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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Aug 14. 2021

굿바이 1

여름처럼 웃던





학과장실 안쪽 방.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소파에 앉아있던 상훈은 시계를 올려다보고는 다리를 조금 흔들다가 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원래 작은 수첩의 검은색 인조 가죽 위에는 <PD수첩>이라는 금박 로고가 있었는데, 위에 볼펜 똥을 계속 닦았는지 '첩'이라는 글자만 남았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한참 그리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써 내려갔다.   


' 막 도착한 리무진에서 양복을 입은 세 명이 내린다. 제일 먼저 운전석의 남자. 조수석. 상석. 리무진이 섰던 앞쪽으로 건물의 짧은 계단 위에는 그들이 올 것 알고 기다리던 한 남자가 내려다보며 서 있다.


보스를 비호하며 올라서려던 계단 참. 조수석의 앉았던 남자는 주머니에서 총을 빼서 재빠르게 자기편 운전자의 머리를 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스의 경동맥에 칼을 꽂았다. 검붉은 피가 촤악- 얼굴에 튀었다. 보스는 놀라며 그를 쳐다봤고 눈으로 여러 가지 말을 쏟아냈다. 눈빛이 오갔다. 어쩌면 보스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덕였던 것 같다. 아니 미소? 칼을 꽂았던 남자는 그의 왼쪽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다시 한번 탕-. 쓰러진다.

남자는 계단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그때 계단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적의 가슴 안 쪽에서 탕- 하고 발사된 총알. 남자의 눈썹과 눈썹 사이 미간을 뚫고 지나간다. 뒤통수에 골과 피가 먼저 바닥에 흩어지고, 그 위에 그대로 넘어진다. 그의 눈이 하늘을 바라본다. 눈동자에 밝은 달의 그림자가 보인다. 뇌의 반쪽이 날아가 버린 남자의 입에서 입버릇처럼 되뇌던 소리가 작게 새 나온 것도 같았는데... 젠장? 아니, 시발? 좆됐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구척 장신의 학과장이 한쪽 손에 파란색 교무수첩 파일을 들고 들어왔다.


"... 정외과 97. 과대 강상훈, 강상훈이... 이 자식 왜 임 교수 방 들어가자마자 바로 휴학계야? 면접 볼 때 비교정치 어쩌구 저쩌구 떠든 거 다 기억하는데. 어디 취직이라도 하시게? 뽑는 데도 없는데. 맥놓고 걍 한 번 놀아보시게?... 강상훈이 이노무시키... 한 조교한테 얘기 들었지? 이거 우리 과에선 진짜 좋은 기회야. 특별히 생각해서 부른 거라고. 스타트 끊는 거니까 후배들 봐서 책임감 가져. "


감색 양복을 휘적거리면서 방의 안쪽 자기 책상 앞으로 걸어간 학과장은 더운지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책상 위.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여러 개의 A4 묶음 들 속에서, 파일 한 개를 찾을 동안 그의 전화벨이 서너 번 울렸다.


"... 아휴, 의원님. 저희가 감사하죠. 학생은 보증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뭐든 가르쳐만 주면 빨리빨리 배울 겁니다. 넵. 그럼요. 그럼 그날 저희 학장님 하고. 네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상훈은 외교학을 가르치는 학과장의 수업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지만. 그의 손엔 이미 그의 성적증명서와 마지막 학기에 조교가 일괄로 걷어갔던 공인 영어성적사본이 쥐어져 있었다.



 


 *                         *                        *                          *

 



6차선 대로 앞.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들을 끼고 안쪽 골목으로 들어가 두 번째 건물 2층.  이런 곳으로는 아무도 찾아올 같지 않은 ***비뇨기과 유리문 옆으로, 약속한 정치인의 이름이 붙은 사무실이 있었다. 면접을 본 사람은 40대 중반 대머리 남자로, 수행비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 의원은 이른 나이에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판사로 재직하다가 개혁적 소수의견을 내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현재 대통령이 된 당대표에게 몇 년 전 전격 발탁되어 정치에 입문, 서울의 한가운데에서 3선 의원을 제치고 당선되었다. 앞길이 창창한 여성 초선의원이었다. 수행비서는 커피 한잔을 타서 상훈이 앉은 유리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별 말하지 않고 있다가. 툭 하고 한마디를 건넸다.  


"...  면허가 없어? 거 요즘 젊은이 아니네, 이상한 친구네... 영어는 좀 하죠? 이번 주는 됐고, 다음 주부터. 아홉 시. 그때 의원님 정식 인사도 하고. 거... 머리는 조금 더 자르는 게 좋지 않겠어?"




 *                         *                        *                          *

 




종로에서 남대문 쪽을 향해 사람들을 헤치며 천천히 걷다 보면, '낙원'이라는. 그 이름을 더욱더 쓸쓸하게 만드는 회색 유광 타일을 전체에 붙힌 오래된 악기상가 건물이 나온다. 반은 옥상 테라스로 남겨두고 반만 오래된 영화관을 개조해 시네마테크로 재개관한 지 몇 년이 되었건만 올 때마다 관람객은 한 두 명 , 오늘 하나 추가. 상영관 앞 로비 카페조차 문 닫은 날이 더 많았는데 그날은 웬일로 사장이 나와서 종로 3거리를 때리던 이효리의 '텐미닛'을 돌림노래로 만들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눈을 찌르는 유리문 바깥으로 사람이 하나 보였다. 처음엔 남자아이인가 했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벽체에 상채를 반쯤 빼고 거리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자기를 보는 건가 싶었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시선의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양쪽 팔꿈치를 난간에 기댄 채 입맛을 다셔가며 천천히 담배를 다 피웠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발을 올려 운동화 바닥에 불을 비벼 끄고는 사람이 오가는 거리를 향해 꽁초를 톡 하고 날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푸른 언덕에 세워진 야트막한 돌담에 사람들을 쭉 세워놓고 그들의 몸 선을 따라 하얀색 페인트를 칠해 실루엣을 만드는 것이었다. 어른, 아이, 여자, 남자. 그들의 외곽선이 아기자기한 능선으로 이어졌다. 아이는 그림을 보며 웃는다. 해고당한 역사 선생, 잘린 신문기자, 팔 때마다 사람에 따라 가격을 바꾸는 슈퍼마켓 캐셔. 그들이 꿈꾸는 30년 후. <2000년에 25살이 되는 조나>. 조나의 세상은... 이미 3년이 더 지나가고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체의 사회, 문화적 변화를 요구했던 68 혁명을 대표하는 영화라는 거창한 수식에도 불구하고. 좋게 말하면 낭만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막연한 영화였다.





불이 켜지자 제일 앞자리에서 앉았던 그녀가 돌아서서 관객석 쪽을 봤다. 짧게 자른 반 곱슬머리를 귀 뒤로 넘긴,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자. 건물 옥상에서 거리 쪽으로 담배꽁초를 무단투기했던 그 여자는 흘러내리는 남방셔츠를 살짝 걷어올리고 마이크를 들었다가. 그냥 끄고 큰 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재밌게 보셨죠. 이번 누벨바그특집 2를 기획한 프로그래머 차소원입니다. 관객과의 대화, 하셔야죠? 소수정예니까 오붓하게... 자기소개부터 간단히 해주시고 영화 소감 말해볼까요. 거기 일어선 아저씨부터? "


 

질색이다. 제일 뒷자리에 앉았던 상훈은 벗었던 재킷을 살며시 들고 몸을 일으켰다. 명백하게 안 하겠다는 표시를 하며 일어서는 사람을 콕 집어 지목할 줄은 몰랐다.


" 아... 저... 저는 그냥 아저씨고요. 다른 건... 모르겠고... 자막에 오타가 좀..."


밤톨머리 여자가 그를 노려보더니 방긋 웃었다. 여름같은 미소였다.


  











계속 -












https://www.youtube.com/watch?v=Xp8Ep1W-a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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