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글쓰기는 나의 표정이다

뒷모습에 달린 나의 표정

by 앤나우

지난주 목요일, 장강명 작가님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영등포 아트홀에서 열린 "인생질문, 문학독서로"


문학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와 문학독서를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꽤 거창할 것 같지만 작가님 말처럼 단순했다. 그 단순함이 명료하기까지 했다.




인생질문은 별 거 없어요. 난 누구지? 난 뭐지? 난 이제 뭐를 해야 하지?
*정체성 -서사 -과업으로 이어져요.




본질적으로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우리가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 하지만 즉문즉답, 명쾌하게 이어지는 스님이나 어떤 선생님의 답에 '오오'할 수는 있지만 그건 나에게 맞춘 답이 아니다.

나만을 위한 답도 될 수 없고.

저마다 가진 인생이 각자 다르고 처음부터 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그렇게 살고 견뎌낸 나 자신 뿐인지도 모르겠다. 질문을 방향을 스스로에게 돌리기 가장 안성맞춤, 그게 바로 '문학독서'구나!


길고 조금은 지루한 듯한 시간도 견뎌야 하고 즉시 멋들어진 답을 주진 않지만(멋진 구절에 밑줄은 바로 칠 수 있겠지만ㅎㅎ 내 책엔 밑줄과 메모의 흔적이 가득하다) 노력이 뒤따르면 감동의 형태로 확실한 신호를 받고 진짜 나만을 위한 답을 받는 거, 그게 바로 문학이라는 거.


문학독서를 이렇게 연결하는 과정이 즐겁고 좋았다. 나는 수많은 것들 중에서 왜 하필 책을 좋아하고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 떠올려 봤다. 시장에서 채소가 아닌 아이들과 구워 먹을 고기를 잔뜩 사면서도 옆구리엔 한강의《채식주의자 》를 끼고 다녔다. 여행의 짐이 완성되기도 전에 여행지에서 읽을 책을 떠올렸고 수영복을 쌀 땐 설레지 않았지만 휴가지에서 읽을 책을 넣을 땐 언제나 설렜다. 나는 뭐를 그토록 찾고 싶었던 걸까. 또 나는 왜 읽기에만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인지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좋은 영화를 보면 자꾸만 수다를 떨고 싶어 진다. 나에게 좋은 영화란 영화를 본 이후에도 떠오르는 다양한 이야기보따리들을 계속계속 풀어도 저마다 다양한 의견이 나올 때, 그런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유쾌할 때 '굿 무비'가 된다. 좋은 강연 역시, (강연이나 북토크에 많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강연 자체의 본질도 훌륭하겠지만 자꾸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인생질문의 답을 찾으려고 할 때 그거야 말로 좋은 강연이지 않을까. 그날 작가님 강연이 그랬다.


나는 강연 시작부터 우리가 가장 많은 얼굴 근육과 표정을 가진 영장류임에도 '문명인의 교양'을 배웠기에 표정을 지워버리고 감정을 감춰야 하는 인간이 됐다는 부분부터 어딘가 한쪽이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맞아, 싫어도 좋아도 감정을 절제하라 배우고 울지 않는 게, 뭔가 눈물을 감추는 게 대단한 어른인양 배운 게 바로 우리였지. 쌍둥이조차 똑같은 눈코입은 한 명도 없는데 우리가 표정 없는 거북이처럼 느껴진 이유를 찾아보니 서글퍼졌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사실 우린 그 사람의 이목구비, 얼굴형의 생김이 아니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표정'이구나. 그래서 쌍꺼풀 수술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도 특유의 미소와 표정이 나오면 그렇게 편하게 좋을 수밖에 없는, 나는 표정이란 말에 여러 번 밑줄을 그었다. 주변에 스치는 전철 속, 버스 속 사람들 무표정이 아니라 정작 나와 가까운 내 남편과 우리 아이들, 웃는 모습이 어색했던 사람들의 얼굴도 스치듯 지나갔다.


이토록 단어의 연결만으로도 마음을 찌르르하게 만드는 '소설가의 언어'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인간은 연결되어 있어요.
근데 제 생각엔 고통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슬픔으로 연결되어 있고요.
기쁨은 아닌 거 같아요.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이야기, 슬픈 이야기임에도 작가님은 웃는 듯 우는 듯(원래 좀 웃는 상이긴 하다.ㅎㅎ)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애초에 우린 정말이지 남의 행복엔 별로 끈끈하게 엮여 있지 않다. 눈물과 고통이 늘 먼저 반응하게 설계된 걸까. 나는 단테의 '신곡'을 함께 읽는 중인데도 지옥은 그렇게나 흥미진진하고 재밌더니 연옥은 초반부터가 몰입이 어쩐 일인지 잘 되지 않는다. 마라맛, 이미 엄청난 지옥을 본 이후여서 일까. 부정적이고 캄캄한 숲 속 한가운데 길 잃은 단테가 지옥의 구덩이로 점점 깊숙이 가는 음산하고 어두운 이야기에 대부분 사람들도 먼저 반응했다.





글쓰기는 나의 "표정"이에요.





얼굴을, 감정을 점점 감추는 현대인들에게도 표정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구멍이 있다면 그게 바로 '책'을 통해서 '글'을 통해서구나!


그렇다면 왜 우리가 더 문학을 읽어가야 하는지 점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섬세하고 미세한 표정을 진짜 사람을 대놓고 하기엔 너무도 낯간지러우니, 아무리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도 내내 얼굴만 뚫어질 때까지 볼 수가 없으니. 그래, 얼굴은 답할 수가 없다. 얼굴 보단 '말'이구나. 그 말을 가장 와닿게 쓴 재밌는 이야기가 바로 또 소설이 되시겠고.










신비로운 인물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다섯수레 출판사)



그림도 인상적이지만 여기에 쓰인 말이 더 좋았던 책.

*출처 : 어린이를 위한 이주헌의 주제별 그림일기 | 인물화



누군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어쩌면 이렇게 큰 울림을 줄까 싶은 그림입니다.



사실 요즘 나는

나의 글이 나의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지만 내 얼굴만큼 표정만큼 유심히 바라보지 않는다. 내 뒷모습 속엔 나만이 아는 흔적, 느끼는 감정이 숨어있다. 앞에서는 늘 밝게 좀 더 친절하게 웃고 있어야 하지만, 뒷모습 자체로는 꾸며낼 수 없으니 나의 표정은 바로 뒷모습이 아닐까 했다. 꾸밀 필요도,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걷기만 해도 자연스러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씩 내디뎠던 삶이 있는 곳. 거기에 당도할 수 있는 무언가. 나는 사실, 너무너무 글을 쓰고 싶었다.


바람에 따라 날아가는 연을 바라보며 얼레를 잡고만 있어도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에도 이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고, 아이의 말 한마디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마음이 찌르르할 때도 글을 쓰고 싶었다. 작가님 말씀처럼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일에는 그 표정에서 조차 별로 큰 공감을 하지 않는다. 장황하게 뭔가를 늘어놓고 자랑해도 그게 글로 나타나도 오히려 기분만 상할 뿐이다. 속으로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뭘 하는지도 모르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거기에 담긴 저마다의 삶의 무게와 내딛는 발걸음의 불안함이 보인다. 어쩌면 진짜 내가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대부분 좋은 작품들은 고전 작품들은 '고통의 감정', 흉터에 대해 흉터를 가진 아픔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하지만 고통과 슬픔에는 자식을 잃고 우는 아버지의 표정 하나만 스쳐도 이미 어떤 감정이 올라오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진다. 나는 잘 몰랐는데 "표정"이란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평소에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싫은 감정은 바로 미간에서 주름이, 기쁘면 바로 웃음이, 슬프면 공공장소에서도 눈물이 터진다. 둘째를 쫓아다니며 나도 모르게 터지는 울음에 길거리에서도 엉엉 울음이 터진 어른이 바로 나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울거나 웃었던 내 표정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 표정에서 드러난 내 모습을 그래도 좋아했기에. 그 뒤로도 자주 표정을 떠올리고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발견한 신기한 사실, 영상으로 음악을 들어도 나는 꼭 심사위원의 표정이나 관객의 표정이 함께 나온 영상을 찾아본 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냥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걸 들을 때도 있지만 이왕이면 다른 사람들의 공감하는 표정, 시시각각 바뀌는 미묘한 변화를 관찰하고 그걸 발견하는 걸 더 좋아하고 있었다. 첫 소절이 나오고 뒤바뀐 분위기, 감탄하는 표정, 그건 노래 부르는 가수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나온다. 단단히 몰입된 타인, 나는 그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게 즐겁고 재밌다.










표정



리하르트 게르스틀 | 웃는 자화상



웃고 있는 이 남자의 표정, 자화상인걸 보면 화가 본인의 얼굴인데 넋을 잃은 듯한 웃는 표정에서, 왼쪽 눈에 고인 눈물과 바보같이 벌린 입에서 자꾸 마음이 불편해지고 신경 쓰인다. 웃고 있어도 울고 있는 듯한 이 그림을 보면 자꾸만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표정을 떠올리다 보니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사진에서 언제나 제일 환하고 예쁜 미소를 짓는 엄마. 눈치가 별로 없던 나도 부모님 눈치를 보며 지냈던 어느 시기가 생각났다. 그날도 엄마가 힘들었는지 도시락 대신 나에게 지갑에서 천 원짜리 몇 장을 꺼내주었고 어딘가 초점 없이 멍한 눈은 울어서 빨개진 건지 부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너무 슬퍼 보였다. 엄마는 힘들면 힘들다, 슬프면 슬프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에 '엄마, 괜찮아?' 물을 용기도 없을 만큼 불안했던 아침이었다.

나는 리하르트 게르스틀의 그림 속 눈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학교에서 울고 싶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엄마가 혹시 나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거나 언니랑 나를 버리면 어쩔까, 엄청 요란한 체육대회날이었는데 격렬한 응원과 시합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엄마의 표정 하나가 그날 아침부터 오후까지 마음에 꽉 박혀있었던 기억이 난다. 열띤 응원가를 부르다가, 우리 반이 경기에서 이겼을 땐 이렇게 사회적으로 웃는 표정을 짓다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표정으로 변했을 거다. 누구 한 명이라도 나에게 "괜찮아?"라고 물으면 그 감정을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최대한 표정을 감추었던 그 체육대회 날이 떠오른다. 다시 그 표정과 마주하기 싫지만 그런 순간이 내게 있었기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뭐가 그렇게 슬프고 두렵지?

그동안 왜 글을 쓰지 않았지? 쓰지도 않으면서 왜 그토록 글을 쓰고 싶었던 거지?


브런치의 알람이 울림 때 마다도, 꾸준히 하루도 안 빼먹고 글을 올리는 페르세우스님의 알람이 뜰 때 마다도 속으론 부러워하면서도 게으른 나를 한탄했다. 그냥 쓰면 되지 왜 망설이고 무엇으로부터 도망친 걸까.


오늘 나의 인생 질문도 이어진다.

자, 그렇다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할까.




1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브런치가 나의 충분한 표정이 되지는 못해도 든든한 러닝메이트들이 생겼으니 달리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해 봐야지.


행복, 즐거움은 조금 미숙하게 표현해도 그 자체가 빛나는 기쁨, 자체이기에 괜찮다.

하지만 문득문득 내 안에 채워지지 않았던 슬픔 감정과 아픔, 눈물이 있다면 주저 없이 글을 쓰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