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없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목표 없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자발적인 공부, 스스로 하는 공부를 꿈꿨던 것 같다.
한 번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의 갈증인지도 모르겠고 지금, 현재, 내 삶 속에서 날마다의 '숙제거리'를 찾아서 작은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일 년 넘게 날마다 줌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스터디 모임을 했고 악기도 배우기 시작했다. 악기를 배우면서는 처음으로 연주하는 기쁨도 맛봐서 같은 곡을 집에서 몇 번이고 불었다. 합주의 즐거움을 느낀 첫날의 기억도 생생하다. 앞집에 사는 은진이가 어디선가 들리는 오카리나 소리가 참 좋아서 귀를 기울였단 이야기에 깡충깡충 뛰고 싶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내가 놓친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의 한계, 현재 나의 상황, 우리 아이들의 방학이었다.
아이들 두 녀석의 방학이 시작되자 세끼 밥을 차리고 돌아서면 간식을 먹이고(엄청 잘 먹고 혈기왕성한 아이들이다ㅎㅎ) 학원가는 길로, 놀이터로, 바깥 활동으로 따라다니는 삶 속에서 스터디를 하기가 버거웠다. 그래도 하고 싶었던 게 '스터디'이기에(정말 그랬다) 살림을 놓아버렸다. 정리하고 청소하기보단 허우적거리며 겨우겨우 아이들 먹을 것만 챙기면서 월요일부터 이어지는 강행군 세 번의 수업을 듣고 화요일 밤 일본 회화 수업까지 이어갔는데
나는 그다지 부지런한 타입도 안되고 살림을 밤새면서까지 싹싹하고 완벽하게 하는 솜씨도 아니기에 사실 마음의 찌뿌둥하고 찜찜한 구석은 어딘가 남았던 것 같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신랑은 눈을 뜨고 간단한 운동을 하고 아침 시간을 활용해서도 보이는 대로 청소며 설거지 같은걸 항상 함께 해줬다. 저녁엔 퇴근하자마자 따뜻한 밥도 가족의 환대도 받고 싶었을 텐데 내가 늘 줌을 켜고 스터디에 매달려 있어서 월, 화는 아이들을 챙기며 내 눈치를 보는지도 몰랐다. 하!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신랑의 불만. 너랑 같이 스터디하는 분들은 너랑 처지가 다르지 않냐는 이야기.
수업을 오전에만 하면 안 되냐는 이야기에 처음엔 서운했고, 나도 먼저 움찔하고 찔려하던 찰나에 짜증이 먼저 터져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랑이 나에게 화를 낸 게 아니라 자기감정을 표현하고 이야기한 것뿐인데 나는 왜 화가 났을까를 생각했다. 그래, 신랑은 비난하려는 어조도 아닌 본인이 힘든걸 힘들다고 털어놓은 건 뿐인데 오히려 내 마음이 움츠러들고 미안하고 죄책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나에게 부족한 살림살이, 살림꾼으로서 자리보다 공부하기만 좋아했던 마음이 찔렸던 건지도.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난 대체 무엇을 위해, 왜 공부를 할까?
비교적 빠른 답이 나왔다. 지금 심선생님을 통해 하는 스터디 모임, 독서 모임, 미술사 공부, 일본어 회화와 오카리나를 배우는 시간이 나에게 즐겁기 때문이다. 어떤 대가도 넘어야 할 고비도 없이 내가 스스로 먼저 책상에 앉아 읽고 또 읽고 배워가는 시간의 기쁨을 참으로 오랫동안 꿈꿔왔는데 요 몇 년이 나에게 그런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함께 오랜 시간이어왔던 멤버들은 한 분 한 분 정말 좋은 분들이 많았다.
지식을 알아간다는 게 더 넓은 세상에 대한 갈망이라는 것을 알았고 조금씩 알게 되는 역사와 미술, 언어를 통해 넓은 세상을 꿈꾸고 나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고 싶었는데 점점 나는 월, 화부터 이어지는 스터디에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아직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남들보다 책도 붙잡아야 하는 시간이 길었고 숙제를 하루살이처럼 하는데도 늘 시간이 부족했다.
허우적거리고 아쉽고, 그런데 두 시간가량 수업을 마치면 마음이 개운하고,
이런 기분을 분명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수업 전 마음이 콩닥콩닥 걱정이 되다가도 수업이 끝났을 때 그 개운함을.
나는 멀티도 안되지만 살림과 아이들 둘을 다 챙겨야 하는 직접적인 상황이 되니 퇴근도 늦은 신랑의 손까지 빌려 스터디하는 게 참말 버거운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엄마가 저녁까지 수업을 하는 월, 화에는 신랑이 나를 배려해 주기 위해 아이들을 밖으로 데려가서 마트를 돌거나, 놀이터를 돌거나 아이들 목욕까지 챙겨준 걸 생각하면 얼마나 피곤했을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 신랑도 그렇다. 회사 안에서 자신의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정점에 이르는 시기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연말과 새해가 되면 주변 동료, 상사들의 승진과 누락을 보며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그 와중에 해야 할 집안일과 아이들까지 맡는 주말 후 월요일, 화요일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어젠 내가 좋아하는 일본어 회화가 있는 시간이었는데 공부 시간을 포기하고 선생님께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한 번 쉬어가기를 하면서 신랑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고등어를 굽고, 김치찌개를 하고 아이들 먹을 반찬도 만들고 모처럼 식탁에도 식구들과 같이 앉았다. 신랑 역시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멀리 영국에서 온 우리 언니와 조카와 함께하는 시간까지 겹치면서 내 마음이 얼마나 분주하고 바빴을지도 이해해 줬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신랑이 있었기에 사실 지금까지 공부도 할 수 있었고 글도 쓸 수 있었고 시간을 내서 내가 책도 읽고 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고 타인을 이해하고 싶다면서 정작 내 옆에 소중한 가족들 말을 흘려듣고 소홀하고 무심히 지나친다면 나는 진짜'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나보다 더 어린 혜진쌤을 빼면 대부분 장성한 자식을 키우시는 분들이고 외국에 거주하시거나 저마다 각각 다른 도시에서 여행도 많이 다니시며 아주 작고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까지 직접 가본 경험이 많은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이야기'가 언제나 설레고 즐거웠다. 재밌었다. 나 역시 어쩌면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이런 배움이 꾸준히 있길 꿈꿨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전부 소화할 수 없는 일정과 내 처지를 떠올려보면 내 앞에 아이들을 좀 더 챙기고 신랑을 맞이해 주고 함께 해야 할 살림을 좀 더 신경 써야 할 때도 분명 맞다.
그래, 그리고 나도 글을 쓰고 내 글 쓰는 시간도 만들어야지.
그건 사실 어느 누구를 위한 '희생'이라기 보단 나의 선택과 또 다른 나의 삶이기도 하니까.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다려주고 참아주고 이제야 이야기해 준 신랑에게도 감사하고 오랜만에 서로 간의 이야기를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이들 학기 중에 오전에 내가 할 수 있는 독서모임과 스터디를 할 것
*방학 중엔 좀 쉬어가기를 하면서 아이들과 신랑과 시간을 보낼 것
*결론은 스터디를 줄이고 선택과 집중으로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겠다고 이야기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땐 내가 우선 해야 할 자리를 다시 한번 점검해 봐야겠다.
이제 다음 주면 언니와 조카들이 있는 영국으로 출발한다.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영국에 가서 아이들과 더 넓은 세상도 구경하고 그곳에서의 일상의 기쁨도 누리고 반가운 가족들과의 끈끈한 정도 나누고 여행도 하고 그렇게 삶을 살아갈 것이다.
공부가 별거 없다.
하지만 공부를 하니 놀라운 건 다짜고짜 '버럭'의 마음보다 나의 부족함을 들여다보고 내 마음을 이전보다 쉽게 인정하고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내 마음을 꺼내길 주저하지 않지만, 이전과 달라진 건 상대방의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 졌다는 점이다. 이런 나의 변화에 나 역시 새로운 기분이 들고 놀라웠다.
조금씩,
앞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멈춰있는 것 같은 시간에도 삶은 흘러가고 살아내는 자체가 또 다른 배움이다. 나보다 작은 아이들에게서도, 귀한 신랑을 통해서도 나의 마음에 공감해 주는 벗과 스승을 통해서도 내 마음을 그저 가만히 들여다 보는걸 통해서도 나는 배우는 중이다. 나는 이런 공부를 하고 싶었나 보다.
#왜공부를할까
#살림빼고다재밌는걸까
#목적없는공부
#긴긴겨울방학
#이제곧영국으로고고
#몹시쓸모있는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