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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May 09. 2023

여의도 벚꽃 마라톤

나의 사점(dead point)은 뛰기 시작했을 때


아무 준비도 없이, 특별한 운동도 없이 5km 마라톤에 도전했다. 활동량 많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많게는 하루에 만 칠천 보, 짧게는 만보 정도를 꾸준히 걸었으니 5km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고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다가 러너스 블루라는 걸 읽고 나도 숨이 차게 달려 보고 싶단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사람들은 왜 마라톤을 할까, 왜 다들 달릴까, 러너스 블루를 겪으면서도 다음날 다시 일어나 또 조깅하는 하루키의 심경은 어땠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은 생각일 뿐.



러너스 블루개뿔 



(나왔다, 개뿔! 진짜 뛰면서 간만에 혼잣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헥헥 거리며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일인 방송 하는 줄 알았을 수도.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아씨, 언제 끝나? 아고 힘들어! 힘들어 죽겠네!')


뛰고 났을 때 내 심경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피꺼솟*: 거꾸로 아니고 진짜 꺼꾸로! 얼굴이 간만에 토마토처럼 익었다. 땀도, 열도 아니고 오직 달리기 하나 만으로!


온몸의 심장 박동을 다 느낄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달리기를 해서 숨이 찼던 게 고등학교 시절 체력장 이어 달리기 고2 땐가 그랬던 것 같은데, 사실 살면서 이렇게 미친 듯이 기계적으로 뛸 기회가 많진 않다.

가끔 아이들에게 화낼 때, 혼자 흥분하고 짜증 나고 야단칠 때도 피가 거꾸로 솟는 심경이 살짝 있긴 해도 이건 차원이 다르구나. 다시 한번 느꼈다.



5km니까 체육시간에 배운 데드 포인트가
2.5km 정도 중간쯤에서 오겠지,
그럼 나는 반환점을 돌아 쇽쇽
데드포인트를 이기고
다시 호흡을 되찾아서
40분 안에 들어와 보자.



이것이 나의 계획과 목표였다.


마라톤을 신청해 주고 격려해 준 쑥이는 이미 여러 번 마라톤을 뛰어 본 경험이 있기에 30분 안에 들어오는 걸 완주 목표로 삼았다. 아, 그리고 힘들어도 절대 걷지 않고 뛰겠다는 것도! (이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해!ㅋㅋ)


뛰는 게 참 힘든 거구나!

 

시작 징 소리와 함께 우르르 나갈 때만 해도 뛸 수 있을 것 같고 선선한 바람도, 여의도 풍경들도 산뜻했다. 날씨가 진짜 열 일 한다고 해가 나지 않고 살짝 추운듯한 봄기운이 달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계속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자의 진행처럼 5km 사람들이 전부 착장에만 신경 쓰고 sns자랑용으로 가볍게 뛰듯이 나 역시 그냥 한 번 '해보지 뭐'하는 참여에 의의를 둔 사람이었다.


그런데 출발하고 오분쯤 됐을까, 물 밀듯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갑자기 조여 오는 듯한 러닝화의 기운, 점점 멀어져 가는 쑥, 무리해서 따라갈 수도 있고 발맞춰 친구랑 오손도손 뛸 수도 있었지만 나는 내 상태를 이미 알았다.



아, 여기서 진숙이를 따라가면 안 돼. 내 페이스를 지키자,
대신 나도 걷지 않고 이렇게 걷는 것보다 느려도 멈추지 않고
뛰어가는 거야.



마지막 쑥이 말에 나도 어떤 결심을 하게 된 걸까. 어찌 됐든 목표 수정, 나는 여러 명의 무리들이 바뀌면서도 계속 뛰고 또 뛰었다. 입으로 숨을 쉬지 말고 코로 호흡 조절을 하고 싶었으나 그것도 곧 실패, 헥헥 거리며 아이고, 아이고, 죽갔다를 연발했다.






나의 데드 포인트는 1km. 정확히 말하면 1km도 안 되는 지점이었다. 아아, 내가 아이 잡으러 뛰 댕기고 놀이터에서 미친 듯이 미끄럼틀 수십 번 타는 건 즐거운 경험이었구나, 돌아가면 좀 더 즐겁고 가볍게 놀아줘야지, 불평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늘 그랬듯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지만)



처음 뛰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사점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진숙이 역시 처음 달릴 때 그랬다고 한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건가, 뛰어본 적이 없으니, 내내 달리기만 한다는 게, 그것도 우왕좌왕 우르르 발맞춰 제각기 다른 속도로 뛰는 사람들 사이로 달린다는 게 나를 찾기 힘든 동시에 누구보다 나를 찾고 나만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 아닐까.


쓰면서도 좀 웃긴다, 누가 보면 42.195km를 완주한 사람도 아닌데 뭘 이리 많이 느꼈냐고 할 수 도 있지만 실제로 헥헥, 뭐 하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많은 걸 느꼈으니까.


새벽에 출발해서 도착한 여의도의 분홍색 풍선은 페이스 메이커들이 곳곳에서 나와 함께 해주는구나, 나를 환영하는 것 같았고

(사실 5km엔 페이스 메이커도 기록도 없습니다. 알아서 그냥 잘 뛰면 됩니다. 우르르 ㅋㅋㅋㅋ)

벚꽃은 없고 이미 다 날아가고 졌지만 엄청난 다량의 꽃가루들이 나를 반겨줬다. 적어도 꽃가루 세 번은 입으로 삼킨 듯하다.


짧은 테니스 치마를 입은 발랄한 처자가 나처럼 죽겠다고 하면서도 열심히 달릴 때마다 나도 멈추지 말아야지 생각했고 엄청 커다란 백팩을 메고 뛰는 처자를 보면서는 가방을 빼앗아서 던져주고 싶었다. 오지랖이 끊임없이 발동하는 순간들. 손에 깁스를 한 채 달리는 우리 선재 또래의 아이랑 달릴 땐 나도 파이팅, 응원을 외쳐줬다. 앞사람, 옆 사람 발만 보고 달리고 귀를 열어 둔 채, 누군가들의 대화에 쿡쿡 거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1km씩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타난 반환점!! 멀리서 먼저 도는 진숙이가 부르는


나경언니!!


나를 부르는 소리. 얼마나 반가운지! 누구도 반환점 중간에 껴서 그냥 돌 수도 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번 보고 말 사이라지만 저마다 양심을 지켜 최대한 정직하게 코스대로 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냥 진숙이 자리에 쓱 끼어들까 몇 초 동안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사실은 힘들어서 쫓아갈 수도 없었던 거지만 ㅎㅎㅎ


마라톤은 앞에서 선다고 일등 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경쟁도 아닌데 신기하게 반환점 구간에선 돌고 나서 나보다 더 우르르르르 뒤에 반환점이 한참이나 남은 사람들을 보면 야릇한 기쁨이 있었다. 뒤에 아직도 많구나 하는 내가 그래도 요렇게 앞서 달리고 있네 하는 뿌듯함,

하여간 그런 게 있어서 좋았다.


등산할 때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런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세요, 곧 정상입니다.



마라톤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반환점 구간부터,


 자, 이제 반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결승점입니다.



나는 말에 민감하고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헥헥거리고 뛸 때마다 첫 시작 지점에서 100m 정도를 뛰었을까. 어느 커플의 청년이 자기 여자 친구에게

-이제 이렇게 50번만 더 하면 돼!

이 말을 하는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왔다. 시작부터 발도 불나는 것 같고 벌써 힘든데, 내 심장은 그동안 어떻게 어디에 익숙해진 거지 싶고. 가벼운 옷을 입을걸, 엄마네서 자는 바람에 옷이 없어서 오버사이즈 폴로셔츠(신랑 꺼)를 입었는데 카라 있는 두꺼운 셔츠를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단체로 나눠준 내복 같은 분홍 티셔츠를 입는 건데 아우씨!! 날씨만 좋았지, 나의 의상과 조이는 운동화가 대 실패였단 생각에, 아니 이 상태로 50번을 어떻게 뛰라고! 알 수 없는 아우성과 외침이 울컥울컥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무슨 오기인지 멈추지 않고 계속 헥헥거리면서도 뛰었다.


뛰고 또 뛰고 발길에 따라, 뒤쳐지기도 하고 앞서거니도 하면서 약하게 때론 강하게 (드라마틱하게 앞으로 나갈 일은 절대 없었다) 달렸다.


계속 달렸다.


그렇게 나도 쉬지 않고 달렸다.


달리다 보니 달리기에선 사실

데드 포인트가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냥 뛰고 있는 자체가 중요하고 멈출 줄 모르고 결승선만 쫒는 두 다리가 있다면 심장이 지치고 헥헥거려도 계속 이대로 걷는 속도보다 느려도 달리고 싶었다. 이 정도가 나의 달리기라는 걸 나도 처음 배우는 중이었다.



나의 러닝메이트들은 전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중간에 사진을 찍고 라이브 방송을 하기도 하고

브런치 얘기를 그렇게나 하더라. 여기 지금 내가 글을 쓰는 브런치가 아니라 이제 뭐 먹을까 브런치? ㅎㅎㅎ

10시에 문 여는 브런치 가게로 고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대화들.

암, 중요하지, 아침까지 안 먹었다면 한껏 뛰고 난 뒤에 먹는 음식은 무엇보다 귀하리.


아예 천천히 걷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열심히 달리는 젊은 아빠(모두 유모차 아기가 부럽다고 했지), 거꾸로 뛰는 데도 나보다도 빠른 할아버지, 아까 유난히 짧은 테니스 스커트의 아가씨(신발도 구두였는데 엄청 잘 달림), 나처럼 선율이 또래를 가진 엄마(중간에서 아빠와 어린 아기가 엄마 파이팅! 하고 외치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다음 달 출산을 앞둔 만삭의 임산부.


...



저마다 뛰는 이유도 목적도,

목표도 달랐지만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뛸 수 있는 만큼

뛰었다.


반가운 건물이 보이자 그때부터 기분이 급 좋아지더니 결승점을 통과해서 어여 나무 그늘에서 쉬어야지, 물도 계속 안 마시고 참았는데 음료수도 벌컥벌컥 들이켜야지! 아니다, 제일 먼저는 이 꽉 조여 오는 운동화를 다 벗어버릴 거야! 그리고 나도 브런치, 먹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마지막까지 힘을 내 보았다.


오늘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은 분홍 풍선들과 반환점과 결승점에서 나를 촬영까지 해주고 불러준 고마운 진숙이 이야기를 브런치에도 담아봐야지 생각했다.


*2주가 넘어서야 이제 쓰는 마라톤 후기, 나의 러너스 기쁨! 러너스 상쾌 통쾌! 피꺼솟!!!

수다 본능을 좀 더 오래오래 곱씹어 봤다. 게으른 자여, 좀 더 자주 빨리 브런치를 쓰자!




쿠키 1 ) 그날 아침, 브런치 카페 마마스는 온통 분홍티의 향연, ㅋㅋㅋㅋ 아까 브런치 이야기한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마마스 샌드위치, 샐러드, 주스와 커피가 대박!!  
쿠키 2 ) 나는 뛰자마자 내 번호표를 기록하는 사람에게 보여줬는데 5km는 기록 안 합니다. 괜찮아요. ㅋㅋ
37분인가에 골인! ㅋㅋㅋ 40분 안에 들어옴!



마마스 커피와 브런치는 꿀맛!


메달 가져가지 마세요. 한 사람당 하나씩, 하나만!                               쌓여있는 메달들 중에 하나를 뽑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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