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천행 조선왕릉을 여행하는 천 가지 방법
우리의 원행 길, 왕실 여인의 길
아이와 함께(체험학습 신청을 하고 학교를 빼고) 왕릉천행에 다녀왔다.
사실 이런 정보는 몰랐는데 함께 줌으로 공부하는 아템포님의 추천으로 '왕릉'을 투어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봄, 가을로 아이들과 소풍 가기에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약사님(미옥쌤)의 첫 개인톡 연락이 왔다.
나경씨, 월요일 자리가 8자리 남았네요, 아이랑 함께 가실래요?
어찌나 좋던지! 마침 취소된 8명 팀 자리가 난 것 같아서 선재랑 함께 가려고 얼른 아이 1, 어른 1 신청을 했다. 이런 건 무조건 빠른 클릭을! ㅎㅎ 신청하자마자 다시 마감되는 기적이! (앗싸!!)
그래서 계획에도 없던 조선왕릉 여행이 시작됐다.
1년 가까이 줌으로만 보다가 드디어 직접 얼굴을 보게 될 아템포님과 미옥님을 만날 생각에 두근두근 하기도 했고 설레서 소풍 가방을 쌌다 풀었다 반복했다.
(요즘 이렇게 함께 줌으로만 공부했던 분들을 직접 대면해서 만날 기회들이 생기는데 실제로 보니 더 더 좋다! 매주 만나서 수업한다면 더 좋겠지만 줌, 웨일온으로 같이 영어로 미술사를 읽고 또 듣고 배우는 사이라니 특별하고 감사하다.)
청와대 근처 칠궁에서 모여서 본격적인 칠궁 해설이 시작됐다. 와, 사람들이 어마어마했다.
*칠궁을 찾아가느라 7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봤는데 다들 처음 듣는 반응이;; 결국 청와대 안내데스크까지 가서 물어본 후에야, 칠궁을 찾을 수 있었다. 부랴부랴 뛰느라 힘들었지만 뭔가 시작부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스러운 것을 꺼내는 느낌이 들어서 괜히 설렜다.
| 육상궁 : 영조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 씨의 사당이다.
비가 살짝 내린 탓에 날도 흐리고 약간 싸늘했지만 지금처럼 소풍 하기 좋은 때도 없는 것 같았다. 왕릉천행은 월요일에 문을 닫는 곳곳 능과 원 같은 곳을 따로 개방해서 신청자들만 투어해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3만 원에 점심도 주고 간식과 기념품도 챙겨주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끼리만 관람해 볼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허락해 준다. 평소에는 개인이나 단체로 관람하기도 힘든 소령원, 수길원 같은 곳은 아직 단청 색도 칠하지 않았는데 먼저 가서 설명을 듣고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어서 이끼도 엄청 많고 또 살면서 잔디에서 가장 많은 버섯을 본 날이었다. 바닥 곳곳에 피어난 버섯들, 아이가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도 하길 원했지만 방아깨비, 사슴벌레, 사마귀만 잡고 신기한 버섯 구경에만 신났다. 뭐,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유, 아인데 저런 모습이 당연해요. 남자아이들은 저렇게 여기저기 관심을 가지고 건강하게 다니지만 귀로는 또 잘 저장하고 있어요.
미옥선생님 말씀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자연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로 여기저기 다니는 부산스러운 아이 모습에 뭔가 편안함을 선물해 주는 위로의 말씀.
인상적인 곳이 두 군데 있는데 첫 번 째는 칠궁 중 하나인 냉천전이다.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 씨를 기리기 위해서 어머니 묘소를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려고 노력을 기울인 왕이었다. '영조'를 떠올리면 사도세자 이야기가 워낙 강렬한데 영조에겐 치명적이면서 강렬할 수밖에 없는 사도세자와 얽힌 이 이야기 외에 또 다른 어머니, 부인과 얽힌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영조는 효심 가득한 왕답게(또 본인의 왕권의 확립을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 바로 이 냉천전을 지었다. 냉천전 입구에는 바로 좀 떨어진 곳에 정자가 있는데 그곳은 사람이 쉬어가는 곳이 아닌 '영혼이 쉬어가는 정자'라고 한다. 영혼이 외따로이 바람도 맞고 실개천도 보면서 쉬어가는 정자라니,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본 걸까 옛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지고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 정자에 나도 한 번 대자로 누워보고 싶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냉천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공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영조는 이를 지키기 위해 냉천전을 지었다고 한다. 곳곳에서 드러난 영조의 효심이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아들(사도세자)에겐 너무 냉혹하고 잔인한 아버지였지만 또 어머니에겐 한없이 순종적인 아들이라 생각하니 뭔가 모순된 것 같으면서도 '임금의 자리'가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도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냉천전 옆에는 문이 없었지만 영조는 일부러 문을 내서 이곳에 와서 조금이라도 더 어머니가 지나가는 길목을 열어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가이드 선생님말씀이 인상적이었다. 나도 덩달아 영혼이 쉬어가는 정자 쪽으로 난 창문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단테의 신곡 '지옥'은 암담하고 깜깜한 숲 속에 길을 잃고 갇힌 시인 단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를 거쳐서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영원히 버려라.
우리의 조상들이 죽음 후의 정자까지 마련해 둔 걸 보면 이런 서구의 사후세계와 조금 다른 저승을 그려봤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죽음 이후에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정자, 제사의 향기가 지나가는 제단 같은 부분을 관찰할 때마다 세심하고 애틋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특별한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어머님을 위해(*천민이라는 기록은 실록이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양민출신이거나 평범한 가문이지 않을까 추정한다고 한다) 자신의 정통성 확립이라는 작용이 있기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영조의 옆으로 낸 창가 길이나 정자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그리워했구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작은 글씨 하나까지 애틋한 마음을 담은 영조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래, 이쯤부터는 사도세자는 잠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두 번째 인상적인 장소는 바로 '수길원'이었다. 소령원과 수길원 모두 아직도 보수하면서 공개하는 장소기에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특별함이 가득했다. 밟는 곳곳 흔적들이 조심스럽고 귀하게 느껴졌다. 왕의 능만 있는 줄 알았는데 '원'이라는 무덤 칭호의 생성 과정도 새롭게 알 수 있었고 중요한 건 아이의 반응이었다.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무덤 봉분이 있는 곳)에서
와, 엄마, 여기서 보니까 진짜 아래로 막 내려가고 싶어요!
세상을 향해 난 널찍하고 멋지게 펼쳐놓은 터가 새삼 놀라웠다. 정말 아래로 내려가고 싶게 만들었구나, 아이 말에 끄덕끄덕하는데 가이드 선생님께서 이어폰을 통해 하시는 말씀.
왕의 능이나 묘, 원을 보는 다양한 감상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가 무덤의 봉분을 보는 건 제사를 지내거나
가장 풍수지리가 좋은 곳에 봉분을 쌓아서
그것을 기리고 '모신다'는 의미가 있어요.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무덤 봉분 자리에서
바로 앞 쪽 경치를 바라보는 거예요.
주변과 앞에 트인 경치가
바로 죽은 사람들이 바라보게 될 경치니까요.
정말 살고 싶게, 다시 이생으로 내려가고 싶은 미끄럼틀 같은 구조구나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바로 떠올린 아이 말이 재밌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무덤의 가장 귀한 혈 자리인 가운데 길로는 지나갈 수 없다고 하니 영혼에게 양보하며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갈 수밖에, ㅎㅎㅎ
수길원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진종(효장세자)의 생모 정빈 이 씨의 원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아들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정빈에 추봉 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자 왕의 생모 지위에 맞게 원의 이름을 '수길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직 단청의 색도 안힙인 수길원의 모습이지만 정자각, 비각 향로와 어로 등 소실되었던 것을 최근 다시 복원하며 하나씩 갖추며 세워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이렇게 와서 몰랐던 역사의 한 자락도 알게 되고 죽은 후의 '능'을 구경하는 것이 ('원'이라는 명칭으로 변하긴 했어도)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기리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전에는 무료로 시작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노쇼가 너무 많아서 5000원으로 금액을 책정했다가 그래도 여전히 신청만 하고 연락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서 금액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3만 원으로 가격을 정하니 응답 비율이 현저하게 올라가고 참여도도 좋았다고 하니, 사실 받은 기념품과 하루종일 듣는 설명과 점심식사, 간식, 두 손 가득 기념품을 생각하면 가성비가 넘치는 금액 같다.
*7세 이상부터 참여 가능이고 어린이들은 비용이 2만 원이다.
*쿠키 간식과 물도 패키지 꾸러미에 들어있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점심 메뉴도 열심히 걸었던 탓에 꿀맛! 파주 장단콩 두부마을에서 두부전골을 먹었다. 가이드 선생님의 설명이 정말 재밌었고 진행요원 분들이 아이를 또 많이 배려해 주고 챙겨주셔서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 싱잉볼테라피로 피로한 심신을 힐링하며 프로그램을 마쳤다.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유적지에 돗자리를 깔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싱잉볼 소리에 집중하고 아로마테라피와 함께 고요한 명상의 기쁨도 누린 하루. 좋은 날 만나고 싶었던 아템포님, 정약사님과 짧게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점심도 옆자리에서 먹을 수 있다는 소소한 행복들이 이 가을을 더 무르익게 해 주는 것 같다.
이미 내 몸과 마음은 고요한 정자에서 유유자적 가을 소풍을 누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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