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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Jul 03. 2023

사랑니

마지막 사랑니를 뽑으며

지난주 목요일, 마지막 사랑니를 발치했다. 왼쪽 윗니 하나가 남아있었는데 검진과 스케일링을 하러 갔다가 별다른 이상은 없지만 아래 잇몸이 피곤한 날 붓거나 아프다고 하니 사랑니 하나가 다른 것보다 크게 내려와 있어서 뽑아 버리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혀로 툭툭 건드려 봐도 위에 마지막 어금니 보다 2,3mm 정도 아래로 내려와 있는 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 보다 입 안도 작아서 치아들로 자리가 꽉꽉 찼는데 비집고 들어와 불법 정차한 커다란 자동차 인듯한 하나 남은 사랑니가 더 거슬렸다. 30대 초반에 사랑니를 3개 뽑았는데 이 하나는 왜 남겨뒀던 거지, 그냥 마취하는 김에 한 번에 다 뽑아 버렸으면 후련할걸, 밀려드는 후회. 아마도 큰 아이를 임신할 즘, 치과 치료를 미뤄둔 탓에 마지막 사랑니 하나를 놓친 것 같았다. 마지막 사랑니에 대한 집착은 없었지만 주변에 나이가 들고 사랑니를 발치했다가 고생한 분들이 몇 명 있어서 살짝 고민이 됐다. 이웃에 사는 선주 언니는 사랑니 발치로 신경을 자극해서 치료를 오래 다니기도 했고 알사탕도 와자작 부숴 먹었던, 치아가 튼튼했던 둘째 기수 삼촌도 사랑니 발치로 튼튼했던 잇몸이 한 번에 무너졌기에. 나는 의심 많은 성격답게 다른 두 군데 치과에서도 상담을 해보니 윗니는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이 잇몸 안에 거슬리고 불편하면 

빼라는 것이었다. 빼라!



빼도 됩니다, 그간 다른 사랑니도 별다른 후유증이 없으셨고
아랫니가 아닌 윗니는 괜찮아요.
빼는 게 훨씬 편하실 거예요. 



아, 얼마나 명료하고 간결한 말인가. 빼라, 고민할 것 없이, 빼라. 

기분이 가벼워졌다.


웃으며 말씀하시는 친절한 치과 선생님의 말씀에 신뢰가 가서 '뿌리사랑 치과'에서 사랑니 뿌리를 통째로 뽑아 버리기로 했다.






사랑니가 네 번, 총 네 개의 사랑니가 잇몸을 뚫고 나왔다. 첫사랑이 이뤄질 무렵인 스무 살 무렵 신기하게도 한 두 개씩 나왔지만 *wisdom tooth란 말과는 달리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여전히 어렸고 철이 없었다. 없던 지혜 역시 마구마구 솟아나지도 않아서 사랑니와 삶의 상관관계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그런 게 있어?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뚫고 나오는 단단한 마지막 치아의 고통은 극심했지만 나는 어쩌면 스무 살 무렵부터 좀 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 같다. 불안과 우울이 주된 정서였던 상태에서 벗어나서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삶을 즐겨야겠다, 그냥 좀 귀여운 사람이 돼서 웃고 싶을 때 마구마구 웃고 울지 말라고 그렇게 혼났어도 울음도 끝장을 봐서 울고 싶으면 그냥 끝까지 울자, (*심슨에서 리사가 한 말이기도 한데 나는 다 큰 어른이었어도 이 말이 그렇게 와닿을 수 없었다. 이 말 때문인지 선율이를 따라가다가 거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우는 어른이 되었는가!) 물론 사랑니 하나에 그런 결심을 한 건 아니지만 이왕, 현재, 여기에 있을 거면 그렇게 여기에 좀 더 충실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날 이해해하지 않고 진짜 '나'에 대해 나도 몰랐기에 좀 더 즐거운 깨발랄한 스무 살, 이십 대를 보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발악하고 나오는, 마지막 자리에 원래 없어야 할 이 하나가 아직은 내가 살아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고 기회를 주는 것 같았다. 용감하게 첫사랑에게 고백도 했고 나도 고백을 받았다. 어떤 기회라는 건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예 이뤄지지 않는 게 대부분이었기에 나의 적은 노력으로도 운 좋게 이곳까지 달려왔다면, 이제는 내 생각을 바꿀 차례구나, 어렴풋한 생각이 행동으로 바뀌었다. 공상과 상상은 이미 차고도 넘치게 충분히 했으니까. 더 이상 죽음, 보이지도 않는 귀신을 생각하는 대신 진짜 현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넘어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을 다시 찾아뵙고 인사했을 때 모두들 반응이 비슷했다. 반항기 가득한 내 눈과 말투만 보시다가 나경이가 점점 더 어려지고 귀여워진다고 했고 이제야 너 같다는 말도 들었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이었나? 갸우뚱했지만 나는 그 반응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제야 사랑을 좀 받아보겠네 하는 희망마저 생겼다.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었지만 또 내 안에 원래 있었던 다른 모습처럼 칭찬받는 기분이 들었고 편안했다. 



따끔합니다



의사의 짧은 말에 몸이 경직 됐지만 사실 따끔 보다도 찌르는 느낌, 찌르르 띵 한 기분이 들면 서서히 마취가 시작된다. 양쪽 잇몸으로 안쪽 볼살(?)에도 마취가 들어가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살이나 잇몸을 살짝 올려서 아주 소량씩 곳곳을 찌르는 느낌이 든다. 이를 뽑는데도 아무 느낌이 안 날 정도의 마취라니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편리하다. 겁이 많은 나는 신경 치료 때도 마취 주사를 몇 번씩 맞았는데 사실 주사 맞기 전 긴장하는 게 더 떨리고 싫었던 기억이 난다. 마취 주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뭐든 시작하면 아프지 않은데 입을 벌리기까지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그때 이튼 치과에서 양쪽으로 내 손을 꽉 잡아준 고마운 간호사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끙차



눌리는 느낌이 좀 날 수 있어요. 묵직하고 눌립니다. 병원에서 뭔가 전신 마취가 아니고 부분 마취일 때 이렇게 중계해 주는 게 안심되고 좋다. 눈으로 내가 직접 볼 수 없으니(가끔은 병원 수술대 위에 거울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실시간으로 내 상태를 말해주는 게 안심이 되고 긴장을 풀 수 있다. 전혀 아무 감각은 없으나 선생님께서 꽤나 힘을 주고 뭔가를 묵직하게 꺼내는 느낌이 어렴풋이 든다. 

아프진 않다, 전혀, 작은 통증은 없지만 그렇게 스르륵 훅 한 방에 사랑니가 뽑혔다. 



달그락



뽑힌 이가 접시에 놓아지고 거즈를 물려주시면서 선생님이 이야기한다. 

이제 다 뽑혔어요. 앙, 물어보세요.

궁금해, 참을 수 없다. 대체 어떤 모양인지 이젠 소리가 아닌 눈으로 보고 싶다.


사랑니는 빼자마자 아주 두꺼운 솜을 물려주는데 (둘둘 말린 거즈) 그걸 두 시간 동안 꾹 물고 있어야 한다. 간호사가 당부한다. 이미 알고 있지만 꼭 들어야 할 주의 사항!




피가 나는 대로 전부 삼키세요. 그래야 피도 멈추고 지혈이 곧 됩니다.





마취가 풀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피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녹슨 쇠 조각을 계속 녹여서 빨고 있으면 이런 맛이려나, 작은 구멍 안에 이토록 많은 피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구나. 그래도 내 몸 어딘가 있었던 피니 꿀떡꿀떡 간호사 선생님 말처럼 그대로 삼킨다. 잠시라도 말을 안 하면 고요한 침묵을 싫어하는 나지만 이럴 때에 말을 할 수 없으니 오늘은, 아니지, 이 2시간만큼은 최대한 말을 아낀다. 꿀떡 넘어가는 피가 왼쪽 목구멍으로 꿀렁꿀렁 넘어가는 게 느껴진다. 거즈는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지금 지혈을 제대로 한 가 싶게 피로 물들어간다. (중간에 두 번 꺼내봤는데 생각보다 피가 많이 나지 않아서 역시 또 내가 오버했구나 싶었다) ㅋㅋㅋ


신기하지, 어린아이의 유치는 뿌리도 없고 출혈도 심하지 않다. 뿌리가 녹은 이유는 밀고 일어나는 새 이가 자라면서 이에 또 양분을 주기 때문인가, 선재는 이갈이를 늦게 시작한 편인데 지금도 계속하는 중이고, 한 번도 이를 뽑았다고 울거나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자기 치아 하나하나를 수집하고 베개 아래 두고 자곤 했다. *스펀지 밥에 나오는 이빨 요정 편을 보고 난 이후로, 베개 아래 2달러 대신 2천 원이 놓여있으면 그렇게 기쁘다고 폴짝폴짝 뛰었다. 상처가 나면 그냥 꿀떡 마셔야 할 때가 있다. 어린아이들은 그 찰나가 어른에 비해 좀 더 짧고 그만큼 회복력도 빠른 것 같다. 다 자란 사랑니 피를 삼키면서 나는 계속 신기하게 생긴 구멍 같은 미궁의 잇몸을 계속 들여다보고 하루 수십 번 더 거울을 들고 혀 끝으로 말랑말랑 상처를 누르곤 했던 걸 떠올렸다. 윗니는 잘 안 보여서 대부분 아래 사랑니 뺀 자리로 회복되는 과정을 떠올리니 말캉한 젤리처럼 피가 굳고 찰방찰방 출혈의 흔적과 피가 차오른 자리가 생각난다. 피가 고였던 그 자리는 시간이 차츰 지날수록 원래 그 자리인양 자연스럽게 구멍은 사라지고 평평하게 솟아난다. 메꿔지는 구멍의 과정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나의 불안도 상처도 누군가에게 짜증과 화로 넘기는 대신 그대로 꿀떡꿀떡 마시면 넘칠 듯 차오를 듯 터져 나올 것 같지만 당장은 아물 수 없지만 또 시간이 지나매 흔적도 없이 구멍이 메꿔지겠지. 그 과정이 즐거웠던 거구나, 나는. 그래서 자꾸만 구멍 난 사랑니 자리를 건드려보고 언제쯤 메꿔지나 쳐다봤던 거구나.


나의 상처나 아픔이 결국은 내 몫이듯이 하나가 빠진 자리 주변으로 잇몸이 풍선처럼 매끈하게 부풀어 오르고 구멍 난 자리 하나가 좀 불편하긴 해도 그냥 이렇게 적응해서 또 익숙하게 살다 보면 위로 단단하게 잇몸이 솟아난다. 신기하게도 뿌리 세 개의 사랑니는 아무 통증이 없다. 얘는 안 뽑았으면 더 튼튼하게 자랄 만큼 아주 튼튼하게 보였다. 세상에, 맙소사!!! 의사 선생님이 마취를 엄청나게 잘한 건지, 정말 처음부터 뽑아냈어야 할 후련한 이였는지, 주변 잇몸이 살짝 부풀어 오른 것 외에 따로 불편 한 점이 없었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치과에 다녀와서 통증이 없었던 적은 처음이라 챙겨준 항생제를 꼭 먹어야 하나 생각도 들었다. 두통이나 살짝 뻐근함 마저도. 출혈도 곧 멎었고 빈자리는 허전함 보다는 편안하게 느껴졌다.  




선생님 : 이야, 뿌리가 세 가닥이나 됐어요. 윗니인데도 큰 편이죠, 그래도 뿌리가 중간에 안 잘리고 깨끗하게 뽑혀서 다행이네요. 잘 뽑혔어요. 고생하셨어요.(고생은 선생님께서 하셨습니다만;; 저는 "아~~"하고 입을 벌리고만 있었는데요^^)
나 : 헙!!! 이렇게 커요? 아래 어금니, 사랑니보다 훨씬 큰데요. 선생님 이거 제가 기념으로 가져가도 될까요?(선재한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선재를 떠올렸다)
선생님 : ······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아, 이건 적출된 거라 전부 폐기해야 하고요, 기념으로 꼭 가져가고 싶으시면 이렇게 해서 이대로 사진을 찍어 가세요. 





찰칵찰칵찰칵!




통통한 선율이 손가락 같은 뿌리가 세 가닥 난 내 마지막 사랑니를 사진으로 남긴다. 피가 묻어 있어 놀랄까 봐 사진은 흑백으로 남겨야지 생각하면서.


우리 나경이는 사랑을 많이 받아서 사랑니도 아주 듬뿍듬뿍 사랑받고 통통해졌네, 언제나 다정하게 말해주는 정영언니의 문자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마지막 사랑니를 뽑으면서 사실, 남아있는 상처 자체보다는 나는 치유되는 그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겁은 많지만 원래 그 자리에 없어야 할 상처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냥 드러내면 된다. 상처 난 자리가 처음엔 살짝 불편할 수도 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알아서 처음 그 자리, 모양으로 돌아가는 단단한 잇몸처럼 우리의 상처들도 '새로운' 치유를 선물해 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wisdom 지혜 

-인생의 지혜는 늦게 찾아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wisdom tooth 사랑을 알게 될 때 혹은 지혜가 차오를 때 나오는 치아. 우리말로는 사랑니.

*심슨 

-심슨 가족/ 미국 Fox에서 방영 중인 미국 애니메이션./ 맷 그레이닝 원작./ 시트콤 및 애니메이션 부분에서 최장수 프로그램. 미국의 대표 애니메이션.

*스펀지 밥 

-네모바지 스펀지밥/ 니켈로디언 키즈에서 방영./ 원작자인 스티븐 힐렌버그(2018년 질병으로 작고)가 해양생물학자였기에 현실 고증이 잘 되어 있는 편./ 바다 마을 비키니 시티가 주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글 쓰는 오늘 Season 13 우리들의 글루스 III
첫 번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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