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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Dec 02. 2022

나한테 편지 써줄래?

꼭 편지할게요

꼭 편지할게요 내일 또 만나지만 

돌아온 길엔 언제나 아쉽기만 해

더 정성스럽게 당신을 만나는 길

그대 없이도 그대와 밤새워 얘길 해

오늘도 맴돈 아직은 어색한 말

내 가슴속에 접어 논 메아리 같은 너

이젠 조용히 내 맘을 드려요

다시 창가의 짙은 어둠은 친구 같죠

길고 긴 시간의 바다를 건너

그대 꿈속으로

나의 그리움이 닿는 곳까지

꼭 편지할게요 매일 볼 수 있지만 

혼자 있을 땐 언제나 그대

생각뿐이죠 더 고운 글씨로

사랑을 만드는 길 소리 없이

내 마음을 채우고 싶어요

곱게 내 맘 접어서 

나의 꿈도 날아서

아주 자유롭게 더 깊은 사랑 속으로

이젠 조용히 내 맘을 드려요

다시 창가에 짙은 어둠은 친구 같죠

길고 긴 시간의 바다를 건너 그대

꿈속으로 

나의 그리움이 닿는 곳까지


- 편지할게요. 박정현노래 (윤종신 작사/작곡)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박정현 앨범을 받았다. 작은 카세트테이프였는데 헝클어진 머리로 부엌 선반엔가 어딘가에 걸터앉은 박정현의 자연스러운 흑백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처음 본 가수, 하지만 얼굴이 반도 채 안 나온 사진 속에서 보조개만은 또렷하게 보이는 미소를 가진 가수. Lena Park의 첫 앨범 ‘Piece'였다. 

 그 1집 ‘피스’ 앨범에는 나의 하루, P.S I Love You, 임재범과 함께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등 유명한 곡이 무지 많았지만 내게 제일 꽂힌 곡은 바로 이 곡. 

‘편지할게요’란 노래였다. 

나의 인생 청소년기 대부분은 편지 쓰기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편지에 몰두하고 꽂혀있던 시기였기에, 공부를 하다가도 문제가 안 풀리면 새로운 편지지를 꺼냈고 마음이 갑갑하거나 울적하면 예쁘게 모아둔 편지지에 다시 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딘가 쏟아 놓고 싶었지만 쏟아 놓을 곳을 모르고, 누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 나는 늘 편지를 쓰는 학생이었다. 내 편지를 받은 대상은 대부분 내 친구들이었는데 나는 늘 답장을 기대하고 쓰는 편지는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냥 내 이야기, 넋두리를 들어줘, 그냥 ‘네가 생각났어’였다. 이 시간에 공부도 안 하고 뭐 다른 것도 안 했지만 그냥 편지 쓰는 자체가 나에겐 힐링이고 행복이었다.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읽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편지를 썼던 것 같다. 그런데 편지에 대한 노래라니!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R&B의 여왕이라고 불린 박정현의 탄생, 그 시작과 함께 한 앨범이니 나는 그녀가 누군지도 몰랐지만 미국 물을 먹고 전통 R&B를 본토 느낌 그대로 구사할 줄 안다는 박정현의 노래 한 곡 한 곡에 엄청난 팬이 됐다. 

나는 박정현이 좋았다. 사실 P.S I Love You란 말 역시 편지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이 아닌가. 

나는 이 앨범 전체가 편지로 이뤄진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집에 돌아와서 내 책상 위에서도 편지를 썼지만 나는 식구들이 모두가 잠든 조용한 밤에, 침대 머리맡에서 예쁜 편지지를 골라서 잠들기 전까지 쓰는 편지를 제일 좋아했다. 노래 가사처럼 창가의 짙은 어둠이 「친구」 같았기 때문일까. 내가 왜 편지에 그토록 푹 빠져 열광했는지 답변이 되는 노래, 노래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쏙쏙 들어왔다. 상대방이 없어도 밤새워 얘기할 수 있고 답장이 돌아오지 않아도 편지를 쓰는 그 자체로 나에게 기쁨이 되는 시간. 편지는 일기장과 막상막하로 나의 글쓰기 즐거움의 일 순위를 다투는 쓰기가 됐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주면 

-나경이 네 편지를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았어.

-어제 갑자기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나더라.

-나도 너한테 뭔가 써주고 싶어 졌어.

-편지를 이렇게 재밌게 읽어보긴 처음이야! 

친구들에게 이런 답장이 돌아왔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다가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한테도 편지 써줄래? 나도 네 편지 받고 싶어.

 내 손 글씨로 된 편지를 받고 싶어 하는 작은 팬들이 생겨나서 기뻤지만 왠지 더 잘 써야 한다는 그 부담감에 편지는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 꾸미기에 치중을 한 나머지 글 내용은 뭘 썼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받은 아이들의 반응도 맹숭맹숭, 기대보다 실망한 표정이었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표정을 살피거나 기대하면서 편지를 쓴 적은 없는데 (지금처럼 핸드폰, 인터넷, 카톡도 없던 시절이라 우표로 붙인 편지가 언제쯤 도착할지 궁금한 적은 있었어도) ‘그냥 그렇네’(편지구나)하는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팬 관리를 실패한 기분도 살짝 들면서. 

편지는 받고 싶어 하는 상대방에 맞추는 게 아니라 

쓰고 싶어 하는 ‘내 마음’에서 출발해야 하는구나.

국군 아저씨한테 위문편지 한 장을 써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쓴 그 편지 한 장이 그 군인에겐 뭐 대수겠냐 만은 편지를 읽는 순간에 잠시 잠깐 웃고 힘이 났다면 편지로서 하는 소임은 이미 다 마친 거 듯이 편지는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모르는 대상에게도 일상 이야기를 하고 이런 일이 있었는데...라고 시작한 내 편지는 언제나 나의 기쁨이 우선이었기에 생생했고 펜을 잡는 첫 순간이 즐거웠기에 반짝반짝 빛났다는 것을 알았다.

어렵게(?) 아니, 자연스럽게 생긴 내 손 편지 팬들이 실망한 이후에 나는 작은 결심을 했다. 

 첫째, 나는 내가 편지를 꼭 써주고 싶은 대상에게만 편지를 써준다.

 둘째, 편지에 안 쓰더라도 거짓으로 지어서 꾸며서 쓰지 않겠다. 멋없어 보일지라도 감정을 좋은 척 꾸며서 연기하거나 포장하지 않겠다.

 셋째, 답장받은 편지를 소중히 보관하겠다. 

나는 지금도 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키고 있다. 편지를 쓰다 보니 많이 주고받게 되고 그 편지들이 내겐 둘 도 없는 보물이 됐다. 이제 보물을 꽁꽁 감춰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기보다는 꺼내서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자랑하고 싶은 내 보물들, 한 때는 편지를 잘 쓰려고 두 번이나 글을 옮겨서 쓴 적도 있는데 그 편지를 찢지 않고 보관해 둔 것도 종종 보인다. 지금 읽어보면 일기장을 다시 들춰 본 듯 오글오글 흑 역사, 이불 킥 사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잠이 안 오거나 쓸쓸한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커다란 내 편지함을 열어서 한 장 한 장 들춰봤다. 왜 이렇게 밖에 못썼지, 아쉽다가도 지금은 쓸 수 없는 그때 그 감정이 귀엽다는 생각도 들고 자연스럽게 내가 받은 편지들로 손을 뻗어 가면 날이 새는 줄 몰랐다. 다양한 크기의 모양, 글자들이, 각양각색 상상도 못 할 재밌고 기발한 모양의 편지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를 웃겼다, 울렸다, 어느새 토닥토닥 위로하고 있었다. 커다란 장난감 통 같은 그 편지통이 나에게 주는 힘은 어마어마했다. 최대한 인쇄한 글자 같은 느낌이 나게, 정자체로 예쁘게, 어떨 때는 발랄한 느낌 그대로를 글씨에 담았던 내 편지들, 내가 쓴 편지는 친구들, 선생님들, 누군가의 손으로 전달돼서 전국 세계 방방 곳곳에 퍼져있겠지. 내가 보관한 편지함처럼 어딘가에 있을 내 편지 생각을 하면 지금도 즐거운 마음이 든다. 내가 못 가본 다른 곳에 지금도 속속들이 여행 중인 내 편지들, 누군가 보물처럼 다시 꺼내서 읽어주는 상상을 하면 몽글몽글 행복한 마음이 든다.


P.S 혜선아, 미안해. 그때 나에게 다가와서 미영이처럼 편지 써달라고 했는데 나는 좀 의무적으로 썼던 것 같아. 널 잘 몰랐거든. 너랑 짝꿍을 다시 하면서 네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어. 내가 가져온 젓가락으로 밥도 먹고 싶어 하고(넌 나의 대나무 젓가락으로, 난 네 젓가락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기억나니?) 국사 정리한 지도도 기름종이에 다시 그려서 보여주고, 수학 공식이라든가 세계지리 정리 방법처럼 이거 저거 공부하는 요령들도 친절하게 알려줬는데 말이야. 너는 영리하고 잘 꾸미고 똑똑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 당시엔 듣도 보도 못한 속눈썹 파마도 하고, 널 떠올리면 바짝 올라간 귀여운 속눈썹이 먼저 떠올라. ^^ 대학생이 돼서도 우리 교회까지 잠깐 나를 보러 와줬는데 나는 너에게 반갑게 인사해주지 못한 것 같아. 다시 떠올렸을 때 그게 마음에 걸리더라. 우리가 또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공백 시간은 길고 길지만 너에게 다시 제대로 편지를 써주고 싶어. 미영이에게 쓴 것과 다르게 나만의, 내 이야기를, 너한테만 들려줄 수 있는 진짜 네 편지를 말이야. 

그리고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아기 엄마가 되었다면서

밤하늘에 별빛을 닮은 너의 눈빛 수줍던 소녀로 널 기억하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이 노래를 함께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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