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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3장 영웅적인 꿈 -기사도-

by 앤나우

가을에 함께 읽는 독서로 진행하는 책은 요한 하위징아중세의 가을이다. 중고 서적에서 4000원 밖에 안 하는 가격에 나왔기에 '앗싸~!' 하면서 바로 샀는데;;; 첫 문장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하 … 한자로 된 단어들은 물론이고 같은 한국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더듬더듬 겨우 몇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아니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독해력을 의심하게 됐다. 어려운 책을 평소에 안 읽었더니, 도무지 첫 장부터 넘어가지 않아 낑낑 대다가, 결국은 심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연암서가(출판사)에서 나온 책으로 다시 주문을 해야 했다. 처음부터 그나마 읽기 수월하다고 추천해 주시는 연암서가 책을 고를걸;

내가 고른 건 [문학과 지성사]에서 1997년 5월에 나온 책인데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 〔연암서가〕에서 나온 책인데 앞에 머리말에 '대학생'이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고 했는데 역시나 읽기야 읽지만 중간중간 막혀서 몇 번 더 읽은 구절들이 많았다. 아, 대학생 수준도 안되는구나, 나는. 나의 굳어지고 닫혀버린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박았는지 모르겠다.
*'문학과 지성사' 번역가는 불문과 교수이고 '연암'은 영문학 번역가가 했다고 하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늘 역사 지식이 부족해서 헤매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서양사 책을 읽고 접한 적이 없기에 낯설어서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사학과를 나온 혜진쌤이 책에 대해 너무 어렵게 접근할 필요가 없다며 말 그대로 당시 중세 사람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놀이의 정신, 문화 속의 놀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걸 찾아가면서 읽으면 좀 더 쉽게 접근하며 읽을 수 있다고 했다.





혜진쌤이 이 책에서 꼭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중세 사람들의 당시 사고방식이 담긴 <운명의 수레바퀴> | 혜진쌤 책
열정적이고 난폭한데 눈물을 자주 흘리는 경향이 있었던 중세 사람들의 성향. 어쩌면 툭하면 우는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정서적인 부분에선 중세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혜진쌤의 특별한 과외(?) 덕분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책이 하나씩 베일이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운명의 수레바퀴>에 대해선 고대와 중세인들은 전혀 다른 각각의 해석이 있었다고 한다. 뭐 이것도 후에 생긴 역사적 편견이라 해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럼에도 역사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하고 놀랍다.





첫 장부터 지식의 방대함이 느껴진다.


하나의 챕터에서 다른 이야기로 옮겨가는 의식의 흐름대로 쓰이는 기법도 좀처럼 따라가기 힘든데 검색해서 알고 싶어도 나와있는 정보가 많이 없어서 답답한 부분도 많았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역사(한국사)는 사건 위주의 정확한 년도, 인물이 중요하게 생각됐다. 거기에 덧붙여 뚜렷한 교훈 이런 게 중심이었는데 서양사는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슨 생각을 했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이게 어떤 식으로 변형했고 반영됐는지를 토론처럼 펼치는 것 같았다.(겨우 한 권을 끝까지도 아니고 '조금'읽은 내가 하는 분석이라 우스울 수도 있지만 일단 내 느낌은 이렇다) 이 낯선 느낌에 조금은 적응을 해야 나도 거기에 발을 담그고 읽는 재미에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 사람들의 삶과 신분, 행운과 불운에 대한 생각은 물론이고 중세인의 상상에서 존재하는 인간사까지 그려보는 과정이 낯설지만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접한 문화 속에서도 다양하게 드러나고 반영됐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다. 운명을 대하는 방식도 그렇지만 중세 사람들의 '감정'을 상상해 보고 조금이나마 찾아간다고 생각하니 이런 부분은 나에게 확실히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를 끈다.





장이(혜진쌤의 큰 아이)의 책꽂이에서 발견한 중세에 대한 참고 책 | 5학년 아이의 책장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나와 혜진쌤이 발제를 맡은 부분은




제3장 영웅적인 꿈 - 기사도에 관하여



바로 '기사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드래건 하트》, 《킹덤 오브 헤븐》, 《잔다르크 》, 《기사 윌리엄》, 《비지터》등등 중세 기사가 나오거나 중세 기사가 현대로 나온 이야기들을 재밌게 봐서 재밌을 줄 알고 하겠다고 했지만, 양도 방대하고 역시나 어려웠다. 하하하. 이 책은 영화가 아니니깐.




요약하면 중세말의 기사는 귀족 사회, 상류층의 놀이, 낭만적 환상으로 변모했다는 게 주요 내용이고 기사도의 '영광'이란 한낱 공허한 환상일 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단지 양식, 의식, 아름다우나 불성실한 놀이에 지나지 않는!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결코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군주든 귀족이든 고위성직자든 시민이든 역사를 주도하는 사람은 아주 계산적이고, 냉정한 정치가 혹은 상인들이었다. … 하지만 문화의 역사는 인구 숫자나 통계 수치와 관계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꿈과 고상한 삶의 환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

중세의 역사를 정치와 경제의 문서들만 가지고 서술한다면, 그 시대의 역사가 그런 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사도의 이상은 아무리 인위적이고 진부하게 보일지 몰라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중세 후기의 정치적 역사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p189 중세의 가을 제3장 영웅적인 꿈 중에서




'문화의 역사'에 주목하자면 여기서부턴 인위적이고 진부한 생각, 허황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회 전반에 "기사도"가 끼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뚜렷한 사건, 년대가 나오지 않아도 이렇게 역사 이야기를 씨실과 날실로 촘촘하게 교차하며 짜내려 가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솔직히 놀라웠다.

**서양사를 제대로 처음 읽어서 그렇습니다;;; 부끄럽게도.




중세 후기 문화생활이 사회적 놀이에서 어떻게 변모했는지 다양한 문학 작품과 기록물의 사례에서 나온 점도 재밌고 무엇보다 '기사' 자체를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하의 하나의 거대한 '역할극'으로 바라보는 시점이 신선하고 놀라웠다. 대단한 사명감과 진지한 놀이에 빠진 기사들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늘날처럼 인터넷이나 스마트 폰처럼 손안에 들어와 있는 나만의 세상에 빠진 게 아니라 무료하고 심심하고 뭔가는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빠져있는 역할극 자체가 기사의 충성심 도덕심, 정의감과 사명감이고 이렇게 시작된 하나의 역할극이 사회 전반의 큰 토대를 만들어왔다. 토너먼트 같은 게임, 단순한 놀이에 그치지 않고 '기사단'이라는 소속감을 만들어 연대의식이 정치와 경제로까지 크게 확장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연결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뚜렷한 사건이 없어도 이렇게 역사를 짚어서 당대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이야기가 어쩐지 조금은 재밌어지려고 한다. 빠져든다. 중세 기사의 '파 다르므(토너먼트)'나 기사단의 상징이 된 십자가나 별 같은 상징적인 그림이 나와는 뭔 상관이 있었는데? 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말이다. 연극배우 같은 진지한 설정, 다양한 맹세들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 별게 아니라는 허무함, 이런 부분에서 너털웃음도 나오고 그럼에도 이런 충성심과 선을 향한 의식이 도덕심과 윤리가 사회 전반을 세우는 근간이 됐다는 부분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대단한 군주들도 남의 싸움 구경은 재밌어 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 책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 모습과, 중세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했다.





저마다 암묵적 합의하의 역할극이란 말이 웃기면서도 마음에 와닿아서 이 부분을 나누는 중에 심선생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져주셨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알게 모르게 역할극을 하면서 사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선생님께선 그런 생각을 하셨다고. 이 질문과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사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역할'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엄마라는 자리만 해도 엄마의 역할은 요리사, 보건 담당관, 가르쳐주는 선생님, 해결사, 상담사, 친구, 등등 뭐가 참 많다- 이 역할을 이어나가는 근간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느냐가 참 중요한 것 같다. 사랑과 신뢰가 바탕이라면 진지한 역할에 빠져서 훈육을 하거나 가르치더라도 우스울 게 전혀 없겠단 생각도 들고. 역할만 강조해서 책임은 지지 않고 의무만 겨우 해내려고 하는 앵무새 같은 배우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다짐이 들었다.





중세는 아니지만 중세 기사에 심취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저 거대한 풍차와 싸우러 가면서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도전하는 모습이 단순히 '풍차'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구나!



그는 진짜 끊임없이 돌아가면서도 매달리게 되는 정해진 운명이나 굳건한 숙명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3장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돈키호테'의 진심을 다시 살펴보고 싶어졌다. 정해진 숙명에만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앞으로 나아가는 돈키호테를 다들 미쳤다고 하지만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해서가 아닌, 틀을 깨고 나가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아예 부숴버리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는 기사! 진짜 기사도를 실천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냥 이 책을 읽다가 갑자기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장이의 책꽂이에 있는 다양한 책도 한 권씩 빌려보고 싶고, 가을은 쇠락하고 단풍도 낙엽이 되어 전부 떨어지지만 열매를 남기는 것처럼 지금은 다 사라져 버린 중세의 흔적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남아있다고 갑자기 사그라들었던 열정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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