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데이에 태어난 둘째
우연히 시계를 봤을 때 같은 숫자 네 개가 가지런히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11 : 11
나는 손목시계는 불편해서 거의 착용하지 않으니까 주로 핸드폰이나 전자시계, 집에 유일하게 걸려있는 커다란 아날로그시계를 보는데 11시 11분은 그냥 보는 자체로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우연히 발견한 기분 좋은 일. 뭔가 딱 들어맞는 행운 같기도 하고.
2시 22분은 채워주지 못한 네 자리의 기쁨 같은 건가, 10시 10분 같은 쿵짝쿵짝의 귀여움은 없어도 정갈함과 길쭉함이 있었다.
*빼빼로를 광고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ㅎㅎ
어렸을 적 피아노를 잘 치지도 못하면서 '젓가락 행진곡'을 유난히 좋아했는데 피아노를 잘 치는 언니가 언제나 위에 멜로디파트를 연주하면 나는 쿵짝짝 쿵짝짝 왼손으로 박자를 맞출 수 있었다. 그때 내려다본 언니 손가락 모양이 숫자 11과 똑같다고 느껴졌다. 혼자서는 완성할 수 없지만 피아노를 위한 이 작은 왈츠는 손가락 두 개만으로도 연주가 완성된다는 점이 놀라웠다. 어린 나이에 손가락 두 개로도 이렇게 고급스럽게, 힘 있게 연주가 가능하구나 감탄하면서 쳐다본 기억이 난다. 젓가락 행진곡의 매력은 양손이(네 개의 손이) 피아노의 끝과 끝에서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움직여서 상대의 영역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화로움 자체이기도 했다.
피아노학원엔 늘 책을 읽으러, 연습실에 문 잠그고 잠을 자러 다녔던 나에게도 젓가락 행진곡을 연주하는 시간만큼은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잘 못 쳐도 언니가 잘 받쳐준 덕분에 나도 꽤 훌륭한 연주자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그때부터 11시 11분이 나에겐 행운의 숫자가 된 것 같다.
우리 둘째 선율이, 태명은 선물이었던 선물 같은 아이의 생일이기도 하다.
첫째가 수술을 했기에 둘째도 수술 날짜를 고를 수 있었는데 11월 10일 지날 무렵부터 편한 날짜에 고르라고 하시는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마자
그럼 저는 11월 11일 빼빼로데이요.
시간은 11시 11분 11초, 이렇게 맞춰주실 수도 있나요?
숨도 안 쉬고 대답하고 질문한 내 말이 재밌으셨는지 선생님께선 웃으시면서,
-아, 그럼요. 받아놓으신 날짜가 있으신 거예요?라고 되물으셨다.
-아니요. 그런 건 없고 그냥 제가 좋아하는 숫자예요. 태어난 날을 주변에서 같이 기억해 주면 또 좋을 것 같아서요. ㅎㅎㅎ
집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의 무한 1111 넘치는 빼빼로 숫자 사랑은 계속 됐다.
친절하신 선생님께선 반신마취를 한 나에게 하나씩 무슨 과정을 수술하는지 이야기해 주셨고 불안할 때마다 고개도 빼꼼 내밀어서 손도 흔들어주셨다. 하나하나씩 피부 표피층을 가르고 양막을 가르고 이제 아기만 꺼내기까지 시간도 맞춰 기다려주셨다.
마취의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손 꼭 잡아주시고 계속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김주영선생님) 만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혼자서 일어나고 눕기도 힘들지만 걱정되는 선재 옆에 든든한 신랑이 있어, 친정 엄마가 계셔 오늘도 병원에서 평안히 쉼 얻게 하심 감사합니다.
어제보다 더 가볍게 걸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씻고 머리 감는 평범한 행동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마취 후의 24시간에 비하면 정말 기적 같고 감사한 일이란 걸 깨닫습니다.
생일은 홀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커다란 홀케이크, 크기와 요즘엔 가격만으로도 헉, 할 때가 많은데 사실 예쁘고 작게 나온 조각케이크들이 다양해진 세상이라 그만큼 커다란 케이크를 살 일도 별로 없어졌다. 다 같이 축하할 일, 기쁨을 나눌 일이 생일이 아니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묵직한 케이크 하나를 통째로 사는 생일이 되면 마음만은 그렇게 즐겁고 가벼울 수가 없었다.
주일학교와 친정엄마네서 한 번씩 커다란 홀케이크도 받고 촛불까지 끈 아이는 직접 볼에 바람도 넣어 초를 불고 두 손을 꼭 쥐고 꽤 오랫동안 눈을 감은 채 소원도 빌었다. 귀여웠다.
아예 초도 불지 못하고 화려한 장식 속에 앉아있기만 했던 아가였는데 이젠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후~ 하고, 세게 불 수 있는 힘도 생기고 원하는 것도 점점 다양하고 많아진다. 1년 내내 자기 생일이 언제인지, 언제쯤 생일잔치를 하는지, 그땐 무엇을 할 건지 계획하고 말한 아이의 기대에 부응해주고 싶었기에 장난감도 사주고 함께 놀고 원하는 케이크도 직접 같이 골랐다.
입혀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즐겁고 사랑스러운 아가 시절이 있었기에
이렇게 자기 손을 모으고 기도 할 수 있는 아이로(*기도하다 눈 뜰 것 같은 예감은 있었지만 진짜 뜨더라 ㅋㅋㅋ) 성장할 수 있었다. 생일이라고 안 입었던 정장을 입었는데 위에서 점프하면서 바지가 또 찢어지는 대참사가;;; 결국 언제나처럼 운동복을 입고 축하를 받아야 했다.
아이가 성장한다는 건 요구가 많아지고 자기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 같다. 결국 돌잔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인지도 잘 몰랐던 시간들을 거쳐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
개성이 뚜렷하고 말보단 늘 행동이 크고 빨라서 내 몸이 덩달아 힘들었는데 요즘엔 표현하는 어휘도 풍부해지고 나를 닮아 말도 점점 더 많아진다. 미운 여섯 살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나 싶게 예쁜 말을 하고 표현력이 다양해진 아이를 이유 없이 꽉 안아주고 싶을 때가 많다. 더듬더듬 우리 선율이가 나에게 처음 제대로 된 문장을 말했을 때의 감격도, 떠오른다.
엄마, 엄마는 그럼 무슨 색깔을 좋아해?
말문이 트인 아이는 말을 시작하자마자 나에게 어떤 걸 좋아하냐고 물었다. 완벽한 대화의 시작이 나의 취향을 물어봐준 그 말이어서 고맙고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자기 생일 날짜며 어제, 오늘, 지금 이 순간의 시간 개념도 제대로 파악을 못하는 아이지만 뚜렷하게 자기 취향은 꼭 이야기한다. 생크림 케이크에 위엔 딸기가 올라간 케이크가 제일 좋고 그걸 무조건 먹어야 한다고. 장난감은 2개, 4개도 아닌 5개로 골라야 한다고. 요구대로 들어줄 수 없는 특수한 상황들 속에서도 타협점을 찾아간다.
모양이 예쁜 다른 케이크를 고르고 대신 먹고 싶은 다른 초콜릿바 두 개를 고르기처럼.
엄마, 형아는 나를 왜 그렇게 싫어해요?
엄마, 00 이가 오늘도 나랑 안 놀았어. 혼자 노는 게 좋은가 봐.
가끔씩 이런 표현도 할 줄 아는 아이였던가, 깜짝 놀라기도 하고 질문과 이야기 너머 아이의 내면 어딘가 어둡고 우울한 부분에 끄덕끄덕,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기도 했다.
그래도 잠시 심호흡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나만의 대답을 해준다. 내 말이 결코 정답이 될 수 없지만 내 아이니까, 부족한 부분이 드러나도, 부족한 중에 가장 최고와 최선의 선택으로 노력하면서 키워야겠다고 다짐한다.
선율이는 태어나자마자 형아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형은 동생이 갑자기 생겨서 질투도 나고 엄마를 빼앗긴 기분도 들었대. 그래서 그 마음이 속상했나 봐. 그래도 형아가 선율이를 싫어하기만 하는 게 아니야. 선율이가 아프고 넘어질 땐 걱정하기도 하고 태권도에서도 선율이가 뭘 했는지, 뭘 잘했는지 전부 알려주고 선율이가 위험에 처하고 혼자 있을 땐 형이 바로 네 짝꿍이 돼줄 수도 있어. 선율이도 형이 싫어?
-끄덕끄덕한다
맞아, 언제나 맨날 좋을 수만은 없지만, 우리가 좋은 날과 기억이 더 많이 쌓여서 그래서 가족이잖아. 함께 울고 웃고 싸우고 그러면서 가족이 되는 거야. 형아한테도 선율이를 더 많이 보호해 주고 사랑해 달라고 말할게.
-그럼 엄마, 오늘은 형아랑 같이 물놀이할래!
금방 다시 웃는 우리 선율이. 태어난다는 건 온 세상을 선물로 받는 거라는데 선율이가 선물로 받는 그 세상이 눈물과 고통, 외로움으로 얼룩져도 그걸 다시 잊을 만 한 웃음이 계속해서 날마다 생겨나면 좋겠다.
금수저, 흙수저, 전부 주진 못해도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웃음 가득한 웃음 수저를 선율이에게 선물해주고 싶다.
선율아,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둘째 선율아, 생일 축하해!
홀케이크는 사실, 밀가루 뭉치에 촛불 하나만 꽂으면 그것도 홀케이크가 된다.
마지막 사진은 형제의 난. ㅋㅋㅋ
웃으시라고 >_<
저 날은 사실 선재 생일이 맞았다. 형이 불어야 하는 건 맞는데 형의 케이크 초를 불겠다고 침이 튀겨라 바람을 불었던 선율이도, 동생 얼굴을 찌그러뜨리면서까지 촛불을 불려고 한 선재도
음...;;;
엄만 그냥 웃을게.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