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바퀴는 네 개

우리가 사용하는 바퀴는 모두 몇 개일까

by 앤나우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영국에서 온 언니와 스무 살 조카와 함께 셋이 일본에 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름 알차고 빡센(?) 일정을 소화하고 꽉 차게 놀 수 있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해서 밤에 돌아오는 일정이라, 꽉 찼다는 표현 그대로 시간을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곳곳에서 느낀 점들을 다이어리에 기록 해났는데 덕분에 나도 글감이 풍부해진 느낌이 든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내가 있는 공간과 주변 사람들만으로 채워진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그냥 쉽게 보고 넘긴 것들도 다르게 느껴지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해 보는 기쁨도 있다. 나는 이번 여행이 그런 점에서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늘 하루살이로 하루에 해야 할 것을 따라가고 하기에도 급급했던 내가, 아이들 없이 오랜만에 가진 자유의 시간이었고(*고마워, 신랑!!)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고 가깝지만 먼 낯선 도시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2년째 배우고 있는 만큼 일본어를 많이 사용해 보기도 했다. 물론 질문까지는 이래저래 했지만 돌아오는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다시 영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될 수 있는 대로 현지에서 언어를 많이 사용해 보고자 했다.








여행, 하면 제일 먼저 뭐가 떠오를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나는 가장 먼저 '이게' 떠오른다.

여행과 마실의 차이점도 바로 이게 아닐까 싶다.



캐리어



여행의 시작은 어쩌면 캐리어에 꼭 필요한 짐을 담을 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도 싶다. 일상에서 꼭 필요한 속옷이나 안경, 렌즈를 챙겨야 하고 갈아입을 옷은 물론이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을 한 번 더 가려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짐을 엄청 못싸는 나 역시 그렇다. 짐 싸는 게 싫지만 여행을 가려면 꼭 싸야 한다. 계획형이 아니라, 젊은 날 유럽 여행을 하기 전날까지도 짐을 안 싸고 그날 새벽에 후다닥 욱여넣기 식으로 밀어 넣은, 나 자신을 반성한다. 신랑은 이런 내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든다. 신랑은 출장 갈 때도 일주일 전부터 캐리어를 꺼내서 필요한 것을 먼저 담아놓고 확인하는 성격이기에 먼 장거리 가족 여행이 잡힐 때면 적어도 일 이주 전엔 준비하기 위해 캐리어를 척하고 꺼내 놓는다. 결혼 초반에는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캐리어를 보는 것만으로도 걸리적거리고 뭔가 갑갑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이를 낳으면서 깨달았다. 캐리어에 담는 것부터 여행의 시작이라는 것을.



기저귀부터 수유 도구까지 다 챙겼지만 꼭 한 두 개씩 빼먹는 게 생겼고 그걸 대체하거나 사기 위해 현지에서 조달하거나 구매하는 과정이 번거로웠기에, 짐은 미리미리라는 생각, 적어도 그날 새벽에는 싸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완벽하게 100%를 채운다는 느낌보다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꼭 있어야 할 것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다 보면 활짝 열린 캐리어 속, 채워지는 물건들이 그 답을 건네준다.


나는 여행 가기 전에 거기서 비는 짬짬이 시간 동안 읽을 책을 신중히 고르는 편이라, 가장 먼저 책을 고른다. 내가 고른 책은 곤도 후미에 작가의 『캐리어의 절반은』이라는 책이었다. 심선생님께서 빌려주신 책인데 다시 일본에서 읽고 싶어 졌기 때문에, 그때그때 끌리는 책으로, 무겁지 않게 한 두권 정도만 고른다.



책에도 등장하는 파란 캐리어. 이번 여행에서도 재밌게 읽었다. 도쿄의 모습은 하나도 안 나왔지만 일본인들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이 이야기 역시 캐리어로 시작한다. (*책의 리뷰는 다음에)



여행을 많이 다녀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바로 캐리어를 끄는 방법이다.

캐리어 바퀴는 네 개인데 공항에 도착해서 보면 의외로 네 바퀴 모두 굴리면서 이용하는 사람보다 한쪽으로 힘을 줘서 두 바퀴로 끌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나 역시 이렇게 낑낑 한쪽으로 짐을 끄는 사람이었다. 울퉁불퉁하거나 평탄하지 않은 길은 두 바퀴가 유리할 때도 있지만 캐리어는 바퀴가 처음부터 네 개로 제작된 만큼 그대로 밀면서 가져가는 가방인데 자꾸 깜빡할 때가 맞다. 물론 때로는 에스칼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에서는 그냥 번쩍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이렇게 계단을 마주할 때면 먼저 한숨이 푹푹 나오지만 그래도 어떻게 멈춰, 번쩍 안고 내 몫의 짐을 들어서 계단을 내려간다. 조금만 참으면 다시 돌돌, 바퀴는 굴러간다. 매끈매끈한 바닥엔 힘 들일 필요가 없이 네 바퀴 모두 돌돌돌 끌어주면 그대로 손잡이만 앞으로 밀면서 짐을 끌고 갈 수 있다. 내가 끄는 방향의 두 바퀴만 사용하면 물론 그렇게도 캐리어는 끌리지만 그만큼 힘도 더 들어가고 손목에 무리가 간다.



두 바퀴, 혹은 네 바퀴로 끌려가는 캐리어들을 마주하면서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온전히 네 바퀴로 살아내고 있는 걸까, 하는 질문을 해봤다.


내 안에 어딘가 두 바퀴가 더 있는데 무리해서 늘 사용하는 것만, 습관대로만 쓰고 있는 건 아닌지,

그저 밀듯이 가기만 하면 되는데 쉽게 밀고 갈 수 있는 일에도 더 힘을 준건 아닌지, 이번 여행지에서 내가 첫 번째 마주하게 되는 물건과 질문은 바로 오래된 캐리어였다.


숨겨진 두 바퀴가, 아니 당연히 있는데 잊고 있는 바퀴 두 개가 어쩌면 우리가 놓친 것들, 작은 여유와 진짜 내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커다랗고 무거운 짐엔 고루 분배된 바퀴 네 개가 가장 안정적이듯이 나를 끌고 가고 있는 또 다른 바퀴를 찾는 게 인생이란 여행에서 숙제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니 답을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여행을 통해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캐리어를 끌고 가는 길도 나름 험난하다. 우리의 인생길처럼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에스칼레이터가 없는 역이 많아서 캐리어를 몇 번이고 들고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하지만 평탄한 길에선 한 번 네 바퀴 모두 착륙해서 짐을 끌어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무거운 짐이 더 이상 짐이 아니라 나와 함께 나가는 가방이란 생각이 든다. 동반자 같다는 기분도 들고, 호텔에 도착해서는 그냥 세워놓기만 해도 뭔가의 익숙한 내 가방이 우리를 지켜주는 가디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의 제목처럼

캐리어의 절반은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나는 과연 네 바퀴 그대로 굴러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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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조카가 끌고 가는 캐리어 |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자리에 놓는 캐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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