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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Sep 20. 2024

진아의 답장

그게 바로 넌가봐


내 삶에 잊을 수 없는 친구 진아

내가 편지에 푹 빠지게 된 건 팔 할이 진아 때문이라고, 아니, 진아 덕분이라고 하고 싶다. 중학교 때 그때만 해도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반 배치고사를 봤는데 담임선생님께서(물리를 가르쳐 주신 윤춘호 선생님 : 남자 선생님은 담임으로 처음이었기에 기대가 무척 컸다. 그것도 여중에서 만난 처음 남자 담임선생님이라니!) 반 배치고사 성적표가 든 종이를 흔들면서


-나는 너희들을 절대 이런 종이쪼가리, 성적으로 평가하지 않겠다. 이거보다 더 중요한 건 너희들 자신이다.

북북 찢으셨다. 


오, 성적보다는 아이들을 편견 없이 대하시는 분이구나 했는데 


마치 그때 한참 빠져 본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도 생각나고. 사각형 얼굴에 사각형 안경을 낀 모습은 부드러운 로빈윌리암스 같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다음 이어지는 말씀은


-장진아, 오늘부터 네가 우리 반 임시 반장이다. 너 전체 일등으로 들어왔네.


뭐... 지?! 짧은 찰나에 일등부터 십 등까지 이름을 다 외우신 걸까? 아니면 찢은 건 페이크고 또 복사한 종이가 여러 장 있는가 보다, 하는 배신감에 선생님에 대한 기대와 호감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진아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선생님의 앞 뒤 안 맞는 행동에 서운했기 때문일까. 진아는 얼굴을 보기도 전부터 이름으로도 나에게 비호감이 됐다. 그때부터 그 애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중1이었는데도 진아는 키가 일단 무척 컸고(170 가까이 되는 키) 어른스러웠고 늘 주위에 북적북적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그냥 자리에 앉아있을 뿐인데 늘 주위로 애들이 몰렸다. 공부를 잘하는 건 물론이었지만 주변에서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거나 어려워하는 문제가 생기면 바로바로 친절하게 알려줬다. 나랑 같은 초등학교 출신도 없고 대부분 낯선 얼굴, 차가운 시멘트 바닥, 교실 중앙에 큰 난로(세상에, 난로라니!), 그 위에 쫀드기나 쫀쫀이, 오징어를 구워 먹어 온갖 구운 냄새가 났고 선생님은 냄새의 정체에 화를 내고 매일 




문 열어! 환기!





란 말로 수업을 시작했다. 난 다들 화난 채 창문을 열라는 그 말이 싫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반항심. 여중이었지만 초등학생 때와는 다른, 고등학생의 뭔가 정돈된 분위기와는 또 확연히 달랐던 공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더 긴장되고 쫄리는 마음인 한편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도 생기고. 일단 매점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사실이 제일 설렜다. 지금 떠올려보면 참 작았는데 초등학교 땐 매점 같은 게 없었으니까.


 당시 나는 내가 오고 싶었던 학교가 아니라 그게 기분이 우울했던 건지 뭔지 늘 울상을 짓고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는데 하루는 같은 여중 3학년 선배가 나를 찾아와서 두리번두리번하다가 나를 지목했다.

-야, 너 나 기억하지?

-? 누구? 

-아까 버스에서 나 야려봤잖아!(왜 째려봤냐는 말)

-무슨 소리예요? 난 누굴 본 적도 없고, 나 알아요? (일단 선배라 압존법 존칭은 칼같이 지킨다!!) 왜 반말로 와서 시비를 털어요? 지금 사는 게 힘들어서 머리 빠개질 것 같은데!


학기 초에 이런 사건이 있기도 했다. 한 살 터울 나영언니가 친구들과 손을 잡고 와서 맛있는 페스트리 빵과 사과 맛 피크닉 음료를 한 아름 사가지고 와서 친구들과 나눠먹으라고 했지만 친구가 진짜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언니의 그런 보살핌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고 창피했다. 그래서 빵과 피크닉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후다닥 교실로 들어간 적도 있다. 


언니, 미안해. 나눠먹을 친구가 없어서 같이 나눠먹고 싶은 친구도 한 명도 없었는데 언니까지 날 아기 취급하는 것 같았어. 


초등학교 때까지 큰 소리를 뻥뻥 쳤는데 뭔가 위축되고 낯선 환경이 불편했고 불안한 느낌과 긴장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몇 명이 나에게 이름을 물어봤지만 내 이름만 짧게 말하고 상대방 이름을 제대로 묻지도 듣지도 않았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지만 그때부터 중2병의 시초가 있었던 것 같다. 흑 중1 때부터 지독한 중2병에 걸리다니, 불치병이었다. 만사 불만과 짜증이 많아지고 군중 속의 고독처럼 다 까르르 웃고 떠들어서 몰려가는데 난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밥을 먹는 친구도, 같은 방향으로 집에 가는 친구들 무리도 생겼지만 아침부터 이른 기상과 학교에 가기 위해 만원 버스를 타는 일부터, 긴긴 거리를 걸어서 집까지 가는 길도 터벅터벅 힘들었다. 생각해 보니 올 때도 버스를 탔으면 되는데 친구들과 15분, 20분 정도를 걸어서 하교했다. 








그러다 체육시간에 농구를 했는데 우연히 진아와 옆자리에 앉게 됐다. 왜 농구연습을 안 하고 공만 튀기고 앉아있냐는 질문에 여전히 짜증 난다는 투로

-그냥. 재미없어. 난 키 작아서 농구도 잘 못해.

다른 애들처럼 그냥 시큰둥하게 ‘뭐야, 얘?’하는 표정으로 돌아가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뒤이어 들리는 그 애의 대답은 나의 예상을 깼다.



그래? 잘 못해? 그럼 내가 가르쳐줄게. 
나 몇 번 해보니까 좀 되는 거 같더라. 
일어나 봐 봐.
농구 골대 중앙이 아니라 골대 저 위에 부분 있잖아,
거기를 보고 공을 쏴야지 더 잘 들어가. 볼래?


-(끄덕끄덕)


덜커덩, 진짜 골대 윗부분을 맞고 들어가는 농구공을 보면서 농구를 좀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진아는 나에게 선생님보다 더 체계적으로 친절하게 일대일 개인 레슨을 해줬다. 자세도 잡아주고, 실제로 그 애가 코치하는 대로 하다 보니 나도 슛이 자꾸만 들어갔다. 조금 쉬었다 하자고 앉으니 진아는 이것저것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영화 보는 거 좋아하지? 

-어떻게 알아?

-네가 책 표지 싼 게 전부 영화배우더라. (우리 땐 교과서를 꼭 싸는 게 유행이었다. 교과서마다 스크린, 로드쇼 같은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배우들 화보를 골라서 겉표지를 싸고 그 위에 투명 포장지로 한 번 팽팽하게 당겨서 쌌다. 왜 쌌는지는 모르겠다. 교과서 보호 목적도 아니고 그냥 나름의 일탈? 교과서를 보는, 아니 표지를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던 것 같다) 리버피닉스랑 톰 크루즈도 있고. 전부 영화 배경으로 책을 싸서 너한테 한 번 말 걸고 싶었어.

-나 영화 보는 거 엄청 좋아해. 울 집에선 드라마를 못 보고 무조건 일찍 텔레비전을 다 끄거든. 그래서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며 가요, 이런 거 난 다 몰라. 아빠가 근데 희한하게 토요명화 하는 시간에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 그 두 개는 밤새고 보게 해 줘. 그때 졸려도 참고 봤더니 무진장 재밌더라고. 우리 언니가 톰이랑 니콜키드먼의 팬이야. 리버피닉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고. (뭔가 이쯤에서 나의 말하기 좋아하는 오리 주댕이, 수다 본능이 폭발했던 것 같다.ㅋㅋ)



우린 운동장 가운데 앉아서 그렇게 한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영화배우 이야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도 하고. 오랜만에 나와 말이 통하는 듯한 사람을 만난 게 반가웠다. 그동안 고독을 씹으면서 맨날 토하듯 쉬는 시간마다 일기를 썼지만 사실은 내가 외로웠던 거구나,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내 이야길 들어주길 기다렸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 대상이 진아가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우리는 체육 시간 이후로 부쩍 친해졌다. 



-나경아, 넌 꿈이 뭐야? 난 너랑 이야기하는 게 다른 애들이랑 말하는 보다 재밌고 잘 통하더라. 네 꿈이 궁금해.

-꿈?(이런 걸 또래가 궁금해한 것도 처음이었다) 있지만 아직 잘 모르겠어. 


노벨 문학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스스로 입 밖에 내기도 너무 허황돼서 어떻게 말하나 고민했는데 진아는 생각보다 자기 꿈을 척척 말했다.


-나는 나사에 가서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야. 너 나사 알지?

-나사? 그럼 나! 사! 알지!!! 나사를 모르는 사람도 있어? (나는 나사 드라이버의 부품 나사를 말한 거였는데 찾아보니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한 거여서 나중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도 아니었고 백과사전과 선생님들께  물어물어 나사의 정체가 미국의 항공 우주국이란 걸  파악할 수 있었다.)


진아는 그때 당시 칼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이미 자기의 꿈도, 미래를 향해 가려는 준비도 철저한 아이였다. 예를 들면 하루에 영어 단어를 다섯 개씩만 외워도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같은 김우중 회장의 책을 탐독하며 나에게 권하기도 했다. 당시 독서를 좋아하고 많이 한 나는 신세용이 쓴 ‘나는 한국인이야’, 탈북자 김광호 어린이가 쓴 ‘광호의 일기’이런 게 내가 읽는 에세이의 전부였으니 나에겐 그 책이 얼마나 재미없고 멀게만 느껴지던지. 나의 독서 수준은 대부분 소설책과 만화책, 세계명작에 꽂혀있었으므로 다양한 자기 계발서, 수준 높은 과학 백과사전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진아를 좋아했지만 독서 스타일은 나와 전혀 달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에게 꿈을 물어본 14살 소녀의 눈빛과 호기심이 언제나 나의 마음을 자극했고 호감으로 다가왔다. 

 매번 짝 바꾸기가 귀찮았던 선생님은 함께 앉고 싶은 아이들끼리 짝을 하라 했고 나는 친구가 없어도 다음날 누구랑 짝을 할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매번 함께 어울리고 밥 먹고 집으로 오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홀수여서 늘 함께 따로 앉는 것 같았고 같이 앉을 사람 없으면 남는 누군가랑 앉거나 혼자 앉으면 되지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소풍 때도 함께 앉자는 친구들이 많아서였을까 짝꿍이나 앉아있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일찍 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도착해 보니 평소에 한 번도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않은 현정이가 나에게 

-나경아, 진아가 너랑 자기 자리 좀 맡아 달라고 했어. 여기 삼 분단 제일 첫째 줄이 네 자리야. 내가 자리 맡았어.

진아랑 짝이 됐다. 따로 짝을 하자, 같이 앉자 말하지 않았지만 진아와 짝이 되는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구나 느꼈다. 그게 대단히 큰일은 아니지만 설렘과 기대를 동반할 수 있는 일이라면 더욱.

 진아는 시험 기간에 나에게 같이 공부하자고 했고 중요한 부분 밑줄부터 

-이건 시험에 꼭 나오는 거야, 여기가 제일 중요한 부분이거든.

시험에 나올 부분을 따로 체크해주기도 했다. 


아침 이른 시간에 교실 자물쇠가 굳게 잠겨있을 때는 큰 키를 이용해서 창문으로 훌쩍 넘어가서 문을 따주기도 했고 창문마저 잠겨있을 때는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 처음 간 것도 진아 덕분이었다. 학교에 도서관이란 곳이 있는지도 몰랐기에, 온통 캄캄하지만 오래된 책 냄새가 나는 그곳에 조심스럽게 들어간 기억이 난다. 칠흑같이 어두운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어둠을 무서워 한 나는 ‘스위치가 어디쯤 있지, 빨리 불을 켜야 내가 뭘 좀 보고 할 텐데.’하는 생각에 벽면을 더듬거렸다. 당연히 있어야 할 위치에 스위치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 진아가 “촤라락” 소리를 내며 까만색 커튼을 걷어냈다. 하나, 두 개씩 커튼을 걷어내자 도서관은 환해졌고 불을 켜지 않아도 주변이 또렷하게 보였다. 늘 일상적으로 가야 하는 길만 걸어야 하는 나에게 진아는 길을 만드는 사람처럼 보였고 빛처럼 다가왔다. 

아, 이때 이후로 나는 학교 도서관, 동네 도서관을 얼마나 좋아하게 됐는지 모른다. 책이 가득가득 차고도 넘치는 곳에서 공부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해 준 진아. 스위치가 없어도 밝은 빛 만으로도 우리는 책을 볼 수 있었듯이 세상을 알게 되는 자연스러운 앎의 기쁨, 공부하는 재미를 선물해 줬다. 덕분에 나는 그 시험에서 진아 다음으로 2등을 할 수 있었다. 


윤춘호 선생님께선 진아의 전교 일등은 늘 당연한 거라 따로 일등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고 6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에게 박수까지 치라고 해서 박수도 받았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진아의 편지 / 늘 표지에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곤 했다




진아와의 본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게 된 건 중2 때 반이 갈리면서부터다. 내 생일 때 진아는 아주 큰 ‘프리윌리’ 영화 포스터를 선물해 줬는데 생일 편지가 내 마음에 와닿았다.

-네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고 느꼈을 때 고맙기도 했어. … 네 개성적인 성격과 행동 잃지 말아라!

특히 이 부분이.


매일 인상만 쓰고 온다는 사람도 밀어내는 포스를 풍겼으니 그 애의 말마따나 친해지기 힘들다고 생각한 건 당연하다. 친구들이 생일이라고 복도에서 깜짝 파티를 해줬는데 그때 받은 선물 중에서 진아의 편지가 가장 마음에 들고 고마웠다. 

 

편지만큼 마음에 쏙 들었던 프리윌리 포스터를 내 방 침대 맞은편 벽에 붙였다. 포스터 사이즈가 당시 내 방, 방문만큼 컸는데 커다란 범고래 윌리가 꼬마 소년 위를 높이 날아오르는 사진이었다. 마이클잭슨 노래 ‘Will you be there’로 유명했던 영화 프리윌리, 내 생애 내가 처음 받은 영화 포스터 선물이기도 했다. 진아는 그냥 포스터를 보자마자 내가 떠올랐다고 했다. 사실은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진아의 마음이 담긴 포스터라는 건 아주 훗날 깨달았지만 말이다. 



포스터를 보다가 진아에게 답장을 썼다. 주고받은 편지가 더 많아졌다. 반이 갈렸기에 자주 볼 수 없었지만 집에도 초대받아 놀러 가고 진아의 새로운 부분을 많이 알 수 있었다. 진아는 오빠와 남동생이 있었고 그중 둘째로 태어난 그것도 혼자만 여자아이였다. 아버지는 교수님이었나 직업이 그랬고 오빠도 외고에 진학해서 다니고 있었다. 엘리트 집안, 엘리트 코스로 언제나 학업에 대한 공부와 오빠만큼 오빠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마어마했구나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과학고는 인기가 없을 때였는데 그때도 진아는 과학고에 들어가기 위해 밤을 새 가며 공부를 하곤 했다. 

 


나는 진아에게 편지를 쓸 때 항상 최선을 다했다.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비록 같은 반이 아니고 이제는 생활도 달라서 더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여기서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널 응원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돌돌돌 말린 카세트테이프 편지, 낙엽과 꽃잎을 말린 편지, 작은 손수건, 예쁜 펜시나 스티커, 좋은 글귀를 동봉했다. 언제나 답장을 바라고 쓴 편지는 단 한 통도 없었지만 진아에게선 매번 답장이 날아왔다. 캐나다로 방학 때 영어 캠프를 가고 같은 선생님께 둘 다 눈높이 영어를 했지만 이미 상위 레벨인 진아에게 나는 열등감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특별하고 대단하게 생각한 진아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성문을 분석해서 목소리 만으로 누구인지 알아보고 찾을 수 있다면 나는 진아의 필체로 진아를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오늘 편지를 찾으면서 느낀 건데 생각보다 많은 편지를 주고받진 않았다. 하지만 편지에 담긴 그 솔직하고 진지한 태도가 여전히 나를 뭉클하게 했고 16살로 돌아간 듯 만들어줬다. 마치 내 일기장을 꺼내서 펼쳐 본 기분이 들었다.





P.S 진아에게 



진아야,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어? 나는 원래 살았던 고척동, 개봉동 쪽에서 쭈욱 아이 낳고 살다가 몇 년 전쯤 여기 일산으로 이사 왔어. 오자마자 아이들과 하루 종일 놀이터에 있다 보니 좋은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민정이란 (나와 동갑) 친구가 도서관에 데려가서 도서관 카드 만드는 것도 알려주고 가족별로 전부 만들면 한 번에 28권을 빌려서 연장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더라. 네가 생각났어. 우리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거 기억나? 언니처럼 네가 중요한 부분도 알려주고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나는 어렸을 땐 잘 몰랐는데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걸 알아주고 나를 손잡고 이리저리 끌고 이것저것 알려주는 사람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가 봐. 수많은 편지를 나누고 속 이야기를 나눴지만 어쩌면 편지에 아무에게도 털어놓지도 않은 이야기도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사실 세세히 전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일상을 같이 보내고 함께 했던 일 년의 기억이 나를 제일 많이 보여준 시기 같기도 하고. 넌 나한테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용감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나는 네가 더 멋져 보였어. 분명한 꿈도 있고 그걸 위해 날마다 꾸준히 공부하는 것도 비겁한 게 아니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편지에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 초등학교 시절부터 단짝 친구가 늘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도 ‘단짝’이라고 하면 네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라. 데미안을 읽지 않았다면 전교 1등을 했을 수도 있다는 네 편지가 그날 편지가 좋아서 몇 번을 더 읽고 읽었던 생각이 난다. 혼란스럽고 철학적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은 찾았니? 


중2 때부터 고민했던 그 물음이 어쩌면 지금 너와 나를 있게 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외로운 섬에 갇혀 진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지금 글을 쓰고 있어. 누가 봐주지 않아도, 봐줄지도 모르는, 언젠가 봐줄 글을 쓰면서 사실은 내가 내 글을 쓰고 보는 걸 좋아한다는 걸 이제 느꼈어. 나도 너에게 너만큼 솔직하게 우리 식구들, 내 이야기를 건넸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도 들고 불안하고 무서운 것 투성인 세상에서 사실은 네가 말 걸어주고 옆에 있어줘서 누구보다 든든하고 고마웠다고 전하고 싶어. 너도 나처럼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됐을지 궁금하다. 궁금한 점 투성인 세상에서 지금도 떠올렸을 때 잊을 수 없는 학창 시절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 아마 그 시기에 나는 너한테 편지 쓰는 시간을 제일 즐거워했던 거 같아. 다시 편지를 꺼내 한 장 한 장 읽어보면 새록새록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 신기하지? 나는 네가 준 편지를 보물처럼 가지고 있었어. 20대가 돼서도 30대 때도 한 번씩 꺼내서 쭈욱 읽어봤는데 둘째 녀석이 너무 피곤하게 뛰어다니고 쫓아다니느라 바빠서 그런지 40이 넘어서는 편지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내 기억과 추억을 쫓아가는 시간이 즐겁다. 미숙하고 모자란 점도 많은데 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보석 같은 시간들, 나에게 단단한 힘으로 쌓인 거 같아. 혼자서 놀고 있는 나에게 농구 시간에 말 걸어줘서 고마워. 대학교 때도 한 번 명아를 통해서 만나긴 했는데 왜 그 뒤로 연락을 이어지지 않았을까. 3월 30일 네 생일도 내가 빼먹지 않고 우리가 만나지 않은 긴긴 시간 동안도 내 다이어리에 기록해 두었는데. 직접 뭔가 챙길 수 없어도 항상 네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거든. 


 중학생인데도 네가 키가 크고 공부를 잘해서 어른스러웠던 게 아니라 늘 왜 사는지, 왜 공부하는지, 그런 고민을 해서 난 그 부분이 멋있었던 거 같아. 나는 내가 하는 생각이 전부 부정적이고 개똥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걸 막상 풀어서 편지에 써보니까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들었어. 나의 어수선한 마음과 손글씨들을 받아줘서 고마워. 난 지금도 편지 쓰고 책갈피 만들고,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해.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건 행복한 것 같다. 쇼생크 탈출 마지막 장면에서 희망은 좋은 것 중에 가장 좋은 거라는 구절이 있는데 앤디와 레드가 바닷가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 있잖아. 언젠가 너랑 나도 그렇게 반갑게 오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날을 꿈꿔본다.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나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인증이고 뭐고 편지에 푹 빠져 읽다보니 시간이!!




초등학교 시절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나 수업시간에 주고받은 쪽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났는데, 오랜만에 진아 편지를 찾으려고 꺼냈다가 5학년때 내가 그렸던 만화 속 주인공들, 종이인형까지 발견했다. 크리스틴 로즈라니, 이름이 너무 순수하고 귀엽다. 그리고 또 발견한 6학년 3반 생활 통지표 (1993년도엔 생활통지표라고 나왔다.ㅎㅎㅎ)


아, 옛날이여, 추억이여!! 오늘 밤엔 왠지 편지 속에 파묻히는 행복한 꿈을 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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