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주머니

ASD(Autism Spectrum Disorder)

by 앤나우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오랜만에 본 둘째 조카 예나와의 시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첫째 아이는 좀 커서 예나의 행동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아도 못 본 척 피해 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반복 구간으로 뭔가를 찾아보고 갑자기 천장이 울릴듯한 큰 소리로 영상 화면을 켜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모르는 척, 그냥 자기 할 일을 했다. 특히 화장실 문을 닫는 습관이 안되어있을 때는 다른 화장실을 사용하거나 돌아갔는데 (*예나는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자립심도 있고 스스로 해결하는 것도 많았지만 학교에서 자해를 하거나 도와줘야 할 상황들이 생기는 화장실에선 문을 닫지 않고 볼일을 보는 게 습관화된 탓이라고 했다) 문제는 둘째 아이. 이제 곧 8세로 접어드는 아이에게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살면서 마주치고 본 적도 없고 아직 온전히 이해하고 배려해 주기에 어린 나이기도 했다. 언니랑 나도 다른 것보다 둘째 아이와 예나가 부딪치는 경우들이 없게 더욱 주의해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짓궂고 호기심도 많은 성격인 데다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답게 선율이는 예나 누나가 일반적인 행동에서 벗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잔소리를 하고 화장실 문도 닫고 싸야 한다고 말해주는 게 아닌가. 하아. 그럴 때마다 아이를 붙들고 누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고 소통하기 힘든 부분을 설명하려고만 했다. 설명해서 이런 행동으로 교정되길 바랐던 것 같다. 큰 아이처럼 무심하게 지나쳐주기를. 어린데도, 아니 어쩌면 어리기 때문에 조금 이상하거나 다른 것을 바로바로 말하는 아이의 솔직한 말과 행동에 당혹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선율아, 누나는 아직 훈련이 안 됐어.
못 본 척해줘.
그냥 가만히 좀 있어!
너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냥 쫌 넘어가!



돌아보니, 나는 괜히 우리 아이가 사촌 누나와 더 큰 분란을 만들까,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까 봐 거기에만 더 전전 긍긍했던 것 같다.



그때 언니가 선율이게 해주는 설명은 훨씬 쉽고 간단했다. 언니는 선율이에게 천천히 아이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해줬다.



선율아, 네가 볼 땐 누나가 너보다 더 키도 크고 몸도 크고 어른 같지만 사실은 선율이보다 더 아기라고 생각해 줘.
선율이 동생, 아기 알지? 베이비.
그래, 누나는 지금 어쩌면 베이비일지도 몰라. 선율이는 점점 오빠가 되고 형아도 되는데 누나는 아직도 커다란 몸이지만 아기라고 생각해 줘. 큰 아기.



-아니야, 안돼. 누나는 어른이야. 어른. 벌써 다 컸잖아.



물론 편안한 눈높이 설명도 아이에게 한 번에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사건건 부딪히거나 소리를 좀 줄이라고 본인이 더 큰소리치는 일도 있었지만 함께 밥을 먹고 놀이터에 가고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고 외식을 하면서 아이도 자연스레 누나를 알게 됐다.


어쩌면 선율이랑 예나는 닮아 있었다. 내내 비 오는 영국 날씨에 빗물이 고여있는 곳마다 물장구를 치거나 호수를 좋아하고 거기에 떠있는 백조를 자세히 관찰하고 신기해했다. 둘 다 놀이터를 좋아하고 달리는 걸 좋아했다. 버블거피와 옥터넛, 퍼피 구조대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좋아하는 것도 꼭 같았다. 서로 같이 역할 놀이를 하지 않았지만.



누나는 뭘 좋아하고, 무슨 음식을 원하고 어떤 장난감들을 주로 손에 쥐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아갈 때쯤 선율이의 참견과 잔소리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날은 선율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울고 있으니 예나가 조용히 다가왔다. 다가와서 과장된 얼굴 표정으로 울상이 된 표정을 짓고 선율이의 어깨를 만져줬다.



베이비, 베이비 크라잉. 마니 아파? 베이비 헐트



라고 하는 것도 함께 들었다.

예나의 아이가 운다는 그 말을 듣는데도 내 마음이 찡했던 것 같다. '울지 마'라는 말은 안 했지만 울지 마 처럼 들렸다.










새 학기가 되었다. 한국에 오자마자 이어진 초등학교 입학식에 분주한 마음이 들었지만 입학식에서도 수다스럽게 뒤돌아 떠들고 나를 보고 연신 손짓하는 아이를 보면서 드디어 입학을 하는구나 싶었다. 아직도 커다란 책가방과 신발주머니가 어색한데 그 어색함과 달리 개구쟁이는 그저 들떠 보였다. 그와 동시에 안절부절, 자리에 못 앉아있고 웅얼웅얼 혼잣말을 하는 아이들도 보았다. 함께 수업을 하고 일 년을 지내게 되는 동안 우리 아이가 또 잘 어울리고 생각하고 배려해 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조금 다른 아이들의 행동을 바로 말해주기 시작했다. 의자를 넘어뜨리거나 싫다고 반항을 하거나 책을 던지거나,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아직 여덟 살 밖에 안된 아이에게 그런 상황을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하길 가르쳤다. 네 성격대로 참견하기보다는 역시 또 네 할 일을 하란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어느 날도 열심히 놀이터에서 놀고 돌아오다가 선율이가 늘 이야기하는 그 친구들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사실 아이의 그런 일상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이해와 설명보다는 둘째 조카 생각이 먼저 떠올랐던 것 같다. 떠올리면 언제나 자동으로 우리 언니가 생각났고 애정하는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이 교차하곤 했다.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늘 튀는 행동과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아이의 푸념 섞인 말들 속에서 그날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닌가.



돌아온 아이의 이야는 이랬다.




엄마, 선생님이 그러는데 00이랑 00이는
생각주머니가 우리랑 다르대.
생각 주머니가 작아서 우리랑 다르게 행동하기도 하고
또 울기도 하는 거래.

엄마, 근데 생각 주머니가 대체 뭘까?





아, 정말 지혜로운 선생님이시구나.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하나씩 설명해 주시고 계셨구나. 나는 평소와 다른 아이의 말에 담임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선율이는 그 이야기를 듣는데 또 예나 누나가 생각났다고 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이런 말을 몰라도 이미 우리 주위에, 이웃으로, 한 반으로 자주 마주치게 되는 또 다른 아이들을 아직 이해하기 어리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기보다는 나처럼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르치기보다는 우리 언니처럼, 아이의 담임선생님처럼 눈높이에서 하나씩 차근하게 풀어가면 좀 더 다른 시선이 열리고 서로의 생각 주머니를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동안 나의 모습이 떠올라 아이의 그런 질문이 부끄러웠고, 아이들 시선에서 따뜻하게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이 감사했고 지금도 우리 예나를 돌보고 챙겨주고 있을 우리 언니와 감사한 선생님들, 영국에 있는 나의 조카들, 형부, 우리 가족들이 생각났다.



내가 영국에서 처음 예나를 데리고 따로 외출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건 '오티즘 Autism'이란 단어였는데 10년 전에도 예나가 갑자기 돌발 상황에서 마트에서 누워 버렸을 때도


미안해, 아이가 오티즘이 있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사실 아이의 돌발 행동에도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오히려 '오티즘'이란 말이 들리자마자 지나치는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네가 왜 미안하다고 하는데. 괜찮아. 우리가 뭘 도와줄까? 어떻게 해야 너와 네 아이가 편안할까?

라고 나에게 물어봐서 눈물이 난 적이 있다.




놀이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자기 아이들을 철저히 보는 문화답게 내가 선율이와 예나를 둘 다 챙겨가며 보기 힘든 상황 속에 예나가 누군가 타고 있는 그네 근처로 위험하게 가거나 누군가 타는 놀이터 기구를 먼저 타려고 했지만 다들 양보하고 배려해 줬다.


피해를 주거나 해를 끼치지 않도록 자기 아이를 철저히 보는 것에 습관화된 탓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 광경들이 편하고 고마웠다. 터치 하나하나에도 민감한 외국인걸 알기에, 몇 번의 쏘리를 말할 일이 생기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았다.




괜찮아, 우리가 양보해 줄까?
이 쪽 그네를 타고 싶고 양쪽 다 타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
기다려줄 수 있어.



선율이도 누나가 타는 놀이기구를 밀어주거나 누나 무게 때문에 내려오지 않는 시소를 타면서 아주 즐거워했다.




자폐를 가진 아이들은 생각 주머니가 우리가 보기엔 작아 보일지 몰라도, 아기 같아 보이는 건 어쩌면 또 우리의 시선일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 무궁무진한 다른 주머니들이 열려서 더 넓은 우주가 가득 들어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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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비가 그친 날, 예나와 함께 집 앞 놀이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