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자가 할 수 있는 건
오랜만에 다시 본 영화.
처음 봤을 땐 그냥 스쳐 지나가고 (지루하게도 느껴지고) 놓친 부분이 많았는데 다시 볼수록 새록새록 다른 장면,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이 보인다. 나는 이런 영화야 말로 진짜 '좋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성질 급한 나도 이제는 좀(?) 나이를 먹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예전에 막 웃으면서 재밌게만 봤던 영화들이 아주 느리게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다. 순간순간 모든 장면에서 연결 고리들이 보인다. 낯설고 이런 신기한 경험이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눈이 트인 건지 뭐가 뭔지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어렸을 땐 자주 보던 영화 잡지, 「스크린」이나 「로드쇼」에선 이 영화를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무인도의 환상 따위는 없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톰 행크스를 제대로 섬에 가둬놓고 온갖 고생을 다 시키는 영화!
영화는 누가 뭐래도 '생존'드라마 장르란 걸 앞세웠다. 나도 그런 그때는 그런 쪽으로 재밌게 봤다. 어린 시절 푹 빠져서 읽었던 소설, 『로빈슨 크루소』같은 무인도에서의 환상을 기대한다면 큰 오산이니까. 처음 표류하다 정착하게 된 무인도에서 생활도 능숙하게 척척, 바로 적응해서 정복하는 주인공을 기대한다면 처음부터 이 영화를 보면 안 된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진짜 문명에 살다가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없이 살게 된 현대인의 모습이 정말 딱 저렇겠구나, 비행기나 배를 타고 싶지 않다고 자꾸만 다짐하게 된 장면이 수두룩 했다.
실제로 이 영화를 찍으면서 주인공 '척'을 연기한 톰 행크스는 25kg를 감량했다고 한다. 제일 중요한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이란 점점 마르고 뾰족해지는 게 당연한데, 톰 행크스의 선한 얼굴이 까맣고 덥수룩하게 점점 그을려질 적마다 실로 마음이 아팠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서야 특유의 어리벙벙한 느낌 그대로, 반짝이고 선한 눈매가 이전처럼 돌아온 것 같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진짜 대단한 배우구나, 나는 《포레스트 검프》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연기가 더 마음에 남아있다.
그래도 그가 일하는 페덱스 물품 중에 그럴싸한 택배가 있을 법도 한데, 그만하면 쓸만한 물건도 깔릴 법, 하거니와, 감독은 아예 이런 작은 희망조차 품지 못하게 싹을 잘라버린다.
배구공도 유희의 도구로 쓰기보단 예상치 못한 다른 '친구'로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걸 보면!
예전에 장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오죽하면 스케이트 날로 자신의 썩은 이를 뽑아내는 장면이었을까. 나는 척이 '윌슨'을 만들어내고 헤어지는 장면보다 이 장면이 너무 끔찍하면서도 강렬했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울 바엔 스스로 의사를 자처해서 자신의 아픈 생니를 뽑아내는 척 놀랜드의 심경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바쁘게 뛰어다니는 택배 기사라는 직업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법하다. 실제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누군가의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분주하게 오가며 자기 길도 잃어버리고 목숨까지 걸게 된 주인공. '온전히'자기 시간만 누리게 되는(?) 나밖에 없는 무인도라는 공간이 주는 상징은 주인공의 직업과 더불어 철학적으로 접근해보고 싶어진다.
척은 말레이시아 출장으로 페덱스 화물기에 타며 폭풍과 싸우다 추락 후,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영화는 척이 4년간 무인도에서 생존하며 불, 음식, 정신적 동반자(배구공 윌슨)를 만들며 그곳 생활에 적응하고 살아남는 과정을 그린다.
cast away는 항해용어로 조난자를 가리키며 이런 제목은 단순히 주인공이 겪는 표류뿐 아니라 시간에 쫓기고 인간관계에 얽매인 현대인의 삶에서 벗어나는 이중적 의미도 숨어있다.
한데,
다시 보니
무인도 영화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무인도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의 뒷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유조선에 구조되어 다시 세상으로, 원래부터 자기가 있던 공간으로, 사람들 곁으로 오면서부터 펼쳐지는 마지막 짧은 순간이 오히려 더 인상 깊고 여운이 오래 남았다.
*첫 번째 파티 장면 :
친구들은 저마다 척이 온 걸 환영하며 떠들썩하게 파티를 해준다. 친구들이 떠난 파티의 끝자락에 자기가 맨날 잡아먹고살기 위해서 먹었던 대게의 다리 같은 걸 보는 장면이 스쳐가는데 와! 이런 장면이 있구나 사실 놀랐다. 다들 먹다 남긴 음식, 생존이 걸린 곳에서는 이렇게 흔히 보고 우리가 매일 같이 남기는 음식 하나도 분명 다른 의미일 텐데 주인공은 이제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단 기분도 들고 마음이 일렁였다. 대게의 다리, 남아있는 초밥을 보면서 그냥 걷기만 하는데 다시 보니 이 장면이 유난히 천천히 펼쳐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어딜 가나 무인도에서 4년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았을 거라는 걸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 같았다.
뒤이어 이어지는 장면에도 캔들 점화기가 나오는데 주인공이 하루하루 불을 켜기 위해서 손을 다쳐가면서 썼던 시간을 생각하면, 아, 웃을 수만도 없다.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살기 위해 불을 만들었던 곳, 이제는 불을 꺼도 야경으로 밤이 환한 곳, 주인공은 잠들지 못하고 불을 껐다 켜는 동작을 반복한다.
그냥 일상으로 돌아온 장면이 나에겐 더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나도 이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더 소중한지 배워가는 중이어서 그런 걸까.
*약혼녀 켈리를 다시 찾아온 척 :
어린 시절엔 켈리 역시 척이 사라지고 그를 찾아 헤매고 그녀가 찾았던 지도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주인공 켈리(헬렌헌트)의 망설이는 눈빛, 다정한 스킨십, 빗 속을 다시 뛰어가며 '척'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장면이었다.
여기서 「섹스 앤 더 시티」의 미스터 빅이 잠깐 치과의사 남편으로 나오는데 반갑기도 했다. 그땐 이 배우가 나오는지 조차 몰랐으니까.
남겨진 사람도 불안하고 멈춰진 시간이었을 텐데 주인공의 귀환이 마냥 반갑고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이제 켈리는 또 다른 삶, 다른 누군가의 아내, 엄마가 돼있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간, 남겨진 시간 속에서도 삶은 흘러갔고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 켈리 교수님 됐겠네.
라고 척이 말하자, 공부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켈리는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해.
끝나고 멈춘 줄 알았던 내 삶에도, 네 삶과 마찬가지로 다시 시작된 걸 알았기에, 켈리는 내내 망설이고 미안해하고 안타까운 눈빛이지만 그래도 저 말을 할 땐 즐거워 보였다. 당당하다. 자기 삶에서의 새롭고 다른 시작을 이젠 외면하지 않는다.
조난당하고 남겨지고 버려진 게 그 누구의 탓도 아니듯이 그 둘에게 허락된 '시절인연'이 얼마나 아름답게 도닥여주고 다시 맺어지는지, 이 작별 인사가 왜 이토록 좋은지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꼭 다시 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헬런헌트의 눈빛,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그녀를 보내주는 탐 행크스의 눈빛, 두 배우의 모습이 따뜻하게 오고 간다. 격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의 감정도 고스란히 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달라져버린 상황이 생겼다는 게 이토록 갑갑하고 슬픈 거구나. 슬퍼하고 원망하는 티를 낼 수조차 없는 상황이 숨 막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책임져야 할 또 다른 삶에 대한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마치 모든 걸 내팽개치고 둘만의 무인도로 떠났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어땠을까. 그게 진짜 행복이었을까. 또 다른 남겨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고 자기 스스로도 떳떳이 나가지 못하는 삶이 되었을 거다. '공부'하고 다시 나아가는 삶에서 희망을 보였던 켈리의 대사가, 옛 연인을 다시 안아주기 위해 용기 있게 이름을 불렸던 그녀가, 묵묵히 돌아가야 할 현실의 자리로 찾아가는 그 길이 조금은 쓸쓸하지만 그래도 멋있어 보였다. 하지 말아야 하고 있어야 할 곳을 넘어버리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어른의 선택이란 언제나 무겁고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도 어쩌랴, 다들 이렇게 살아서가 아니라 이게 가장 나에게 떳떳한 일이니까. 비에 홀딱 젖은 남녀는 그대로, 빗길을 달려서 다시 켈리의 집 앞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척은 말한다.
숨을 쉬고 살아가야 할 목적이나 이유는 우리 생각처럼 그리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닐 수가 있다. 아니 어쩌면 살아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순간에도 숨이 붙어있고 숨을 쉬는 한 우리가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처럼 그냥 나아가는 삶.
그 삶의 발걸음이 얼마나 눈물겹고 대단한 건지, 아주 오랜만에 천천히 느껴볼 수 있는 영화였다.
▶ 2001년/ 드라마, 모험/ 143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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