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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Jul 04. 2023

눈이 땡글땡글 아가 레고

놀이터에서 본 나의 「어린이라는 세계」

중앙대 근처에서 독립해서 지내는 희경이가 선재의 생일 선물과 동화책을 한 아름 갖고 우리 집에 왔다. 멀고 먼 버스 여행일 텐데 기사 아저씨가 '쿨 Cool' 노래를 틀어주셨다며 제대로 여름 여행 온 기분이라고 말해주는 다정한 세실리아. 오는 길 내내도 즐거웠다고 선재를 위해 예쁜 카드까지 꾹꾹 손으로 정성스럽게 써줬다. 아이스크림 케이크 카드, 동화책들(희경이가 번역한), 다이어리와 필기구,  클림트 책갈피, 내가 마실 티와 수제 비누가 한 아름 담긴 산타클로스 가방. 그리고 레고 캠핑카 세트가 들어있었다.


-이건 선율이 선물이야, 언니. 선재 꺼만 잔뜩이라고 선율이가 서운하면 안 되잖아. 직접 캠핑은 못 가도 이렇게 조립해서 캠핑 놀이하면 재밌을 것 같아.


동생이 태어나고 한동안 불안해고 우울했을 선재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쓰였는지 이렇게 머나먼 우리 집까지 깜짝 방문으로 이거 저거 준비한 희경이를 떠올리니 내 마음도 찡해졌다. 그러고 보니 희경이의 첫 동화책도 선재에게 선물해 주고 우리 집에 와서도 무릎에 선재를 앉혀놓고 동화책을 많이 읽어줬었는데 지금도 선재가 좋아하는 거, 즐거워하는 게 뭐냐고 묻는 희경이의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날 밤, 엄청난 선물로 기분이 좋은 선재가 동생을 위해 선심 쓰듯 후다닥 레고를 조립해 줬다. 차를 좋아하는 선율이는 캠핑카가 조립될 때까지 하나씩 부품을 만지작 만지작 빨리 만들어 달라며, 발을 동동 구른다.


드디어 완성! 


캠핑카 안에 커피머신과 머그컵, 카페테리어 같은 공간, 이층 침대까지 정교하고 아기자기했다. 그러다 엄마 품에 담긴 아기 레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작은 아기띠에 담긴 더 작은 아가를 쑥 꺼내보면(레고 아기띠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세상에, 아가라 머리카락은 없지만 발도 있고 앙증맞은 작은 손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다. 귀엽고 땡글땡글한 아가의 눈망울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엄마 품에서 꺼내도 사람 같아, 엄마! 다 있어!


선재의 말에 다시 한번 찬찬히 아가 레고를 들여다본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님이 말했지.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어린이라는 세계>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中



선율이가 작아서 자꾸 툭툭 건드리고 장난치고 싶다는 선재에게 저 말을 종종 해주곤 했다. 손가락만 한 걱정 인형을 꼭 베개 밑에 두고 자곤 했던 선재가 그 인형을 선율이가 잃어버린 이후론 장난이 심해졌다. 은영언니가 선율이 출산 즈음에 선재를 위해 만들어준 특별한 인형이었는데, 안 그래도 미운 동생이 어디에 가지고 놀다 잃어버렸으니;; 자기의 걱정 인형이 온갖 걱정을 떠안을까 봐 그것마저 미안해하고 조심조심했던 선재가 질투와 분노에 선율이는 자기 걱정을 전가하는 걱정인형이라고도 하고 동생에 대한 스트레스로 때론 짓궂은 장난도, 분노 폭발도 서슴지 않는다. 뭐 따지고 보자면 늘 시작과 장난은 선율이가 먼저 하니 서로가 할 말은 없다만서도. 그때 저 말을 해주곤 했다.



아무리 작고 인형같이 보여도 선율이는 사람이야, 너랑 똑같은. 엄마랑도 똑같은.



······ 사실 나부터 내 키의 반만 하고 그 보다 더 작은 우리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으로, 사람으로 대했던가?


화를 버럭 내거나 나의 마음이 편해지려고 했던 사과는 인격적이었나, 아이가 키는 작고 나이가 숫자 10을 못 채웠어도 아이도 사람이다. 인격적으로 한 '사람'으로 대한다면 함부로 때려서도 내 감정으로 앞서 대해서도 안될 일이다. 내가 숱한 주변 다른 어른들을 대하는 걸 잠시잠깐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매일 버럭 화도 내고 후다닥 사과하기도 하는 엄마지만 이런 나를 존중해 주고 나보다 더 나를 찾아주고 사랑해 주는 아이들에게 감사한다. 내가 또 어디에서,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흔히들 모성은 맹목적 사랑이라고 하지만 사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걸 엄마의 손길에 기댈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야 말로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믿고 또 의지하고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게 아닐까. 엄마의 피부색, 외모, 학력, 조건, 나이가 아니라 오로지 내 '엄마'라는 이유로.


선재와 선율이 또래의 친구들을 놀이터에서 자주 만난다. 이번 선재 생일에 점핑파크를 대여해서 아이들과 함께 오후 내내 놀았는데 저마다 개성도 다르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원래 그런가 보다. 티격태격 투닥투닥해도 사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을 살펴보면 뭔가 사랑스러움이 꽉꽉 차서 그걸 숨기려 해도 저마다의 매력으로 고유한 개성으로 나오게 되는 거. 수줍음을 타도, 조금 거칠어도 아이들의 꾸밈없는 모습이 나를 여러 번 감동시켰다. 정신없이 뛰노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역시 제일 말을 안 듣는 건 내 자식들(선재와 선율, 특히 선율이!)뿐이었지만 함께 긴긴 시간 있다 보니 잘 몰랐던 것도 발견하고 새로웠다.





놀이터에서 바라본, 내가 발견한 『어린이라는 세계』


얌전하고 예의 바른 H민이는 웃을 때 귀여운 표정이 된다. 현금이 오고 가는 게임(현질ㅋㅋ)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도 '그래도 시작도 안 하고 모르면 아예 안 하는 게 젤 좋아요!' 라며 씩 웃는다. 내가 양손 가득 짐이 가득 차서 선율이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든 게 힘들어 보이자 말없이 쓱 가져가 들어준다.


H권이는 더운 날, 차를 기다릴 때도 짜증 한 번 안 내고 얌전히 기다렸다가 선율이 안전벨트까지 착착 야무지게 채워준다. 삼 형제 중 막내지만 선재 선율이랑 있으니 맏형처럼 주변을 살펴주는 배려심이 많은 아이다.

-선재야,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나 도와줄게-다정한 카드를 보고 감동했다.


수다쟁이 K결이는 나를 처음 본 날부터 '이모, 이모'하며 친근하게 말을 붙여준 어린이다. 모델처럼 늘씬하고큰 키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재밌는 이야기를 잘한다. 친구와 다툼이 있어도 마음이 여려 항상 먼저 사과하고 나에게 와서 '이모, 사과했는데 **이가 제 말을 못 들은 거 같아요. 한 번 더 할까요?' 내 생각을 물어본다.


H준이는 아이들 다툼도 제일 먼저 나에게 알려주고 상황 파악과 보고가 빠르다. 리더십 있게 앞에서 정리해주기도 하고 혼자 외따로이 있는 친구 옆에 가서 앉아준다. 몰랐던 H준이의 속 깊은 마음씀씀이를 보고 감동했다. 아이들끼리 잘 뭉치다가도 한 명이 소외됐을 때 함께 옆에 앉아 주는 행동만으로도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누군가 다투고 투닥거려도 각자 자기 놀기에 바쁜 상황에서도 또 친구들을 마음 써주는 다정한 아이들을(모든 아이들이 자기의 다툼인양 옆에 우르르 편이 돼 주고 위로를 해주곤 했다) 보니 마음이 다 뿌듯해졌다.


군인 아저씨와 총을 좋아하는 씩씩한 J호는 상남자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재잘재잘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막둥이 선율이도 제일 잘 챙겨주는 다정한 친구다. 열심히 물고기를 잡아 얻은 사탕도 선율이 입에 까주고 내가 혼자서 생일 상을 차리거나 정리할 때  '저도 도울게요' 나서는 모습이 고맙고 예쁘다. 수영을 처음 했을 땐 무서웠는데 하다 보니까 잘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해주고 농구, 캠핑 이야기를 듣다 보면 J호의 도전을 늘 응원해주고 싶어진다.


H율이는 이렇게 같이 오래 놀아본 건 처음인데 축구를 아주 잘한다. 신발도 벗고 양말만 신은 채로 축구공을 뻥뻥 엄청 시원하게 잘 찬다. 말이 별로 없지만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웃는 모습이 귀엽다. 하지만 운동을 잘한다고 혼자만 공을 독점하는 게 아니고 '내가 계속 찼으니까 이제 골키퍼 해줄게, 이젠 네가 차 봐!' 다른 친구에게 양보도 빠르다. 선재 생일 선물로 선재가 좋아하는 뽀로로 캐릭터(선율이 영향인지 요즘 뒤늦게 뽀로로 노래만 부르고 다니는;;;)가 그려진 빵과 비타민, 과자까지 잔뜩 샀는데 하나하나 전부 H율이가 직접 고른 거라고 한다.


선재는 이번 생일 선물로 레고와 게임 관련된 선물을 받았는데 선재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를 친구들이 모두 기억해서 챙겨준 마음이 고마웠다. 누군가 좋아하는 걸 기억해 주고 그걸 선물해 주는 마음은 어른과 어린이 모두 똑같다.


T랑이는 분위기 메이커다. 봉투를 머리에 쓰고 음악만 나오면 자동반사로 춤이 저절로 나온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생일자인 선재보다 자동으로 춤추는 삼인방(H권이, H준이, T랑이- 참, 혼자서 무아지경 막춤을 추는 귀여운 K결이도 있었다 ㅋㅋㅋㅋ) 덕분에 한참을 웃었다. 앉아서 박수를 치다가 가까이 다가와 축하해 주려고 일어나는 모든 아이들도 귀엽긴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배려해 주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지닌 T랑이, 반이 갈렸어도 선재가 왜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게 즐겁다. 에니어그램을 하면서 알게 됐는데 7번 유형은 어린이 같은 면이 무지 많은 사람이라던데, 열심히 놀고 있으면 '어른이(나를 말하는 거임 ㅋㅋ) 애들보다 더 신났네'라고 말한 채원이 말처럼 나도 무아지경 재밌게 놀 때가 정말 많다. 내가 뭐 따로 해 줄 수 있는 게 있나, 나도 즐거운데 같이 놀아야지. ㅎㅎㅎ  어린이 한 명 한 명이 내 안에 또 다른 어린이를 깨워주고 열어주고 손 잡아준다. 땡볕 놀이터에서 시간이 헛되지 않다. 이번에 열심히 같이 놀고 관찰하면서 또 알게 됐다. 어린이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미운 어린이 한 명도 없이 사랑받고 큰 아이들이 나에게 또 각자의 자란 방식으로 다시 사랑을 알려준다는 것을.



★★★ 웃긴 디테일 : 캠핑카 레고 어머님 피부엔 기미도 한가득 ㅋㅋ 오랜 시간 놀이터에서 뛰어 논 나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레고가 이렇게까지 디테일한 일인가, 이번 캠핑카 선물로 레고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놀이터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나의 양쪽 눈 아래 가득한 기미 주근깨들도 이제는 친근할 정도로 놀이터 엄마가 돼 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웃음이 난다.



먼D(먼데이 마더스)에 오로시님이 새벽 북클럽 시간에 이 책으로 모임을 했다. 그래서 나도 한 번쯤 이런 글을 남겨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오로시님 글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생각이 귀엽고 또 꽉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관련 도서 리뷰를 읽고 싶은 분은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아주 재밌어요!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에세이/ 사계절 출판(260p) // 먼D마더스 (브런치)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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