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나우 Dec 02. 2022

선생님의 편지

구경희 선생님, 구자옥 선생님께

 내가 처음 문단에 나올 때 (1970년)만 해도 사십 세에 데뷔하는 일은 좀 희귀했었나 보다. 들고 나온 작품보다는 그 나이에 어떻게...라는 호기심으로 더러 화제가 되었었다. 그동안 습작은 얼마나 했느냐, 응모했다가 떨어진 경험은 몇 번이나 되느냐, 주로 문학에 대한 나의 집념이 보통이 아니라고 여기고 던지는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그때마다 나는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았는데 처음 쓴 작품이 당선되었다고 솔직히 말하면 괜히 잘난 척한 것 같고, 집념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마음 상태 이건만 그것조차 없었다고 하면 꼭 거짓말을 시키고 난 것처럼 떳떳지 못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집념하곤 달랐다. 그럼 그건 뭐였을까.

   … 그때(6.25) 내가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로 그래, 언젠가는 이걸 소설로 쓰리라, 이것이야말로 나만의 경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집념하고는 달랐다. 꿈 하고도 달랐다…

   … 그래서 처음으로 세상에 글쟁이로 선을 보이게 되었을 때의 감상도 꿈을 이루었다든가, 노력한 결실을 거두었다든가 하는 보람보다는 마침내 쓰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안도나 체념에 가까운 거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꼭 소설로 쓸 작정만이 구원이었던 그 시기를 막상 소설로 쓸 때는 상상력이 조금도 움직여주지 않았다. 상상력이 먹혀들 여지가 없을 만큼 그 시절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끔찍하기도 했지만, 나 혼자만 보고 겪은 사실에 대한 두려움과 책임감이 소설에 대한 욕심보다는 증언 쪽에 더 중점을 두게 했다. 

   …(6.25 전쟁) 미 체험 세대에게 소설로 보다는 자료로 새롭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박완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작가님의 시작을 여는 글을 보니 나의 초등학교, - 아니지, 국민학교 ^^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글쓰기’를 사랑하게 된 정말 커다란 사건. 

 나도 작가님처럼 ‘이건 꼭 소설로 쓰리라’하는 마음이 든 건 아니지만 이 글은 꼭 읽었으면 하는 대상이 있다. 

5학년 3반 18번 박나경. 나를 부모님보다 더 사랑해 주고 아껴 주었던 우리 선생님. 구경희 선생님. 

 선생님은 긴 생머리에 마른 몸, 뿔테 안경을 끼셨는데 청바지가 정말 잘 어울리셨다. 나는 팽팽 돌아가는 그 뿔테 안경이 지적으로 보였다. 선생님은 틈만 나면 우리에게 윤동주 시인의 노래나 행복의 나라,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같은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조금 자라고 나서야 대부분이 민중가요이거나 데모할 때 자주 등장하는 노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란 걸 알았지만 나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 배운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 속 가사는 어느 시보다 아름다웠고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이 노래는 무척이나 슬프고 가슴이 아려왔다. 후에야 윤동주 시인의 동시를 읽다가 시가 노래가 될 수 있구나, 노래가 슬픈 게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 맑고 슬펐던 거란 걸 깨달았다. 

 그해 여름이었다. 여름 방학 한 달 넘게 빈둥거리고 열심히 논 탓에 일기를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는데 개학식을 이틀 남겨두고 불호령이 떨어졌다. 지금껏 한 탐구생활, 방학숙제를 점검하겠다는 아빠의 불호령. 교육열이 높으신 분이었는데 그럼 좀 미리미리 검사를 하시지;; 꼭 개학을 앞두고 전체 점검이 들어갔다. 탐구 생활, 만들기도 텅텅, 곤충채집이며 라디오 듣기도 제대로 안 했는데 그중에서도 아빠가 제일 화를 낸 부분은 바로 ‘일기 쓰기’였다. 왜 정직하게 살지 않았냐고! 반성해야 할 천지의 삶을 사는데 일기는 한 줄도 안 쓴다면서 어찌나 혼을 내는지, 언니와 나는 무릎을 꿇고 일장 연설을 듣고 회초리를 맞았다. 

 그날, 밤을 새우면서 탐구생활을 오리고 붙이고 아빠가 만들기도 대부분 도와주셨는데 마지막 ‘일기 쓰기’만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아빠는 정직하게 써야 한다면서 신문에서 여름 방학 내내 날씨를 전부 오려서 알려주셨다. (아니, 날씨만 정직하면 되는 건가? ;;;)

 30일이 넘는 긴긴 방학 동안 한 일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데 뭘 쓴단 말인가. 아빠의 긴긴 잔소리, 무릎 꿇고 벌서는 건 진짜 싫어서 그냥 오기로라도 밤새워서 다 써버리겠다고 장담은 했는데. 잠시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그동안 읽는 책에 대한 감상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책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닥치는 대로 다 읽었는데 독서한 것만큼은 ‘거짓’이 아니기에 주인공에게 편지 쓰기, 뒤에 내용 바꾸기, 인상적인 구절을 채워서 일기를 썼다. 손이 다 무르도록, 말랑해진 셋째 마디에 펜 혹이 생기도록 한 바닥씩 꽉꽉 채웠다. 그런데!!


                                                                쓰다 보니

                                                           재밌네? ㅋㅋㅋㅋㅋ


 혼나고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쓰는 거짓 일기인데 반절도 아니고 끝까지 한 바닥을 전부 넘길 정도로 그다음 장까지 이어질 정도로 정신없이 푹 빠져 썼다. 독후감 같던 내 일기는 어느새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여행을 가있기도 했고 언니랑 다투고 난 뒤 화해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인상 깊었던 사건, 무서운 일도 등장했다. 거짓으로 된 상상도 있었지만 무서웠던 감정, 화해했을 때 내 마음 같은 건 온전한 진심이었기에 죄책감도 없이 나중엔 웃으며 일기를 썼다. 

 개학을 하고 아빠가 만들어주신 만들기 기가 방학 우수상도 받았다. 그리고 내가 쓴 일기장 두 권이 묶어져서 전교에서 주는 일기 쓰기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런 상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때 선생님의 추천인지 뭔지 아무튼 그런 상이 만들어졌고 내가 그 주인공이 됐다. 

 구경희 선생님께서 모든 일기마다 멘트를 달아주셨는데 한 장 한 장, 누가 내 일기를 이렇게 재밌게 읽어줄 수도 있구나 처음 느꼈다. 내 인생의 첫 독자가 생긴 기분이 들었다. 

 내 기억에 아빠는 교장실까지 가서 받은, 생중계됐던 나의 ‘최우수상’을 그다지 자랑스러워하진 않으셨다. 거짓말쟁이가 상을 받았다고 놀리는듯한 말투로, 하지만 정말 놀란 표정으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선 ‘나경이 글을 자꾸만 읽고 싶어 진다’, ‘이런 마음이 들었구나’하는 공감의 말을 일기장 가득 빼곡히 적어주셨는데 마치 컴퓨터로 인쇄된 듯한 글씨체, 거기에 달려있는 모든 글들이 나를 지지하고 칭찬해 주는 것만 같았다. 늘 모든 것이 1등, 엄마 아빠의 자랑이 된 언니와 달리 귀여움으로 승부하려 해도 짜증스럽고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그것마저 실패해버린 나였기에 누군가 나를 그토록 온전히 ‘바라 봐준 것’만으로도 자랑이 된다는 것을 처음 느껴봤다. 부모님이 한 번도 잘했다, 애썼다, 사랑한다 이런 이야기를 안 해주셨기에 나는 끊임없이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아이였는데 마음으로는 사랑한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언제나 확실한 ‘말’ 정확한 ‘글’에 목말랐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 언니와 비교해서 혼내고 미워한 걸 사과해달라, 아빠가 너무 무서워서 거짓말쟁이가 됐다는 둥 늘 말이 많은 아이였지만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한 살 터울인 천사 같은 언니만이 나를 사랑해 주고 내 말을 들어주고 모든 걸 양보해 줬는데 나는 내 미움의 시작이 언니였기에 늘 양가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5학년 2학기부터 나는 누구의 사랑도 갈구하지 않았다. 이미 구경희 선생님이 나를 애정해 주시고 귀여워해 주신다는 걸 깨달았는걸. 학교가 끝나고 선생님이랑 단둘이 글쓰기를 해보자고 했다. 동시를 쓰기도 하고 반대표로 웅변대회에 뽑힌 남자아이의 연설문을 써주기도 했다. 신기한 건 쓰기만 하면 상을 받고 그 남자아이도 상을 받아서 문화 상품권을 나눠줬다. 


나머지 ‘공부’가 아니라 

나머지 ‘보물찾기’ 시간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돼서 선생님은 일기 속에서 내 외로움과 눈물을 보셨던 걸까. 그래서 진짜 내 친구가 돼주기로 하신 건 아니었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 전체 기합 시간에 늘 반장이었던 나를 따로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고 천천히 들어오라고 하시고

따로 글쓰기 연습까지 알려주신 선생님의 편애는 정말 달콤하고 깃털처럼 가벼웠기에 거짓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거짓이어도 뭐 상관없을 만큼 행복했다. 둥둥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기에. 매일 학교에 가고 싶었다. 일요일까지도. 

 나는 그래서 선생님들의 편애를 편애한다. 누가 더 예쁘고 좋을 수도 있지, 선생님도 사람인데. (중학교 때는 우리 반 부반장만 예뻐하는 것 같다고 상소문 같은 편지를 세 장이나 써서 남자 담임선생님 책상 위에 둔 적이 있다. 죄송합니다, 구자옥 선생님 ㅠㅠ) 

나를 편애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특별하다고 믿었는데 가정에서 그런 사랑이 늘 풍족하지 않으니 늘 밖에서라도 채워지길 바랐던 것 같다. 떼떼떼 거리고 말도 많고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도 했으나 나와 성향이 맞는 가족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일 학년, 입학한 순간부터 선생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썼으나 겉으론 예뻐하고 발표 잘하는 나를 안아줬지만 돌아오는 건 통지표에 ‘나경인 성실하고 예쁘나 이기적’, ‘자기만 바라봐 주길 바라는’ 요런 말들이 쓰여 있었다. 일 학년짜리 아이에겐 너무 큰 상처가 아니었을까. 이기적인 이란 말도 몰랐을 땐데 엄마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줬다가 두드려 맞은 기억이 난다. 그런 내게 쥐구멍 인생 볕 들 날처럼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처음으로 지나친 사랑을 받았다. 그게 비록 거짓으로 밤새 쓴 일기장 때문이었어도. 

 가장 끔찍한 숙제가 될 뻔한 여름방학 일기 쓰기가 행복한 시간이 된 것도 감사한데 선생님의 칭찬까지 받으니 나는 그 시절부터 선생님, 어른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어른들과 수다 떨고 내 이야기를 하는데 주저함 없었으며 모두가 선생님처럼 온전한 내 편이 된다는

착각, 행복한 착각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생님께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꾸벅 수줍게 인사만을 했지, 따로 감사함을 표현한 적은 없다.

 그 해 겨울방학에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편지 쓰기 형식에 맞춰서 글씨도 어느 때보다 신경 써서 미리 한 번 쓰고 세 번이나 고쳐서. 제일 예쁜 편지지에 별거 아닌 이야기에 사랑을 담아서. 

며칠 뒤 답장이 왔다. 역시나 컴퓨터체 글자, 반듯한 글씨. 

클래식한 줄 편지지에 담긴 선생님의

첫 문장은


선생님은 많은 아이들 중에서 나경이 편지를 제일 기다렸어. 언제 나경이가 나에게 편지를 써줄까 하고. 


나는 그걸 읽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난다. 엉엉 울고 싶었는데 내가 받은 넘치는 사랑에 너무 죄송하고 벅찬 마음, 미치도록 좋아서 동동 거리고 싶은 마음이 교차했다. 

글쓰기의 시작은 밀린 일기 쓰기였지만

난 이미 밀려있던 내 사랑을

우리 선생님의 편지 한 장에 다 받은 느낌이 들었다. 

국문학도가 돼야지, 평생 글 쓰고 민중가요를 부르고 기타 치고 시를 쓰고 선생님처럼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돼야지 다짐했다. 선생님이 국문과 인건 지금도 모르지만 그냥 그때부터 내 작은 다짐이 타올랐다. 

아이러니로 시작했지만 세리머니가 된 나의 글쓰기의 시작도 일기 쓰기와 선생님의 편지였다. 구경희 선생님은 잊을 수 없는 선물로 학기 말에 예쁜 편지지에 모든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롤링페이퍼를 그때 처음 써봤다. 꼬마 아이들이 팽이도 치고 제기도 치는 표지가 있는 설날 분위기가 나는 예쁘고 큰 편지지에 가운데 한 명 한 명 모든 아이들 이름을 붓 펜으로 예쁘게 써주셨다. 정성스럽고 정갈한 글씨.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각자 그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씩 쓰게 했다. 그리고선 그걸 한 명 한 명 깔끔하게 코팅해서 선물로 나눠주셨다. 우리 반, 5학년 3반 아이들이 써준 한 마디가 전부 들어있는 롤링 페이퍼가 내겐 정말 의미 있고 따뜻한 선물이 됐다. 그 안엔 선생님의 긴 편지도 들어있었으니까.


 그래, 언젠가는 이걸 소설로 쓰리라, 이것이야말로 나만의 경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집념하고는 달랐다. 꿈 하고도 달랐다

박완서 작가의 이런 고백처럼 나도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이건 꼭 편지로 쓰리라, 편지에 써서 내 경험을, 그 감정을 기록해서 나만 보는 게 아니라 나누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아이를 키우며 육아만으로도 발목이 잡힐 때 라디오를 자주 들었는데 ‘신지혜의 영화 음악’,‘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들으며 라디오에 편지를 썼다. 육아를 하며 느끼는 감정, 출산하며 느끼는 외로움과 웃음, 누군가 내 경험이 궁금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냥 짧은 편지 사연을 읽고 읽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이 됐다. 신기하게도 방송에 소개가 자주 되기도 했고 신청곡도 자주 나왔다. 또 내 사연이 나오지 않아도 나를 위로해주는 다른 답장이 왔을 땐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집념도 꿈도 아닌 ‘경험’ 자체의 글, 나는 박완서 작가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감히 조금은 알 것 같다. 


P.S 구자옥 선생님, 저 나경이에요. 제가 그때 부반장 윤향이만 예뻐한다고 상소문같이 길고 긴 구질구질한 편지를 두껍게 써서 교무실 책상 위에 올려뒀었죠. 선생님께선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수줍은 여학생의 편지로 오해하실 법도 한 예쁜 편지지에 ㅜㅜ흐엉 죄송해요,    선생님. 사실 지금에 와서 고백하건대 제가 윤향이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서 반발심에 더 그런 상소문을 쓴 것 같아요. 부반장 편애에 분개하는 그 내용에 진노하시고 화내실 법도 한데 그 편지 읽고, “야?!! 너는!!” 하시면서, 기가 막혀하셨지만, (네, 말문이 막히셨을 거예요.) 혀는 차셨지만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거 알아요. 앞으로 더 주의 깊게 예쁘게 바라보겠다고 해주신 선생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제 성격에 화를 내고 혼내면 상소문 10장을 쓰고 두고두고 선생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르지만 전 선생님께서 그때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고 챙겨주셨던 걸 알아요. 제가 우리 언니랑 많이 다르다고 하셨죠? 선생님, 늘 왕새우처럼 살아라, 겸손하게!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김건모 역지사지! 마르고 닳도록 가르쳐주셨는데 그땐 철이 없어서 역지사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어요. 세월이 흐르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가끔도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요. 왕새우처럼 구부리고 겸손하게 살아야 더 행복하고, -이제 김건모는 이름도 언급하기 싫은 가수가 됐지만- 선생님의 역지사지는 하루하루 체험하며 살고 있어요. 아이들을 기르는 하루하루야말로 가장 큰 수양이 필요하다는 걸, 역지사지가 돼야 아이하고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대학생이 돼서 다시 우리 왕새우반 아이들과(3학년 때 동기) 선생님을 만난다고 했을 때 열 일 제쳐놓고 꼭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경양식 돈가스 집 로즈가든에서 다 함께 만났던 거 기억하시죠?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이기도 한 로즈가든 돈가스는 비록 사라졌지만 아이들과 선생님과 함께 했던 그날이 기억나요. 늘 울상에 세상에 대한 불만만 가득했던 제 모습이 조금은 달라지고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만나자마자 “너는 왜 이렇게 밝아지고 더 철이 없어졌냐?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구만”해 주셨는데. 사춘기 시절 인상 팍팍 늘 울상과 불만에 입이 댓 발 튀어나온 모습만 보여드렸던 것 같아요. 그래도 다시 만나서 웃고 계신 선생님을 뵐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머리는 하얘지셨지만 얼굴과 마음은 그대로이신 선생님께 감사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최고의 윤리 선생님, 도덕 선생님, 구자옥 선생님, 이제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편지를 써드리고 싶어요. 

작가의 이전글 막스 데미안, 헤르만 헤세로부터 온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