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요, 우린 자유로운 존재니깐
납작하고 얇게 구운 반죽 사이에 조린 팥소를 넣어 만드는 일본의 전통 단팥 빵 '도라야키'를 파는 작은 가게. 낡고 작은 가게는 운영자가 따로 있고 가게에 속해서 일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는 중년의 센타로가 일하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전단지를 보고 도쿠에라는 할머니가 찾아온다.
「나이제한 없음 」이라고 했지만 지나치게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에게 거절 의사를 밝히며 도라야키를 하나 건네는 센타로. 다음날 센타로에게 빵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팥이 좀 더 맛있으면 좋겠다며 자신이 직접 요리한 팥소를 가지고 다시 찾아온 도쿠에. 벚꽃이 핀 날 이들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본 영화는 생각보다 너무 잔잔하고 지루해서 젊은 날 처음 접했을 땐 생소한 감정이 들곤 했다. (사실 나는 할리우드 키드이기도 했다.ㅎㅎ)
뭐지? 이게 영화인가? 기승전결도 나눠져 있지 않은 것 같고 또렷한 임팩트도 긴장되는 서사나 갈등도 나타나지 않아서 오히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고 이상한데 자꾸만 보게 되네, 뭘까.
어쩌면 이런 부분이 늘 하루하루 반복되면서 똑같아 보이고 별거 아닌 우리네 인생과 닮아 보였다. 미묘하게 다른 매일매일이 펼쳐지는 우리 인생도 이렇게 별거 아닌 거에 웃고 감정이 요동칠 수 있구나, 맞아, 그랬지. 섬세한 감정과 시선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려왔다. 보다 보니 울고 있고 끝까지 다 봤을 땐 평범하지만 가슴이 콩닥콩닥 또다시 희망이 생긴다.
오랜만에 낮에 본 잔잔한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도 그런 영화다.
도쿠에 역을 맡은 ‘키키 키린’이란 배우를 좋아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서 처음으로 이 배우의 연기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장남의 제사를 위해 가족이 함께 모인 그 하루를 그렸는데 역시나 특별한 사건도 반전도 없는 일상이 이어진다. 특이하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 영화엔 음악도 거의 없어서 진짜 그 집에 어디에선가, 부엌이나 혹은 다다미 한편에서 나도 뭔가 집안일을 거들다가, 이 가족의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 유쾌하지만 상실의 아픔을 지닌 점점 늙어가는 어머니 역할을 어쩜 이렇게 연기할 수 있을까. 다른 배우들의 연기보다 키키 키린의 연기가 인상적으로 와닿았다. 꾸미려 하지 않은 자연스러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귀엽고 다정한 모습, 상대방과 이야기할 땐 눈이 살짝 사시가 되곤 하는데 그 눈빛마저 화면 너머에 있는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이상하게도 자꾸 그녀의 연기 앞에서 멈칫하게 된다. 2018년에 세상을 떠나셔서 지금은 그녀의 연기를 볼 수 없지만 이렇게 다시 오랜만에 또 놀라운 연기로 마주하게 되니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TV로 다시 마주하게 되는 배우의 모습을 보니 반갑고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다.
일상이 평범하게 보일 뿐, 사실 그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는 실로 어마어마하고 놀랍다.
도라야키는 고급스러운 일식집에서 식사 후에 디저트로 처음 먹어본 기억이 난다. 작은 팬케이크 두 조각이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안에 있는 팥소는 너무 달아서 팥을 전부 덜어내고 빵만 먹었다. 원래도 나는 팥빵, 붕어빵, 팥죽, 팥칼국수, 팥빙수 같은 요리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팥을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앙꼬'없는 찐빵이란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더 맛있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팥은 나랑 궁합이 안 맞는 음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팥으로 시작해서 팥으로 끝난다. 내내 팥을 졸이고, 좋은 팥소를 만들기 위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주걱을 휘젓는다. 허허, 마지막까지
도라야키 사세요!
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화다. 하지만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역시나 나를 또 울게 만드는 건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고 귀엽게 웃으며 비법은 '안 가르쳐주지요'라고 말하는 키키키린 할머니 때문이다. 눈물을 삼키고 보다 보니 공원에서 센타로가 외치는 도라야키 하나를 어쩐지 사 먹고 싶어졌다. 눈물과 땀으로 만들어진, 어쩐지 달고 짜고 단단하고 뭉근한 단팥 소를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진다.
단맛 속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가고 싶어진다.
센타로는 딱 봐도 장사엔 별로 마음이 없어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다. 중간중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쉬는 시간마다 피우는 담배연기를 보면 마지못해, 어쩔 수 없지만 견디면서 가게를 지키고 있구나 이런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그의 일상에 귀찮고 조금은 어딘가 덜떨어져 보이고 느린 할머니가 스며든다. 거부하지만 거부할수록 단단하게 끈적이고 뭉쳐지는 앙, 팥소처럼 센타로는 그렇게 조금씩 도쿠에 할머니에게 빠져든다. 오랜만에 용기도 내어본다. 마음을 연건 지는 모르겠다. 결국 하고 싶었던 그의 말은, 솔직한 고백은 임종 직전의 할머니 귀에 들어가진 않지만 독백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거기엔 또 그만의 인생 이야기가 숨어있다. 단맛도 쓴맛도, 짭짤한 맛도 아닌 뭐라고 하나의 맛으로만 정의할 수 없는 인생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건 언제나 자기 마음을 100% 전부 열어서 보여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 시기가 서로에게 조금씩 다를 수도 있고 닿지 않을 수 있지만 함께 하는 시간만큼은 서로 웃고 울고 위로해 주고 조용히 손잡아주면 그거면 된 거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누군가 간절히 일자리를 찾고 그래서 시급보다도 훨씬 싼 일당으로 일해도 좋으니 제발 일을 하게 해 달라는 할머니 요구가 궁금하면서도, 뭐야, 어떻게 일을 해 싶다가도 또 언제 어떻게 나와 인연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재잘재잘 수다스럽지도 않고 학원에 다니지도 않고 조용하게 자리에서 웃고만 있는 중학생 소녀 와카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히 지나가는 단골손님인 와카나에게 센타로와 도쿠에는 언제나 실패해서 망쳤다면서 남은 도라야키 빵을 싸준다. 조심스럽게 봉지에 싸가지고 가서 다시 그 맛을 음미하고 외로운 마음이 들 때면 답답한 마음이 들 때면 부스럭 봉지를 꺼내 조금씩 빵 한쪽을 베어 문다.
카나리아를 바라보는 중학생 소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중년 아저씨, 그리고 늘 웃는 인상의 할머니 - 이 셋의 조합이 무슨 영화가 될지 궁금해서 보고 있노라면 그냥 팥을 조리고 팥빵을 파는 삶 하나에도 웃다, 울었다, 잔잔한 감동이 느껴진다. 눈물이 난다.
신기하다. 사랑하면 그 사람을 좀 더 관찰하게 되고 언제 그 사람이 웃고 있는지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지 궁금하게 된다. 영화 속 모든 인물 한 명 한 명의 시선과 마비되고 다친 손, 실패한 빵 하나에도 헛된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잘 먹고 좋아하는 음식 하나, 좋아하는 노래 하나에도 사연은 있지만 누가 그걸 귀 기울여주고 들어줄까. 안 들어주면 또 어때. 나는 내 인생의 스토리를 제일 잘 알고 차곡차곡 쌓아온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도쿠에는 팥을 삶을 때 우선 건강하고 맛있는 팥을 고르는 걸로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떫고 이상한 맛이 날까 뭉그러지고 모양이 삐뚤어진 팥은 가려낸다. 아프고 불편한 손으로 하나하나 가려내는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진심으로 배우고 있는 센타로의 모습도 달라 보였다. 성장하고 있구나, 좁아터진 가게의 답답함이 아니라 어느덧 시선은 블라인드 너머 환하게 핀 벚꽃으로 새소리로, 재잘재잘 웃고 있는 사람들 소리로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요, 우린 자유로운 존재니깐.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해도 살아갈 의미가 있는 거야.
생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에도 '자유롭게' 살지 못했던 지난날에 비해 지금 세상을 새처럼 날고 가고 싶은 곳에 걸으며 자유를 누린다는 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온몸으로 보여줬던 도쿠에. 도쿠에 할머니의 대사를 듣고 있으면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키키 키린의 모습과도 겹쳐 보여서 더 눈물이 났다. 가게에서 일을 하다가 창문을 여는 것도, 새를 좋아하는 것도, 벚꽃을 사랑하는 것도 전부 하나하나 의미가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한 인물의 생애 전체에서 가장 소중한 걸 찾아가는 영화야 말로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타로의 이 가게에 속박된 짧은 사연을 듣고도 도쿠에는 어설픈 위로나 자기 말을 보태는 대신 짧은 말로 대신한다.
인생마다 사정이 있지 열심히 살아보자고
팥소를 졸이면서 적당한 타이밍에 맞게 물엿도 넣고 소금도 뿌리면서 팥들에게 중얼거린다
힘내 힘내 할 수 있어!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잘못 대답하는 센타로에게 도쿠에는 팥들에게 하는 말이야,라고 환하게 웃으며 팥에도 응원이 필요하다고 말해준다. 정성스럽게 진심으로 팥을 대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무겁고 아프지만 영화에선 그 자체도 슬프게 다루고 있지 않다. 우리끼리 늘 나눠먹고 해 먹었던 걸 다시 세상에 꺼낸 그 과정, 더 넓은 세계로의 확장이 아주 작은 용기 하나에서 출발하면 됐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가게가 없어도 어디서든 팔 수 있지, 단팥이 가득 들어간 도라야키만 있으면. 하기 싫었던 일에도 진심이 담기기 시작한다. 도라야키 하나에도 진짜 누군가 그토록 바란 간절한 삶의 용기 한 자락이 들어가 있다. 이 기운을 고스란히 얻은 중년의 아저씨는 또 외친다.
도라야키 사세요!
▶ 앙: 단팥 인생 이야기 | 가와세 나오미 | 2015년 | 드라마 | 113분
▶ 걸어도 걸어도 | 고레에다 히로카즈 | 2009년 | 가족·드라마 | 1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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