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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Dec 02. 2022

토하듯 글쓰기

자꾸만 쏟아지는 내 이야기

 토하듯 글이 터져 나왔다. 올 한 해가 그랬다. 자꾸만 쏟아지는 내 안에 있는 이야기, 내 속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나오고 토할 땐 괴롭지만 다 하고 나면 확실히 후련해지는 것처럼 나의 글쓰기가 그랬다. 일상을 쓰고 필사를 하고 기획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쓴 글을 브런치에 올리고 싶었다. '브런치'작가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강하게 들었다. 

어디가 어딘지, 어떻게 편집하고 글씨체, 사진 올리기, 사이즈 조절 같은 거, 이런 거 하나도 몰라서 버벅거리면서도 블로그를 만들었다. 나만의 쓸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집은 늘 발 디딜 틈 없이 아이들 장난감으로 빼곡하고 어수선했다. 내가 글 쓸 수 있는 작은 공간마저 따로 마련되지 않았지만 나는 글을 썼다. 아기침대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서, 아이들이 먹다만 아침밥이 그대로 놓인 식탁에서, 계속 더 들어가서 부비적 대고 싶은 폭신한 침대 위에서 노트북을 켰다. 시작이 버벅거렸지만 나에겐 거기에 쓴 한 편의 글이 ‘토사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 토사물과 비교할 수 없지!


장염에 심하게 걸렸을 때 밤새 토 한 경험이 있는데 누군가 내 입 안으로 호스를 깊숙이 넣어서 찌른 것처럼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이해서 콸콸콸 쏟아졌다. 더럽고 냄새나는 내 토사물을 바라보면 역겹고 비위가 팍 상해버려서 눈을 질끈 감고 변기 물을 내렸다. 속은 시원했지만 얼른 치워버리고 싶었다. 내 속의 뭔가 소화되지도 않고 형성되지도 않은 채, 에너지도 될 수 없었던 물컹이는 흔적들. 내 글은 토하듯 나왔지만 절대 그렇게 치워버리고 싶은 흔적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의 이야기가, 나의 유년과 지나온 삶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부끄럽고 내려버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적어놓고 언젠가 다른 날 다시 읽어도 이걸 쓰면서 그때 푹 빠졌더랬지, 후련했어, 이런 마음이었구나 다시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알았다. 나는 결코 읽기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이구나. 문예창작을 전공할 만큼 나는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쓰기'를 읽기만큼 좋아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육아를 하는 12년이 되는 시간 동안도 틈틈이 다이어리를 쓰고 뭔가 떠올랐을 때 메모를 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봤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받았을 땐 '몽고반점'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나서 다시 봐야지 하고 장바구니에 끼고 다녔지만 현실은 채소 장이나 보는 내 현실이 초라하고 싫었던 것 같다. 읽고 싶었던 책들보다 아이에게 밤새 읽어주는 동화책이 내 일상이 될 무렵 글을 쓰고는 싶지만 현실은 세 줄 일기 쓰기도 힘든 나라는 걸 깨달았고 그제야 내 의지와 마음이 간절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간절하지 않은 마음, 나는 그냥 책만 들고 있어도, 잠깐의 다이어리 정리에도 이렇게 만족스러운 사람이구나 나에 대한 생각도 점점 바뀌어갔다. 육아도 살림도 나와 잘 맞지 않았지만 또 여기에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하루하루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예민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밝고 에너지 넘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속이 시끄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 유치원 엄마들과 공동육아를 하면서 늘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아줬지만 자주 만나는 무리들과 만나고 교류했지만 번아웃이 종종 찾아왔다. 생각보다 점점 자주 번아웃, 지쳐서 널브러져서 멍한 나를 발견했다. 슬펐다.  내가 모르는 나와 자꾸 부딪히고 싸우게 되고 사실 아이의 어린 시절을 보니 자꾸 나의 유년이 떠올랐다. 딱히 불행하지도 않았고 대단히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나는 어떻게 보냈던 걸까.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절대 상상도, 감정이입도 제대로 안 해봤을 생각들.


멍청하게 버려지고 놔버리고 놓쳤다고 생각한 12년이 사실은 멈춰있었던 게 아니었다. 내가 쏟아지는 글쓰기를 매일 쓰면서 즐겁게 울고 웃고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 시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란 걸 이제 알았다.


지난 새벽에 '브런치 작가'메일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작가님!이라고 쓰여있었다. 기분이 콩닥콩닥 찌릿찌릿 이상했다. 친구들이 몇 년 전에 내 핸드폰에 깔아준 브런치. 쓰라고 나한테 계속 말해주는 고마운 친구들. 뭐 하나 제대로 써 볼 생각조차 못했던 나인데 올 한 해 하나둘씩 쌓인 내 글들을 보고 용기가 생겼다. 

-왜 브런치 안 하세요? 

-지금 쓴 글로도 수정 없이 내면 충분히 할 수 있어!

주변에서 나를 다독이고 응원해주는 소리에 용기를 내고 싶어졌다. 당선 결과를 보는데 갑자기 내 12년이 생각났다. 아, 나에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올해 글쓰기가 쏟아질 수 있었구나. 


아이를 통해 육아를 하며 자꾸만 울고 웃고 갈피 잡지 못한 마음을 상담하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고 기다렸던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이렇게 쓰기의 기쁨을 다시 누리는 구나!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났다. 나에게 엄청난 글감을 터뜨리게 해 준 시간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큰 아이 선재가 5살쯤인가, 꽁꽁 숨어버리고 사라지고 싶어서 아이와 단 둘이 숨바꼭질을 하다가 이대로 나는 안 나가고 숨어서 여기서 잠이나 좀 자고 그냥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시간도 떠올랐다. 아이가 갑자기 미친 듯이 나를 찾고 띠리릭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 차리고 후다닥 뛰어가서 아이를 안고 엉엉 울어더랬지. 잠시나마 그런 생각으로 벗어나려 했던 내가 너무 싫고 소름 끼쳤고 아이를 무섭게 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선재에게 미안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불안하고 무섭고 겁이 많아서 자꾸만 숨고 도망가고만 싶은 걸까. 남들은 나를 용감하고 밝고 에너지가 넘친다고 하는데 나는 자꾸만 자꾸만 굴을 파서 들어가고 싶고 거기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원한다면 앞장서서 전부 해주고 어디든 갔다. 밤새 동화책도 읽어줄 수 있는 엄마였지만 거기에 나는 텅 비어버려서 내가 누군지부터 떠올려야 했다. 


둘째 선율이가 아침마다 놀이터에서도 몇 시간씩 노는데도 놀이터에서 나오질 않았다. 열 발자국만 떼면 바로 어린이집인데 안 가겠다고 드러눕는 아이를 보며 혼자 발을 동동 빨리 보내고 싶은 내 마음만 조급해졌다. 들쳐 메고 낮잠 이불이며 가방 킥보드까지 챙기며 어린이집으로 가는데 아이를 놓쳤다. 파닥파닥 탈출하려는 아이가 내 손에서 빠져버리는 바람에 나도 선율이도 길가에서 크게 넘어졌다. 그대로 멍하니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어떤 아이 엄마가 내 가방과 짐을 주섬주섬 챙겨줬다. 

-같이 가요, 제가 다 들어드릴 테니 앞으로 길을 안내해줘요. 아이만 챙기면서 걸어가요. 무리하지 말고요.

그 여자 손목은 온통 손목 보호대로 가득했다. 나와 비슷한 아기를 키우거나 돌보는 엄마 같았다. 어린이 집 앞에서 짐을 다 내려주고 아이를 겨우 내려놓으니 '고맙단'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평상시엔 웃으면서 잘도 했을 그 말이 갑자기 왜 이렇게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꺼내기가 힘들었던 걸까.

그 여자는 내 어깨를 한 번 힘 있게 쥐고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정말 

모기만 한 소리로 작게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수치감, 내 아이가 매번 저렇게 난리치고 더 놀겠다고 아우성치는데 나는 아이를 통제할 수 없고 주도할 수 없다는 수치감, 나는 엄마가 맞을까. 다른 애들은' **아, 가자' 하면 바로 무서워서라도 엄마를 따라 쪼르르 가는데 나는 뭔가 문제가 있는 엄마일까.

그냥 놀기 좋아하는 아이였을 수도 있지만 나로 향한 그 내면의 화살 같은 게 마음에 박혀서 그날 어린이집 나무 마당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아고, 어머니, 괜찮으세요?

선생님들에 이어 원장님까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달려왔다.

-너무 힘들어요. 전 엄마도 뭐도 아닌 거 같아요. 엉엉엉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뭐 제대로 말도 안 나오는데 그날은 끝까지 그러고 울었다. 선생님이 조용히 선율이를 데려가고 원장님이 나를 힘껏 안아주셨다. 


다 울고 나니 후련했다.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선율이 이놈! 원장님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나는 아이를 보니 헛웃음이 나왔고 툭툭 자기 옷까지 털고 들어가는 여유 있는 모습을 보며 나의 눈물도 사그라들었다. 혼자선 할 수 없지만 함께 돌봐주고 기도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툭하면 우는 아이였는데 눈물 끝이 언제나 '후련함과 해결로 가는 과정'이란 기억이 강했다. 4살인가 5살 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다 심하게 넘어져서 엉엉 울면서 무릎에 피가 뚝뚝 흐른 채 엄마에게 갔는데 엄마는 상처도 치료해주고 눈물을 깨끗이 닦아주고 아주 큼지막한 맛있는 딸기를 내 입에 쏙 넣어주셨다. 

-언니에겐 안 주고 너한테만 주는 거야. 언니는 밖에서 놀고 있지? 나경인 넘어졌지만 이렇게 딸기 먹을 수 있네. 

딸기도 달고 맛있었지만 엄마랑 단 둘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동안 엄마는 언니를 더 예뻐하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구나, 엄마의 방식으로 나를 예뻐해 주셨던 거구나, 그런 감동을 받았다. 무릎은 깨졌지만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기억이 내 몸 어딘가, 내 마음 어딘가 콕 저장되어있었던 거구나. 울어도 울음 끝이 땡이 아니라 늘 해결되고 그다음 길로 들어가는 열쇠를 주는구나, 나는 그걸 이미 4,5살 아가인데도 느꼈나 보다. 


내 눈물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나이에 길거리에서도 통곡을 했겠지만 말이다. 참지 않고 터져 나오려는 뭔가를 다 쏟아냈을 때 후련함, 그리고 나를 위로하고 안아주는 손길, 다시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찾아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느꼈다. 수치감도 결국 일어나지도 않은 나의 잘못된 자아성찰일 뿐 사실 처음부터 아이는 내가 통제하고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존재가 맞다. 


글을 쓰니 행복한 건 이렇게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이제는 아이가 있어, 더 깊숙한 유년까지 짚어 가다 보면 내 마음이 절로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 돌아온 글자 하나하나마다 발자국처럼 그 시간에 아팠던 눈물과 외롭고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을 쓱쓱 지워준다. 발자국은 발자국인데 앙금을 지워주고 대신 글자로 기록하게 하는 나의 글쓰기, 뭐 대단한 보석은 아닐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있게 한 나를 보여주는 탈출구, 난 이것만으로 벅차고 지금도 행복하다. 


김애란 에세이 [잊기 좋은 이름] 문장 영향권에 쓰여있는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되 파도의 운동에 관여하는 명백한 힘처럼
먼 데서 큰 물을 잡아당기는 달처럼

난 내 글의 힘을 믿는다. 지금 쓰면서도 어떤 부분에서 울컥해서 눈물이 또 찔끔 났지만 지금은 후련하다. 파도와 달, 내 글을 그렇게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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