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건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건
뭐, 뒷모습 자체만으로 편안함을 줄 수도 있지만
불안, 외로움, 채워지지 않은 단면, 궁금한 앞모습
따라가서 확인하고 싶은 얼굴
그걸 알았을 때 또 다른 나의 표정
어두운 그림자이자 빛
빛이 있기에 생기는 그림자
같은 거라고 여겼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함메르쇠이'의 그림을 봤다. 함메르쇠이의 『Interior』(1899)
꽉 낀 검은색 옷에 앞치마를 두른듯한 여인의 뒷모습. 창백한 목덜미, 제목은 「인테리어」인데 사실상 뭐 구경할만한 것도 없어 보이는 실내, 텅 빈 식탁, 여인은 왜 뒤돌아 있는 걸까. 서있는 자세부터도 살짝 불편해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하지만 뒷모습이기에, 펼쳐지지 않은 앞모습에 내 얼굴을 대입하기 수월했고 어느새 같은 공간에 서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됐다.
Ida Ilsted '이다'는 함메르쇠이의 아내로, 코펜하겐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우리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서 있다. 예술가는 시적인 실내 장면으로 유명했으며, 종종 이야기를 암시할 수 있는 물건과 표정을 배제했다.
심심해 보이는 그림에서 느껴지는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상징, 더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함께 간 언니가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이 그림은 우리 예나가 생각난다. 예나 생각이 나.
라고 말했다.
예나, 우리 예나는 언니의 둘째 딸로 자폐아인데 벌써 훌쩍 성장해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여전히 천진한 아기 같고 모든 행동, 감정 표현에 꾸밈이 없다. 아니, 굳이 왜 숨겨야 하지,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 겨울 방학에, 언니가 있는 윔블던 집에서 두 달 가까운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나도 오랜만에 예나를 가까이서 보고 밥도 챙겨주고 놀이터도 가고 목욕도 시켜 줄 수 있었다. 돌아온 지금에서야 그 시간들이 그립고 얼마나 소중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예나는 가끔 거실 TV 큰 화면에 그 애가 좋아하는 《옥토넛 탐험대 》의 버나클 대장을 비롯해서 모든 대원, 심지어 거기 나오는 탐험선 X며, 물고기까지 뒷모습으로 설정해 놓고 띄울 때가 있었다. 아끼는 인형 피규어들도 전부 뒷모습으로 돌려서 세워놓고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인형 전체를 뒷모습으로 바꿔 놓을 때도 종종 있었기에 나도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곤 했다. 《버블 거피(Bubble Guppies)》에 나오는 등장인물 캐릭터를 특히 좋아했는데 예나 방을 치울 때면 걔네들이 어김없이 뒤를 돌아서 뒷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익살스럽고 재밌는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뒷모습 그대로 나를 환영해 줄 때가 많았다.
누군가와 소통하지 못하는 벽과 단절감, 자기만의 세계를 예나도 어렴풋이 아는 걸까. 아는 게 아닐까.
오가는 대화를 그 애와 나눌 수 없기에 물론 나는 그 답은 영원히 알 수가 없을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뒷모습'이 누군가에겐 그렇게 편안함과 친숙함으로, 때로는 찾고 싶은 모습으로도 비치기도 한다는 거다.
장애가 있기에 그냥 그대로 다 알 수 없어도, 온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애정하고 아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나를 통해 배웠다. 실제로 예나의 모습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고 순수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계산되지 않은 순진 무구함이 귀엽고 예뻤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모진 말로 상처 주고 죄를 짓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아이는 그런 죄의 굴레는 넘어서는, 순수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뒷모습의 불안함 하나를 걷어내면 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영국에서 나는 주저리주저리 아무 답도 없는 예나에게 내 이야기를 중얼거린 적도, 그런 날들도 많았다. 아무 반응이 없어도 옆에 그대로 있는 그대로 날 봐주고 가만히 있어주는 그 모습이 왠지 울컥하면서도 편안했다. 반응을 해주고 답을 해주는 나의 두 아이들, 가까이 있는 언니보다 어느 순간엔 예나에게 더 의지하고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안아주고 어떤 날에 눈물을 흘리면
'마니 아파요? 마니 아파, 마음이?'이런 말도 건네주곤 했는데. 기계적으로 어디서 말을 따라 하는 듯한 그 목소리와 억양에서도 따뜻한 속마음이 전달되는 듯했다. 이 상황에서 나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포옹을 해주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괜찮다, 괜찮아'라고 말해주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괜찮아졌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예나를 보듯 대하고 기다려주고 있는 그대로 봐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상처가 있고 장애가 있고 그런 건 눈으로 보이지도 않고 내가 판단할 수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뒷모습 그대로라도 봐준다면 때론 그 사실이 누군가에겐 더없이 따뜻하고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게 아닐까.
내셔널 갤러리 그림 앞에 나도 한참을 서있었다.
역시 나는 더 알고 싶고 앞모습이 궁금하지만(이건 나의 기질적인 거겠지만)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뒷모습도 좀 지켜봐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봤다. 내 멋대로, 감정대로 누군가를 판단하기보다 저마다 가진 섬세한 아픔과 과거를 그대로 들어주고 또 기다려주는 사람이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