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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야

사랑하는 우리 예나

by 앤나우


안녕하세요, 샬롬!! 영국에서 살고 있는 박나영입니다.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는 이렇게 영국에 오래 살게 될지는 몰랐는데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게 된 인연을 시작으로 예찬, 예나, 예아, 예니 아들 딸딸딸 4명을 키우고 있는 네 아이의 엄마이기도 합니다.

늘 살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정신없고 분주한, 평범한 주부입니다.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는 제가 이런 자리에 서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먼저 목사님께서 이번 한 주간 큐티 말씀을 제게도 보내주셔서 저도 성도님들과 함께 큐티를 하였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주인공이신 요한복음 말씀이라 저도 반갑고 좋았습니다.


저는 딸아이 중에 큰딸이 자폐라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롱초롱 , 빛나는 눈망울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에는 똑똑하고 예쁜 천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점차 자라면서 18개월 즈음부터도 불러도 아무 반응이 없고 혼자만 있고, 표정도 무뚝뚝 해져서 저는 듣는 것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후 다양한 모든 검사를 다 했고,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결과를 듣고 마지막으로 소아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시간을 들여 검사를 하고 결과를 들었지만 특별한 소견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소통하지 않는 부분에 같은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영국은 3명의 의사가 한 아이를 두고 같은 견해가 있어야 자폐 진단을 받을 수 있습니다. 3명의 의사가 모두 자폐가 의심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정말 당황하고 놀랐습니다.

어떤 곳이 아프면 수술을 하거나 고칠 수 있는 그런 기대가 생기는데 제가 영화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자폐라는 병은 저에게는 너무도 생소했고, 주위에 사람들은 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냐고 했고, 임신했을 때 무얼 잘못 먹었나, 하나님께 지은 죄가 있냐, 스트레스받은 일이 있었냐 등등 이유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나에게로 향하는 화살이 커질수록 더 힘들고 아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이유를 찾고 싶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9장 2절 말씀처럼 사람들은 원인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물어봅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기의 죄로 인함인지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리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저는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부터 이어진 모태 신앙 가정에서 성장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 부인하지 않고 나름대로 잘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위로부터 물려받은 든든한 신앙도 있었고, 믿음과 말씀 훈련으로 영적으로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나는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큰 아이는 이제 네 살이었고, 동생은 막 태어난 갓난아이어서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시간이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2층에서 1층으로 떨어지고 피아노 위에 올라가서 몸을 던지고, 심지어는 창문 콘크리트 바깥으로 몸을 던져서 앰뷸런스에 실려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조마조마하는 마음을 부여잡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일들이 매일 같이 반복되던 어느 날 셋째를 챙겨주고 2층 방으로 올라갔는데 아이가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눈썹 정리하는 작은 칼을 어딘가에서 꺼내서 그것으로 손을 계속 그었습니다. 그리고 피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제 안에 있는 정말 숨기고 싶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안에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화가 주체가 되지 않아 아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제 손에는 이미 저의 나쁜 감정과 원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야단을 쳐서 바로 잡고 싶었고, 무섭게 하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 해서든 통제하고 고치고 싶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나는 파란색만 보면 집착이 생겨서 그것을 따라가고 파란색만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제가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파란색 소독약을 변기 안에 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나가 변기 안에 들어가서 그것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걸 본 저는 예나를 내동댕이 쳤습니다. 그때 예나가 넘어지면서 부딪쳐서 멍이 들었습니다. 그 어떤 말도 제가 참을 수 있었고, 남들한테 착하다고 소리 들으면서 자랐던 제가 정말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포악한 저의 모습을 마주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다 잘 기다려 주고 인내해 주는 저의 모습이었는데 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주님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 때문에 주님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다는 처절한 고백을 드리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태어나서 세상 무엇이든 자기 마음과 뜻대로 할 수 있는데, 단 한 가지, 자기 마음대로도 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식’이라고 했는데 나를 통해 세상에 나왔지만 온전히 내 것이 아니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유일한 것,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주저앉았습니다. 말 안 듣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고 죄의 수렁에 빠져있는 영혼을 볼 때 이런 심경이었을까요. 내 모습 이대로 사랑받길 원하면서 왜 이토록 아이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든 건지, 아이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눈물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예나의 모습은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죄인지 뭔지 구분도 못하고 내 눈에 좋은 것을 따라가고 나에게 해를 입히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였습니다.


그때 로마서 5장 8절 말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했습니다. “하실 수 있다면 예나를 고쳐 주세요.” 그런데 제 마음에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장 23절 이 두 말씀이 지금까지 제가 예나를 키울 수 있는 힘이 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제 마음의 밭에 떨어졌습니다. 옥토 밭은 잘 경작된 밭입니다. 영국에는 가든이 있어서 종종 밭에 텃밭을 가꾸고는 합니다. 새로운 씨앗이 심기우려면 먼저 밭을 갈아서 엎어야 합니다. 제 마음이 다 갈아 엎어질 때에 새로운 말씀이 심기어졌습니다. 제 마음이 뒤집어지고 어렵고 답답하고 앞으로 가자니 너무도 막막하고 뒤돌아보니 너무 멀리 와서 돌아갈 수 없는 그 길에 섰을 때 주님은 제 밭을 경작해 주셨고 말씀의 씨앗을 뿌려 주셨습니다.

하나하나 수 없는 수많은 사건들을 저에게 주시고 주님과 저만이 아는 비밀의 말씀들이 제 안에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가 사랑스럽게 보였고 앞으로의 시간이 걱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원했던 기적과 하나님의 기적과는 좀 갭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당장의 기적을 바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하루하루가 기적이었고 주님이 돌보심이었습니다.


수많은 사고와 부상의 순간에도 예나가 다시 숨 쉬고 살아났고 저를 웃게 했습니다. 아직 저를 엄마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제가 엄마인 것은 아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예나가 14살이 되었고(한국 나이로는 15살), 영국은 16살이면 의무 교육을 마치는 때라 아직 큰 관문들이 예나의 앞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새벽에 일어나 온 집안의 불을 다 켜고 다니며 음악 소리를 시끄럽게 틀고 있습니다. 잠을 통 자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과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가련하고 귀한 아이를 통해 배운 것이 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기다려 줄 수 있고 아무것도 이해가 안 돼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한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닐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저에게는 예나 말고도 귀한 다른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픈 아이를 두고 셋째 넷째를 낳고 키우면서 참 힘들었는데 이 아이들 모두가 저와 예나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픈데 더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런 순간도 있었지만 저는 다른 아이들을 통해서 행복을 쌓아가고 함께 성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는 우연과 사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올여름, 언니와 네 명의 조카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 함께 한국으로 왔다. 예나는 내 결혼식에 온 게 마지막 한국 나들이였으니까, 십 년, 십일 년 만에 한국에 온 셈이다. 코로나와 둘째 출산으로 나도 예나를 본 지가 오래돼서 더 보고 싶었는데 긴 긴 시간을 날아서 한국까지 와주니 반갑고 감격스러웠다. 러시아가 전쟁 중이라 좀 더 멀리 돌아서 온 하늘에서 예나야, 넌 내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낯선 곳이 불안하고 불편한지 이 말을 반복했다.


비행기! 비행기! : 또박또박 분명한 발음으로.

-특수학교에선 영어로 소통하기 때문에 거의 필요한 의사소통을 할 땐 영어를 사용하는데 (먼저 말을 걸거나 대화를 시도하진 않는다. 앵무새처럼 따라 하거나 간단한 의사소통에는 반응한다) 특이하게도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어 패치를 장착한 것처럼 유튜브도 한국말로, 타자도 한국어로 치기 시작한 예나. ㅎㅎㅎ

아마도 비행기를 타고 다시 영국 집으로 가고 싶은 모양이다. 불안하고 낯설고 불편할 때마다 주저 없이 이 말을 반복했다.


비행기, 비행기!


공항에 내리자마자 본 앰뷸런스에도 다들 한국 앰뷸런스가 이렇구나 하는데 예나 혼자 또박또박하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구급차!


어휘로는 꽤 고급지고 어려운 말이기에 언니네 다른 아이들 세 명 어느 누구도 몰랐던 '구급차'라는 말을 우리 예나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 (아마 꼬마버스 타요를 열심히 본 탓이리라, 언니와 나는 그렇게 추측했다)



언니가 한국에 와서 두 번 정도 교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그때 정리한 간증문을 그대로 옮겼다. 나는 몰랐던,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삶의 간극과 고난, 혼자 울고 눈물을 삼켜야 했던 시간들, 하지만 언니 마음이 담겨서 더 좋은 글이란 생각이 든다. 늘 어디서나 칭찬만 받고 바른생활로만 걸었던 언니 삶에 예나는 어떤 존재가 됐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언니 부부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한다.


나영, 너희 부부가 좋은 사람들이라 너네 가정에 예나를 보내주셔서 잘 돌보게 했나 보다. 예나가 축복을 받았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언니의 삶에 예나가 꼭 필요하고 소중한 아이구나. 예나로 인해 언니와 언니의 가정이 그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경아, 내 삶은 평범한데 사람들이 왜 또 나에게 간증을 부탁하는지 모르겠어.

(각기 다른 교회 세 군데에서 간증 요청을 받은 언니 ㅎㅎㅎ)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이미 '평범'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된 걸까. 아이를 키우는 삶도 한 명 한 명 모두 특별한데 언니는 예나를 키우면서도 예찬이, 예아, 예니 다른 세 명의 아이들도 돌보고 살림을 하고, 봉사를 하고 앉아있을 오분의 시간도 없을 때마다 성경을 보고 기도를 했다. 영국에서 머무는 시간마다 나는 언니와 삶을 같이 했는데 돌아보니 그 시간이 늘 너무 평범한 일상이어서 짜증 나고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아침부터 이어진 픽업 전쟁과 하루에 세탁기 3번, 청소기를 두 번 돌리고 ㅋㅋㅋ 리딩모닝엔 가서 책도 읽어줘야 하는;;; 배달 문화가 전혀 없는 영국에선 하루 3끼 +간식까지 전부 엄마의 몫이었다. 결혼 안 한 아가씨 시절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힘든 스케줄 그 자체였다.) 덕분에 언니의 삶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감사한(진짜?) 마음도 든다. 우리 언니는 짬이 날 때마다 피아노를 치고 찬양을 부르고 봉사를 나갔다. 예나가 평범한 아이 었어도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 눈엔 대단한 것 투성인걸. 막상 엄마가 돼 보니 또 알겠다. 평범한 엄마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자폐아를 가진 엄마들을 보면 자녀와 소통하지 못한 답답함, 통제되지 않는 불안이나 두려움에 지쳐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또 막상 함께 있다 보면 지치고 아픈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안에 아이처럼 순진하고 맑은 기운에 웃기도 하고 (내 조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 귀엽다.)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한다.


예나는 나를 어떤 이모로 기억할까? 뜨거웠던 올여름, 예나와 함께 했던 시간을 통해 몇 가지 배우고 느낀 점이 있다. 누군가는 예나를 통해 또 위로받고 행복하고 변화된 삶을 살지 않을까. 고비고비를 넘기면서도 건강하게 살아있고 함께 있어줘서 뭉클한 마음이 든다.

우선 나부터가 그런데. 자폐가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는 건 줄 알았는데 예나를 보면서 그 반대의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세상을 가두고 자기 안에서도 충분히 행복을 누리는 존재, 다른 조카들보다 예나의 성장이 더디고 누릴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는데 어쩌면 세상의 시시비비 속에서 작은 거 하나에도 가장 행복하게 반응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예나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누릴 수 있는 게 많고 소통이 잘 된다고 무조건 행복한 삶도 아닌 것 같다.


자폐의 스펙트럼도 워낙 넓고 다양해서 내가 본 한 아이로 어떤 전체를 판단하거나 규정하는 글이 아니다. 사랑하는 조카를 통해서 나도 몰랐던 또 다른 세계를 좀 더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갈 용기를 갖고 싶을 뿐.










*우리 예나가 제일 좋아하는 바다탐험대 옥토넛의 버나클 대장님과

예나를 닮은 잔망 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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