 않다는데,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 영화를 보면서 저렇게 험난한 자연에서 혼자 먹을 걸 구하고 잘 곳도 찾아다니면서 살기 위해선 빨리 성장하고 더 빨리 커야겠구나 자꾸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두스도 작고 털이 뽀송뽀송 거리는 아기 곰에서 순식간에 커버린다.
언니랑 나랑 아빠 우리 셋이 오후쯤 극장으로 가서 이 영화를 보고 깜깜해져서 나온 그날이 생각난다. 아빠는 영구 시리즈 같은 건 우리들만 들여보내줄 때가 더 많았는데 공포영화나, 특히 홍콩할매가 나오는 건 내가 무서워해서 같이 봐야 한다고 우기거나, 울거나 했던가, 그런 영화만 결국 같이 봐주셨는데 베어는 아빠도 우리들 옆에서 집중하면서 재밌게 보신 기억이 난다. 나는 영화를 보다가도 아빠가 혹시 캄캄한데 졸거나 잠든 건 아닐까 걱정 된 마음에 아빠 쪽 자리를 한 번씩 쳐다봤는데 그때마다 아빠의 금테 안경이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을 보는 순간, 안심이 됐다. 이따 아빠랑 영화 이야기를 할 생각에 신나기도 했고.
누가 곰을 미련 곰탱이래? '미련 곰탱이'란 말은 잘못됐다, 그치?
극장을 나서면서 나온 아빠의 첫마디, 곰이 이렇게 영화까지 찍을 정도로 영리하고 똑똑한 동물인지 몰랐다고, 대단한 영화라고 하면서 우리 손을 꼭 잡아주셨던 기억도 난다. 나는 대사는 거의 나오지도 않고 곰에 대한 다큐멘터리, 밀착 카메라로 찍은 듯한, 이 영화가 정말 좋아서 밖에 나와서도 대한 극장 간판을 아주 오랫동안 쳐다봤다. 대한극장에서 본 베어, 오늘을 잊지 말아야지 하고. 내 기억엔 그날이 추웠는데 개봉일을 보니 7월이라 아마 좀 더 늦게까지 상영을 한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돌아오면서도 엄마가 죽고 혼자서 당당하게 험난한 숲 속에서 잔혹한 사람들을 피해 살아남은 아기곰 '두스'를 떠올렸다. 사냥꾼들은 곰을 잡기 위해 혈안이고 아무렇지 않게 곰을 죽이려 하지만 곰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웠다. 절벽 끝에서 그냥 좀 더 위협해서 사냥꾼들을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죽이지 않고 그대로 살려둔 걸까. 커다란 숫곰 바트에겐 두스를 구했으니 이미 다른 건 필요 없었던 걸까. 온갖 질문이 솟아나고 떠오른 장면마다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자꾸자꾸 할 말이 많아지고 영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즐거워진다는 것을.
극장에 데려간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빠는 다른 TV프로그램, TV시청 시간에도 제한을 엄격하게 두는 분이어서 언니와 나는 아빠가 퇴근하기 전까지만 겨우 만화영화 같은 걸 볼 수 있었지만 우리를 극장이 아주 아주 많이 데려가주셨다. 주말 밤이면 「토요명화」와 「주말의 명화」 모두 끝까지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 밤마다 아무리 졸려도 끝까지 영화를 봤다. 같이 보던 언니는 졸리다고 방에 먼저 들어가고, 엄마는 KBS 토요명화가 끝나고 MBC 주말의 명화가 좀 더 늦게 했는데 이미 그 이전에 피곤해서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하지만 아빠만은 내 옆에서 크게 코를 고시면서도 늘 거실에 나와 함께 해주셨다. 너무 보고 싶은데 잠이 올 때면 세수를 몇 번씩이나 하면서 결말을 보기 위해서 잠을 깨우곤 했다. 나는 공부를 그렇게 한 적이 없다. 극장에 함께 가준 우리 아빠도 사실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빠가 영화 《베어》를 보고 나서 나에게 해준 그 말 한마디가 나는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아, 울 아빠가 영화를 제대로 봤구나!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어 괜히 뿌듯해지기도 했다.
극장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극장 앞에서 파는 군밤이나 번데기 가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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