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부터 교육은 안 멋져

퓨처랩 교육자 워크샵에 다녀왔다

by 선생이

‘교육의 배신’ 컨퍼런스에 이어, 인연이 된 퓨처랩에서 이번에는 교육자 워크샵이 열려서 다녀왔다.

퓨처랩에서는 창의성을 길러주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런데, ‘창의 교육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창의 환경을 만든다’고 한다.


권혁빈 이사장님이 올해 컨퍼런스에서 말했다. ‘창의성도 길러질 수 있다’고. 그러나 그 길러진 창의적 인재가, '행복한' 창의적 인재일지는 모르겠다고. 그래서 창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자신만의 창의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하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교육은 바로 그런 거였다.

나는 기왕이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할 거면 재밌게, 제대로 하려고 한다. 교육도 그랬다. 이왕이면 교육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학생들과 1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만들어왔다. 그리고 5년째, 나는 이제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공교육 교사는 교육자라기보다 공무원이었고, 나는 ‘공무(公務)’를 하기 싫었다.

공무는 국가나 공공 단체의 일이다. 나는 나의 일, 우리의 일을 하고 싶었다. 현대의 교사는 국가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우리가 교사를 ‘스승’으로 여기지 않게 된 시점부터.



언젠가부터 아이들의 작품을 조각 내 부수는 것이 아무렇지 않아졌다.

멋진 작품이라고 치켜세웠던 결과물들이 며칠 있으면 의미와 빛을 잃고 쓰레기통으로 처박힌다.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해내기 때문에, 이를 그때그때 버리지 않으면 소화해낼 수가 없다. 그렇게 우리끼리 만들고 나누고 전시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젠 집에 가져가라고 하지도 않는다. 더 볼 사람도 없어서 어차피 아이들에게도 쓰레기가 된다.


예쁜 쓰레기들은 어떻게 빛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바로, ‘이야기’에 숨어있다.

우리가 프로젝트에 몰입해서 결과물을 만들면, 결과물의 완성도를 떠나, 거기엔 우리의 ‘이야기’가 담긴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는 공들여 만든 건축물과 같아서, 사람들이 쓰지 않고 방문이 뜸해지면, 녹슬고 낡아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가 무너진 결과물들을, 혼신의 힘을 다한 것임에도 가차 없이 내다 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보는 사람이 없으니 의미가 없어진다. 반 안에서의 전시는 한계가 있고 주기도 짧다.


어쨌거나 나도 오랜만에 예쁜 쓰레기를 만들어 봤다.

퓨처랩 교육자 워크샵에서 MIT 미디어랩이 준비한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그들은 멀리 미국에서 건너와, 우리에게 종이 박스와 각종 도구를 주며 물었다.


“너네 무슨 동물 좋아해?”

우리가 받은 미션은 종이 박스와 스마트 기기로 좋아하는 동물을 위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달팽이를 위한 서커스 공연장, 새들을 위한 집 등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다른 교육자 연수처럼,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 교육과정은 ’낱말의 의미를 해석한다‘에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다‘로 바뀌었고.... 하는 것들이 아니어서 좋았다. 연수에서 교사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학교라는 괴물은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에게도 예외 없이 괴물이었다. 마주한 얼굴에는 눈이 없고, 뒷통수에만 수십개 눈이 달린 그 괴물.


선생은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나 먼저 배운 학습자일 뿐이다. ‘배움’과 ‘가르침’은 동전의 양면이다.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퓨처랩은 우리가 학습 환경에 노출되어 스스로 배우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줬다. 거기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공무원이 아니라 학습자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배우는 사람이 되어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의 입장을 고민하게 됐다.

‘몰입이 이런 거였지’, ‘시간이 이럴 때 부족하구나’, ‘해보니까 여기가 어렵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만들기를 할 때엔 교사인 우리가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다. 학생의 ‘학’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간에서 예쁜 쓰레기가 될 작품을 반나절 동안이나 시간을 들여 만들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눈 파는 사람 하나 없이, 정신을 집중해서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구현이 꽤나 어려운 광경이다. 항상 이를각자의 교실에서 구현해내기 위해 많은 선생님들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이 몰입을 가능케하는 것이 바로 ‘주인공 만들어주기‘ 였던 것이다.


MIT 미디어랩 분들과의 통역, 만들기, 코딩, 간식까지 우리를 돕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손 뻗으면 닿을 수 있게 주변을 맴돌았다. 고민하고 있으면 살며시 다가와 자기 일인 것처럼 같이 고민해줬다.

이것이 바로 퓨처랩이 말하던 ‘창의 환경’인 것일까?

풍부한 공간과 시간, 사람과 자원이 학교와 너무 비교되었다. 가슴 한켠에 절벽이 있는 것만 같았다. 박탈감, 안타까움, 원망, 이해, 착잡함 등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우리의 무용한 시도 -고래에게 밤하늘을 보여주고 싶다거나 비닐 이불을 덮고 자는 해달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주는 것 과 같은- 것들에 대해 ‘뭐 하려고 그래?’ ‘이걸 왜 하는 거야?’를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들은 역시나 우리의 ‘이야기’만을 궁금해했다.

‘지금 고민하는 게 무엇이야?’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너의 그 이야기를 보고 이해할 수 있을까?’

요즘 교사로서 많이 느끼는 것은 오늘과 같은 ‘관심’이 아니라 ‘의심’이었다.

그래서 멋진 수업일 수 있었던 많은 기회들을 그저 그런, 평범한, 기본만 하는, 안전한, 민원 들어오지 않는 수업으로 대체했다.

결국 대체 누가 좋은 걸까? 학생? 교사? 일단 둘은 확실히 아닌 것 같다. 그런데, 학생과 교사에게 좋지 않다면, 그런 수업은 왜 하는 걸까? 수업은 학생과 교사가 하는 일인데 말이다.


교사에 대한 ‘관심’과 ‘의심’은 겉으로는 같아 보인다.

둘 다 ‘수업 제대로 하는 거 맞아?’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 질문이 나오게 된 과정은 매우 다르다.

관심의 과정은 이렇다.

-선생님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교육관을 가지고 있을까, 그 의도대로 수업이 되고 있을까?

의심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번 담임은 또 누구야, 이상한 사람 아니겠지, 수업은 제대로 하나?


지금 공교육 교사는 민원인이고 공무원이다.

의심을 피부로 직접 받는다. 동사무소에도 있는 투명 가림막 따위는 없다. 나는 사실 그런 의심이 두렵지 않다. 내가 떳떳한 교육을 해왔다.

그런 나도 이젠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게 된다. 도전하는 수업을 하지 않게 된다.


'괜히 했다가 동학년에서...' '학부모 민원 들어오면...' '책임져야 되면...'


불쾌한 일은 '나 자신'에게 영향을 미친다.

내가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수업을 할 마음은 없다.

사실 학생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느 새, 부터, 교육은 안 멋져- 진다.


오늘 ‘배우는 사람’(학습자)으로서 했던 나의 멋진 경험이, ‘올해’ ‘우리 반’ 아이들에게는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년’에 ‘다른 반’을 맡았을 때는 전혀 확신할 수가 없다.

무력한 민원 담당 공무원에 불과한 현대의 교사로서, 다음 멘트가 저절로 나온다.


“ ‘내년’에도 될지는 제가 확실하게 답변드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 ‘다른 반’ 부분은 담당자가 달라서,
그쪽으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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