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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Sep 23. 2024

진짜 못하겠어요

1박 2일 이준의 용기


평소에 텔레비전을 볼 일이 거의 없다. 예전에 무한도전이나 슈퍼스타K,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 같은 프로그램을 재밌게 보고 챙겨보기도 했는데 (이웃에 사는 소팔이랑 같이 생방송하는 날이면 치킨과 같이 마실 음료수까지 대령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두근두근 생방송을 기다리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재밌는 드라마도 넷플릭스로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된 이후부터는 그렇게 좋아하던 쇼˙오락 프로그램을 안 보게 됐다. 


금요일부터 몸살감기로 회사를 조퇴한 신랑 덕분에 토요일은 아이들과 잭슨 9에서 9시까지 보내고 일요일에도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토요일 새벽부터 늘 어딘가 나가곤 했던 우리 집이었는데 신랑이 많이 아프긴 했지만 덕분에 또 아이들과 뒹굴뒹굴 모처럼 여유가 생기기도 했다. 밀린 숙제도 해놓고 밑반찬도 만들어보고, 그러다가 저녁쯤엔 안 틀던 TV도 틀었다. 



때마침 나오는 1박 2일



아직도 이 프로그램을 한다는 게 놀라웠고 새롭게 바뀐 멤버들은 또 다른 사람들로 교체 됐다.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가수(이젠 배우인가)와 개그맨으로. 조세호와 이준이 새롭게 합류해서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뭐든 운빨을 믿는 복불복이란 게임 규칙이 별로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또 오랜만에 보다 보니 재밌었다. 같은 상황이더라도 저마다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방식이 달랐고 이 어떠한 선택으로 결정되기도 하지만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때론 최악의 선택처럼 보이는 일이 최고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니까. 


무서운 폐가 공포체험을 통해서 비밀 열쇠를 얻어내면 실내취침을 할 수 있는데 

겁은 없지만 머리가 달려(이해력이 부족하면) 힌트가 주어져도 문제를 풀 수가 없는 부류와

머리는 잘 돌아가지만 겁이 많아서 무서움 때문에 공포를 싫어하는 부류가 있다는 말에 웃음이 터졌다. 복불복 인생이라지만 모든 힌트가 주어져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서 밖에 나와서까지 문제를 이해 못 했다는 이준 말에 ㅋㅋㅋㅋ 또 한참을 웃었다.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반전은 겁이 많아서 절대 열쇠를 못 찾을 것 같다는 개그맨 문세윤이  당당하게 힌트를 찾고 혼자 열쇠를 획득한 부분이었다. 


머리가 좋아서 퍼즐처럼 주어진 힌트를 잘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순간에 용기가 필요하구나. 스스로 겁먹고 긴장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목표를 향해갈 때, 우리는 그 행동을 용기라고 부른다.




용기
용기 있다




명사 씩씩하게 굳센 기운.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험 삼아하는) 모험[도전]

동사 (겁이 없음을 보여줄 수 있도록 위험하거나 힘들거나 곤란한 일을) 한다.




사전에서 찾아본 뜻도 내가 생각한 뜻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생 자체가 이런 용기를 시험하기 위한 과정이고 도전이고 우리는 주저주저 쭈뼛쭈뼛 망설이는 사람보다 한 방 크게, 시원시원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와~ 용감하다, 좀 멋있는데! 감탄하고 박수를 쳐준다. 








다음 날 기상 미션이 이어지고 번지점프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복불복이 갈리고 차 안에서 멤버들은 고소공포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고소공포증, 높은 곳에 가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리고 속이 울렁거리고 도저히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마음. 누구나 높이에 대한 공포가 저마다 있지만 꼭 추락할 것만 같은 두려움의 차이는 '공포증'이라는 병명이 붙기도 한다. 


대만 여행 중 신랑이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았다. 대만 미라마 엔터테인먼트 파크에서 미라마 관람차를 탔을 때(세계에서 세 번째 큰 관람차라고 한다) 일반 바닥이 아닌 유리로 된 크리스털 카빈을 선택했는데 신랑이 그걸 타고 움직이자마자 식은땀이 마구 폭발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야경을 조망하고 즐기려고 했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결국은 거의 주저앉다시피 한 신랑을 보고 처음엔 깔깔깔 웃었다. (신랑을 놀리는 걸 은근히 좋아함) 그러다 곧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의 얼굴을 보고 뭔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나름의 방법으로 멀리 보고 심호흡을 하라고 달래고 살펴준 기억이 난다. 특별한 고소 공포증이 없는 사람에겐 그냥 즐기는 평범한 경치도 공포가 있는 사람에겐 심각하게 두렵고 무서운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내가 고소 공포증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관람차에서 쓰러지다시피 기어 나온 신랑의 첫마디는 '고소 공포증'에 대한 인정이었다. 덩치 큰 남자라고 해서 고소 공포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아직도 불을 전부 끄고 잠들지 못하기에 끄덕끄덕, 그 말이 이해가 갔다. 그 이후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거나 어지러운 놀이기구를 타거나 마장호수, 감악산 출렁다리를 건널 때에도, 아이들을 챙겨서 왔다 갔다 이동하는 건 내 몫이 됐다. 큰 아이 역시 출렁다리를 건널 때 겁이 많았다. 바람을 타고 다리가 흔들리는 입구 초입부터 손을 꼭 잡아줘야 했는데 둘째는 아무도 신경 안 쓰고 냅다 달리기부터 시작해서 남편과 큰 아이가 양손을 꼭 잡고 후들후들 거리며 다리를 왕복하는 동안 나는 둘째랑 다섯 번 넘게 열 번 가까이 (-_-) 다리 위를 뛰어다니고 이동해야 했다. 마주 오는 사람들 표정도 모습도 각양각색, 뛰어다니는 우리 모습에 즐거워하며 감탄하는 어른들도 있는 반면, 뛸 때마다 양 쪽 손잡이를 잡고 한참 멈춰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소 공포증보다 자식 사랑이 앞섰기에 그래도 신랑은 아들을 위해 용기를 내기로 했고 놀이기구는 같이 타주지 못할지언정 출렁다리는 꼭 한 번씩 건너줬다. 






다시 1박 2일로 돌아가서,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아까 시작부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고층 건물에도 못 산다는 이준이 바로 번지점프에 당첨됐다. 그가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앞서 다른 배우가 한 번에 멋있게 뛰어내린 이후에 자기 차례(이 부분은 못 봐서 선재가 말해줘서 알았다)라서 더 긴장 됐을 것 같다. 눈 딱 한 번 꾹 감고 뛰고 싶었을 텐데 역시나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주춤 멈칫.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포기 선언.





저 도저히 못하겠어요.
저는 겁쟁이가 맞고요.
카메라가 있으면 할 줄 알았거든요, 저도.
근데 못하겠어요.
대신 제가 스카이 다이빙, 상어 잡기, 뭐
(어쩌고 저쩌고 길게 다른 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함)
뭐 다른 건 다 할게요.
제발 이건 못하겠어요.




세상에, 무릎까지 꿇으며 구구절절 주저리주저리 하는 모습이 


나는 참 용감해 보였다. 별로 흥미 있게 방송을 보지도 않는 선재에게 내가 말했다.



와! 선재야! 엄마는 오늘부터 이준 팬 할래. 저 사람 진짜 용기 있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네. 자기가 도저히 안 되겠고 진짜 못하겠는 건 저렇게 말하는 거야. 
-?_? 




솔직히 무릎 꿇고 혼자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다 말하는 그 모습이, 자길 겁쟁이라고 말하고 욕해도 된다는 그 모습이 나는 용감해 보였다. 

상황을 이기고 지나간다고 용기 있는 게 아니라 도전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더군다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공포와 맞서서 그 모든 걸 뛰어넘는 데는 아무리 카메라가 돌고 자기 이미지와 다른 것들이 달려 있다고 해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번지점프를 한 적은 없지만 나는 늘 기회가 되면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떨어지는 게 끝이 아니고 다시 반동해서 튀어 오를 때 물속에 첨벙 하고 들어갈 때 그런 긴장과 고통이 수반된다고 할 때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건 나 자신 뿐이라는 게 무서운 일 같다. 온몸으로 견디고 느껴야 하니까.  아직 싸우고 이기고 도전할 준비가 안 됐다면 못하겠다고 말하는 게 낫다. 


괜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모한 도전을 했다가 더 큰 트라우마가 생기거나 위급한 상황들이 생기면 그땐 누가 책임질 수 있을까? 

그 뒤에 이어지는 PD의 담담한 반응도 참 좋았다.


예,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 다른 걸로 도전해서 갚으세요. 


무조건 어떻게 해서든 다 하게 만드는 복불복 프로그램이 아니구나,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이 예능 프로그램이 유익하다고 느껴졌다. 




아주 어렸을 때 수련회에서 하기 싫은 걸 '무조건' 해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밧줄 잡고 높은 데 오르고 철봉을 막 뛰어넘고 우리 땐 하기 싫어도 그냥 무조건 해야 하는 현실이어서 내 차례는 다가오고 앞에선 기계적으로 튀어 나가고 나는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다. 무섭고 넘어질 것 같은데 줄을 놓치면 쓰러질 것 같은데 그래도 열외란 없이, 예외란 없이 못하면 또 이상하게 다 같이 단체기합을 받아야 했다. 나 하나 쪽팔리는데서 끝이 아니라 단체 기합! 전체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었고 나 때문에 단체 기합을 받아서 밥도 제일 늦게 먹을 순 없었다. 아니, 기억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체육 시간 철봉 한 바퀴 도는 도전 자체도 너무 무서웠던 때가 있었다. 팔이 꺾일까 봐 겁이 많아서 하기 싫다고 해도 결국 억지로 하다가 철봉에서 쿵 떨어진 기억도 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기억이다. 나는 철봉 바도 체육 선생님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하란대로 하면 됐지만 늘 체육시간 활동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고 의심과 상상부터 시작하는 버릇이 있어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기도 했다. 기구를 가지고 운동을 할 땐 유독 겁이 많은 아이었다. 어릴 적마다 체육 시간에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얼마나 빌었는지, 떨어진 이후에 아이들 웃음소리 듣는 게 싫어서 또 벌떡 일어나기까진 얼마나 쪽팔리고 싫었던지, 그래도 나는 하기 싫다고 못하겠다고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양쪽에서 내 팔과 다리를 잡고 돌릴 기세, 할 수 있다 말하는 기세에 주눅이 들고 등이 떠밀렸기에.


뭐 그나마다 철봉과 극기 훈련 같은 거야 다행이지.


하기 싫은 술자리 거절, 가담하고 싶지 않은 자리, 내가 도저히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땐 그땐 과감하게 NO!!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한다. 

그래서 좀 창피하고 쪽 팔리고 싫더라도 

카메라에 찍히는 걸 업으로 삼은 이준이 한 말이 인상적인 이유가 이거다.


나는 내가 카메라가 돌아가면 좀 달라질 줄 알았어.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날 기다리는 스텝들, 수 천수백만의 시청자의 눈이 있어도 내 마음의 결단도 선택도 결국 자신이 몫 아닐까.

그래도 도저히 못하겠다면 안 한다고 안된다고 말할 줄 아는 솔직함, 그게 바로 용기 아닐까.


씩씩하게 굳센 기운. 사물을 겁내지 아니하는 기개. (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험 삼아하는) 모험, 도전 자체가 좀 더 용기로 인정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용기의 단어 뜻 어디에도 성공이나 실패란 말은 없다. 








사진 = KBS2 예능 '1박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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